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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53화 (54/224)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53화

‘정의탁이랑…… 앞에 앉은 건 배새벽인데.’

보통 조원끼리 다 같이 밥을 먹으러 오는데 왜 둘만 남아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예찬은 조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식판을 든 채 정의탁 쪽으로 향했다.

“안녕.”

“윽, 예찬이 형.”

“안녕하세요.”

옆에 식판을 내려놓자 대놓고 싫은 티를 내는 정의탁과 달리 배새벽은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시간도 없고 돌려 말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 예찬은 바로 직구를 날렸다.

“왜 둘이 먹어?”

“……둘이 먹으면 안 되나요?”

“둘이 먹으면 이상하지.”

“으으…….”

대충 얼버무린다고 넘어갈 사람이 아님을 깨달은 정의탁이 앓는 소리를 냈다. 예찬은 이번엔 정면에 있는 배새벽을 바라보았다.

“말하기 불편해?”

“아뇨, 저는 별로. 의탁이 형, 말해도 되나요?”

정의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리 말해 두겠는데요. 이거 우리 조의 문제니까 끼어들 생각 하지 마세요. 그냥 듣기만 하는 거예요?”

“일단 그런 거로 해 두고 말해 봐.”

“일단이라니…… 하, 그래요. 그게 말이에요.”

정의탁이 풀어 놓기 시작한 사정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예찬이 황당한 표정으로 배새벽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니까…… 얘가 센터를 맡은 게 아니꼬워서 다른 조원들이 얘를 따돌리고 있다고?”

정의탁이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조용히 좀 해요!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누가 들으면 안 되는 건 너희 조 나머지 셋이지.”

밥 먹을 때만큼은 카메라를 돌리지 않아서 편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만큼은 카메라의 존재가 너무 간절했다.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도 배새벽은 태연하게 후식으로 나온 젤리의 포장을 뜯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예찬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번 경연은 먼저 투표를 통해 각 콘셉트에 어울리는 연습생들을 나누었다. 그리고 각 콘셉트당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연습생이 조 센터를 맡게 되어 있었다.

순발식 순위는 정의탁이 높았지만 조의 센터는 배새벽이었다.

다른 콘셉트와 표가 갈렸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지만, 나머지 세 사람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었다.

정의탁을 복도로 불러낸 세 사람은 음모론을 펼쳤다.

연습생 기간은 거의 없다시피 한 데다 말수도 없어서 눈에도 잘 안 띄고, 1차 등급 평가에서는 겨우 C를 맞았던 배새벽이 제일 많은 표를 받았다는 것이 이상하다고 말이다.

딱 봐도 같잖은 자존심이 상해서 그러는 것이었다.

어이가 없던 정의탁은 헛소리 말라고 쏘아붙였다가 함께 따돌림당하고 있다고 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착각이었다.

배새벽은 연습 기간은 짧았지만 춤과 노래 모두 츄마프 내에서 상위권이었고, 말수는 없지만 얼굴이 다해서 방송이 끝날 때마다 얼굴만 모은 게시물이 올라오길 기다리는 팬들이 있을 정도였다.

또 1차 평가에서 C를 받은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후 2차 평가에서 A등급까지 단번에 올라간 것이 더 핵심이었다.

‘얘네 조가 누구였더라…….’

기억을 더듬은 예찬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물었다.

“너희 조에 김대영 형 있지 않아? 스물일곱 살…….”

“그 형이 제일 먼저 시작했어요.”

정의탁이 입을 삐죽거렸다. 예찬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양반이 시작했다고?

‘김수영을 보고도 이러다니, 어깨 위에 달고 있는 건 장식품인가?’

거기다 팬들이 뽑아 준 결과에 불복하는 것이니 죄질이 더 나빴다.

이런 돌대가리들이 2차 순발식까지 살아남다니, 츄마프의 위상까지 함께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예찬은 여전히 식사에만 집중하고 있는 배새벽의 얼굴을 살폈다.

어려도 너무 어렸다.

‘얘가 몇 살인데 이런 애를 상대로 샘을 부려…….’

아직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한 달도 채 안 된 열일곱 꼬맹이였다. 젖비린내 나는 어린애를 상대로 최소 세 살에서 최대 열 살이 많은 놈들이 왕따를 조장하고 있다는 게 기가 막혔다.

예찬은 어디 가서 말하면 절대 안 된다며 제 딴에는 무섭게 으름장을 놓는 정의탁의 말을 끊었다.

“제작진한테 말은 했어?”

“됐어요.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말아요.”

퍽이나 걱정이 안 되겠다는 얼굴로 예찬은 정의탁을 빤히 바라보았다. 한숨을 푹 내쉰 정의탁이 예찬의 숟가락을 들어 손에 쥐여 줬다.

“밥 먹으러 왔으면 밥이나 먹고 가세요, 아저씨.”

“힘들면 언제든 말해.”

“말이라도 고맙습니다.”

정의탁은 정말로 도움을 청할 생각이 없는지 빈말로 받아들였다.

찜찜한 기분으로 대충 식판에 있는 음식을 입으로 쓸어 담고 나오자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조원들도 식당에서 나왔다.

“얘기는 잘 끝났어?”

“네, 뭐.”

조원 중에서 유일하게 붙임성이라고 부를 만한 게 있는 선우이경이 다가왔다. 예찬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을 보니 잘 안 된 모양인데.”

“잘됐는데요.”

슬쩍 떠보는 선우이경에게 단호하게 대답했다.

예찬이 먼저 걸음을 옮기자 선우이경이 지치지도 않고 다시 옆으로 붙어 왔다.

“뭐, 무슨 일이냐고 물어볼 거 아니니까 그렇게 경계하지 말고. 아무튼 그쪽에 무슨 문제가 있든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우리 경쟁자잖아?”

장난스럽게 예찬을 쿡 찌른 선우이경이 씩 웃었다. 예찬은 이번에도 대충 고개를 끄덕였으나 속으론 코웃음을 쳤다.

보통의 경우라면 선우이경의 말이 맞았다.

그러나 예찬의 목표는 츄마프에서 상위 9인에 들어 데뷔하는 게 아니었다.

원하는 멤버 아홉 명을 모아 팀을 만들어야만 했기에 신경을 끌 수 없었다.

‘정의탁이랑 배새벽이 그 둘인데 여기서 멍청이 세 마리한테 발목 잡히는 꼴은 못 보지.’

오늘 연습이 다 끝나면 정의탁의 방에 찾아가 봐야겠다. 마음을 굳힌 예찬은 연습실로 향하는 걸음을 빨리했다.

“자, 그럼 다시 연습 시작하자!”

점심을 먹은 직후임에도 식곤증을 호소하는 조원은 한 사람도 없었다.

오히려 정열이 흘러넘치다 못해 화산처럼 터지고 있었다.

예찬은 서로에게 자극받아 터무니없는 짓을 벌이고 있는 것 같은 안무 조에서 눈을 뗐다.

식사 전에 못다 한 가사 작업 마무리에 박차를 가하는 게 먼저였다.

‘……얼추 됐군.’

이 정도면 남한테 보여 줄 수 있겠다 싶어진 예찬은 안무 조를 불렀다.

“가사 대충 손봤는데 같이 보시죠.”

거의 바닥과 한 몸이 되어 구르고 있던 네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안 좋은 예감이 등줄기를 스쳤다.

‘……대체 어떤 안무를 짜고 있는 거야.’

땀으로 앞머리가 촉촉하게 젖은 선우이경이 성큼성큼 걸어서 제일 먼저 다가왔다.

“오, 생각보다 더 빠른데?”

“고생했어.”

뒤이어 다가온 강해솔도 한 마디를 건넸다.

예찬은 다른 조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가사를 확인하는 동안 우휘겸이 가져다준 안무 스케치를 살펴보았다.

‘……어디가 머리야?’

포인트 안무가 될 동작들을 메모지에 그린 거 같은데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옆에 흘겨 쓴 글씨로 보아 선우이경이 그린 듯했다. 글씨뿐만 아니라 그림도 영 아니었다.

예찬이 글씨 암호에 이어 그림 암호를 해독하고 있는 사이, 가사를 전부 확인한 강해솔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그대로 써도 되겠는데?”

“그래요?”

완벽주의자인 강해솔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더없이 반가웠다.

너무 좋아하는 티가 났는지 말없이 눈을 한 바퀴 굴린 강해솔이 슬쩍 예찬과의 거리를 벌렸다.

‘하, 저놈의 낯가림.’

강해솔에 이어 나머지 세 사람도 만족스러운 듯 예찬을 치켜세우기 시작했다.

“와, 진짜 속도와 질 둘 다 챙기다니 대견해~”

“내 파트도 원래 느낌을 살리면서 자연스럽게 이었네.”

“고생 많았어.”

지옥의 조별 과제라고 생각했던 게 머쓱해질 만큼 훈훈한 분위기였다.

“그럼 일단 이 가사대로 불러 보고, 어색한 부분이 있으면 그때 바꾸죠. 안무도 짠 곳까지 끊지 말고 이어서 해 볼게요. 예찬이 네가 노래 좀 틀어 줘.”

“네, 그럼 셋 세고 틀게요.”

강해솔의 말에 예찬을 제외한 네 사람이 대열에 맞춰 섰을 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분위기가 좋았다.

예찬은 셋을 센 다음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춤이 시작되고 자신이 들어갈 곳이 어디쯤일지 짐작하며 감상하던 예찬의 표정이 점차 굳었다.

첫 번째 후렴까지 안무를 짰는지 네 사람의 동작이 중간에 멈췄다. 예찬은 말없이 노래를 정지했다.

빨갛게 상기된 뺨을 한 선우이경이 숨을 몰아쉬다 물었다.

“어때?”

나머지 세 사람의 얼굴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예찬은 기대감으로 눈을 빛내는 네 사람과 차례로 눈을 마주친 다음 말했다.

“이건 춤이 아니라 곡예죠.”

이 미친놈들이 춤을 추라고 했더니 아주 서커스를 하고 자빠져 있었다.

차가운 대답에 네 사람의 동공이 가늘게 흔들렸다.

예찬은 한숨을 삼키고 조원들의 동작을 촬영한 패드를 내밀었다.

“다들 열심히 한 건 알겠는데요. 기합이 들어간 수준이 아니잖아요.”

예찬의 말대로 화면 속 네 사람은 진기명기쇼에 나온 사람들처럼 고난도의 동작을 이어 갔다.

그 와중에 상대적으로 실력이 처지는 우휘겸과 이승헌을 살짝씩 숨기는 방식이 노련해서 어이가 없었다.

‘이런 데다 재능 자랑하지 말라고…….’

고작 한나절도 안 되어서 이런 안무를 짜고 이렇게 칼같이 맞춘 것은 대단했지만, 이건 춤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아니었다.

넋을 놓고 화면을 바라보던 선우이경이 앓는 소리를 냈다.

“……으음, 진짜 그러네. 다들 잘 따라오니 더 굉장한 걸 보여 주겠다는 생각에 잠깐 정신을 놨었나 봐. 미안.”

“형만 그런 것도 아닌데요. 저도 이런 동작도 있다고 내세우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 같습니다.”

선우이경의 사과에 강해솔이 고개를 저었다.

우휘겸과 이승헌은 기묘한 것을 보듯 자신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영상을 감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고난도 동작을 보여 주고 싶은 마음이 앞서다 보니 안무 연결성이 영 아니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괜찮아 보이는 걸 닥치는 대로 다 집어넣다 보니 이렇게 되는 거지.’

예찬이 지적하기 전에 그 점을 깨달았는지 선우이경이 머리를 거칠게 헤집으며 다시 사과했다.

평소에는 저놈의 발이 과연 땅에 붙어 있는 게 맞는지 헷갈릴 정도로 가벼운 주제에, 일에 관해선 진중한 태도를 보였다.

“동작들도 너무 따로 논다. 내가 체크를 안 했어.”

강해솔이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처음 맞춰 보는 거니 그럴 수 있죠. 그보다 지금까지 짠 안무를 다 버리는 건 좀 그런데, 어떻게 다듬어서 쓸 수 없을까요?”

“그러게. 연결 부분들만 좀 바꾸면 괜찮으려나?”

“저기 두 분.”

예찬은 여전히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두 연장자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선우이경과 강해솔의 눈이 예찬에게 향했다.

“1절만 췄는데도 지금까지 숨이 거치신데, 이걸 3분 이상 할 수 있을까요?”

“……!”

동시에 망치로 머리통을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표정이 된 두 사람을 본 예찬은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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