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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62화 (63/224)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62화

김대훈을 대충 돌려보낸 후 대기실로 돌아왔다.

모니터를 확인하자 범세혁과 심상록이 있는 마지막 조의 무대가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괜찮아?”

가까운 빈자리에 앉자 어느새 살금살금 다가온 우휘겸이 옆자리로 옮겨 걱정스레 물었다.

예찬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이 조금 밝아진 우휘겸이 잠시 망설이다 좀 더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무슨 일로 찾아오신 건지 물어봐도 돼?”

‘뭐지. 이 자식, 연예인 인맥 쌓고 싶은 건…… 음, 그건 아니군.’

예찬은 미심쩍게 흘겨본 우휘겸의 눈이 너무 맑아서 반성했다.

아무래도 순수하게 자신을 걱정한 모양이었다.

다른 놈이 물었다면 대충 둘러댔겠지만, 우휘겸에게는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전에 왔을 때 재밌으셨나 봐. 구경 오셨대.”

“아.”

별일 아니었다는 것에 안심했는지 우휘겸은 잠시 고개를 주억이더니 조용해졌다.

예찬은 다시 모니터에 집중했다.

‘시나브로’ 조보다는 못하지만 관객의 열기가 뜨거웠다.

특히 범세혁이나 심상록의 파트에서는 대기실까지 객석의 환호성이 희미하게 들릴 정도였다.

[고난, 근심, 걱정 없이 오늘도 변함없이 Auspicious Day.]

실수 하나 없이 무대가 끝이 났다. 대기실에 있던 제작진이 촬영을 마무리하고 결과 발표 준비를 하기 위해 빠져나갔다.

예찬은 잠시 다른 연습생들과의 거리를 확인하고 우휘겸에게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Count Down’은 어땠어?”

우휘겸이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반응을 보니 예찬의 예상대로 평탄치 못한 무대였던 모양이다.

마지막 조의 무대가 한창일 때 대기실로 돌아온 ‘Count Down’ 조의 멤버들은 침울한 기색이 역력했다.

범세혁 조를 모니터링 중이었기에 일단 체크를 미뤄 두었지만, 결과 발표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파악해 두고 싶었다.

‘관객 투표가 있는 경연에서 섹시 콘셉트면 망하기 어려운데.’

“음…….”

“아, 말하기 어려우면 괜찮아. 방송으로 보지 뭐.”

말을 고르느라 입을 열지 못하는 우휘겸에게 예찬이 손을 내저었다.

동시에 어깨에 묵직한 무게가 실렸다.

“뭐가 괜찮은데?”

선우이경이 어깨에 팔을 걸치며 물었다. 딱히 숨겨야 할 화제가 아니었기에 예찬은 슬쩍 팔을 걷어 내며 대답했다.

“제가 늦게 들어와서 ‘Count Down’ 무대를 못 봐서요. 어땠냐고 묻고 있었어요.”

“아아, ‘Count Down’…….”

선우이경이 의미심장하게 말꼬리를 늘렸다.

예찬과 마찬가지로 주변 연습생들과의 거리를 잰 선우이경은 작게 속삭였다.

“너무 열심히 했더라고.”

“아.”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느낌이 확 왔다.

예찬의 표정을 읽은 선우이경이 두 눈을 꾹 감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느 정도 실력도 있고 인기도 있는 연습생들이 모였다 보니, 누가 봐도 대단하다는 평가가 나올 만한 무대를 만들고 싶은 욕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전까지 연습했던 1안을 백지로 돌리고 아예 새로운 안무와 가사로 2안을 호기롭게 준비한 연습생들은 의욕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남은 시간이 너무 짧았다.

고작 사흘 만에 새로 무대를 만들고 연습까지 하다 보니 컨디션은 바닥을 치고 연습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본무대 중 1안과 2안을 섞어 부르는 것은 기본이요, 안무 중 연습생끼리 충돌만 네댓 번 있었다고 했다.

이보다 더 망할 수 없는 무대의 완성이었다.

센터인 채은성을 포함해 연습생들은 다 끝났다고 자포자기한 분위기였으나 예찬은 조금 다르게 생각했다.

‘오늘 현장 결과는 별로겠지만, 3차 순위 발표식에선 덕 좀 볼 걸.’

오디션 프로그램, 특히 연습생 오디션 프로그램의 경우 실력만으로 순서가 정해지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나쁘지 않았던 무대를 무리한 욕심 때문에 엎어 버린 것은 ‘프로’의 관점에서 보면 실격이었으나, 대상이 ‘연습생’이라면 달랐다.

팬들은 발전하기 위해 노력하다 넘어진 연습생의 서사에 감동하고, 이후에 있을 성공을 기대하며 더 열심히 응원할 것이었다.

비단 연습생 시기뿐만이 아니었다.

데뷔 후에도 팬들은 자신의 아이돌의 실패에 때때로 아이돌 본인보다 더 가슴 아파하고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워 주기 위해 온 힘을 쏟곤 했다.

‘Count Down’ 조의 팬덤 추이를 한동안 체크하기로 결정한 예찬은 곧이어 제작진의 안내를 받아 다시 무대 위로 이동했다.

관객들이 전부 빠져나간 경연장은 썰렁했다.

무대 위에는 연습생 서른 명과 MC 앤드류뿐이었다. 제작진의 신호를 받은 MC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럼 지금부터 3차 경연의 결과 발표가 있겠습니다. 다 같이 스크린을 보실까요?]

옆에 선 강해솔의 어깨가 긴장으로 곧게 펴졌다.

MC가 가리키는 대로 스크린을 향해 연습생들이 몸을 돌려 서자 이윽고 결과가 표시되기 시작했다.

[선호도 득표수]

― 6위 : Count Down (317표)

― 5위 : 도미노 (435표)

― 4위 : Raindrop (542표)

빠른 속도로 하위권 세 조의 순위와 득표수가 공개되었다.

중복 투표가 가능했다 보니 하위권도 득표수가 바닥을 치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미는 연습생이 없는 조에도 후하게 투표했네. 아니면 단순히 누구 팬이 아니라 순수한 시청자층이 많이 온 건가?’

“아이고…….”

뒤에 서 있던 남지유가 아쉬웠는지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예찬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남지유 쪽이 아니라 ‘칠일 동안’이 3위인가…….’

완성도와 별개로 결과는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어느 정도 연습생들의 리액션을 찍었다고 생각했는지 MC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다음 보여 주시죠.]

― 3위 : 칠일 동안 (566표)

상위권에 진입했다 보니 짧게 박수가 나왔다.

칠일 동안의 조원인 정의탁과 배새벽을 포함한 다섯 연습생이 이쪽저쪽 번갈아 몸을 돌려 가며 고개를 숙였다.

웃고 있음에도 어딘가 고단한 기색이 느껴졌다.

[이제 1위와 2위만을 남겨 두고 있습니다. 1위를 한 팀 전원에게는 무려 20만 표의 베네핏이 주어집니다.]

전체 득표수가 확 뛰며 베네핏의 의미가 무색해졌다 보니 제작진도 숫자를 시원시원하게 올려 버렸다.

예찬은 전에 없이 여유로운 기분으로 결과 발표를 기다렸다.

[20만 표의 베네핏을 차지할 주인공은!]

MC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스크린의 글자가 바뀌었다.

― 2위 : Auspicious (707표)

― 1위 : 시나브로 (841표)

‘좋아.’

예상대로 이변은 없었다.

폭죽까지 준비한 제작진의 성의에 감탄하며 예찬은 밝은 얼굴로 연달아 허리를 숙였다.

데뷔권 안에 들어 있는 연습생 다섯이 무대를 했는데 1위를 못 하기는 쉽지 않았다.

게다가 콘셉트마저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Auspicious’ 조에 비해 큰 메리트가 있었다.

‘제복이랑 한복 둘 다 팬들이 좋아하는 콘셉트긴 한데, 츄마프 기본 의상이 제복이라 그쪽은 겹치잖아.’

물론 무대 자체의 퀄리티도 1위였다는 자부심이 있기에 예찬은 기꺼이 승리의 달콤함을 만끽했다.

소란스러움이 가라앉을 무렵, MC가 제작진에게 건네받은 마이크를 강해솔에게 넘겼다.

[그럼 리더인 강해솔 후보생부터 소감을 짧게 들어 볼까요?]

[좋은 조원들을 만나 열심히 노력한 결과가 돌아온 것 같습니다. 저희의 노력을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이크를 쥐기 무섭게 강해솔이 속사포처럼 소감을 읊었다. MC의 ‘짧게’에 꽂힌 모양이었다.

‘이 형 긴장했네.’

순식간에 강해솔에게 마이크를 전달받은 선우이경이 웃음을 꾹 참고 입을 열었다.

[이번 경연 준비하는 내내 너무 즐거웠는데, 결과도 이렇게 잘 나와서 너무 기쁘네요. 다음에도 꼭 다시 무대에 오르고 싶습니다.]

마지막 문장을 말하며 선우이경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예찬을 바라보았다.

예찬은 못 본 체하고 얌전히 손뼉을 쳤다.

이승헌과 우휘겸을 지나 마이크가 드디어 예찬의 손까지 도착했다.

이미 나올만한 소감은 다 나온 상태라 예찬은 가볍게 마이크를 들지 않은 손을 흔들었다.

[공주님들,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요! 앞으로도 응원해 주세요!]

예찬이 손가락으로 하트를 만들자, 아까부터 기분이 굉장히 좋아 보이는 선우이경이 자신의 양옆에 서 있는 강해솔과 이승헌의 팔을 붙잡아 하트를 만들게 했다.

예찬도 마이크를 든 손으로 우휘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네, 공주님들을 향한 후보생들의 사랑이 느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럼 이어서 오늘 가장 많은 공주님의 마음을 훔친 후보생을 만나 볼까요?]

스크린의 화면이 다시 바뀌더니 빠르게 하위권부터 득표수를 공개했다.

이번 투표는 관객 한 사람당 가장 마음에 든 연습생 단 한 명에게만 표를 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충격적이게도 0표가 나온 연습생들도 있었다.

예찬은 속으로 짧게 애도의 시간을 가졌다.

예찬은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으로 편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상 이번 경연에 누구의 팬이 가장 많이 당첨됐느냐에 따라 결과에 충분히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투표였다.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서는 쿨한 태도를 유지해야 정신 건강에 좋지.’

제작진의 계획보다 시간이 지체되었는지 순위 공개가 빠르게 이어졌다.

상위권부터는 그나마 숨은 돌릴 정도의 속도로 텍스트를 띄우더니, 데뷔권인 9위부터는 짧은 소감을 말할 수 있는 시간도 주어졌다.

[이 영광을 ‘칠일 동안’을 작곡해 주신 PiPiPi 작곡가님께 돌리고 싶습니다.]

배새벽은 9위였다.

평소와 같이 맹한 표정이었으나 자세히 보면 눈만큼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그 불타는 시선의 끝이 닿은 곳은 오늘 PiPiPi가 앉아 있던 2층 객석이었다.

‘온 거 봤었군.’

그래서 더 무대에서 온몸을 갈아 넣을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예찬은 미래의 팀 멤버에게 큰 영감을 준 PiPiPi에게 감사했다.

[강해솔 후보생, 이번엔 천~ 천히 해도 됩니다.]

3위가 발표되고 이번에도 강해솔이 쏜살같이 소감을 끝낼까 염려된다는 듯 MC가 장난스레 말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강해솔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이크를 받았다.

아주아주 느린 소감이 이어졌다.

[정말…… 감사하고요…… 앞으로도…… 열심…….]

[저기, 강해솔 후보생. 내용을 좀 길게 말해도 된다는 거예요. 말을 늘려서 하라는 게 아니고.]

[아.]

고장 난 강해솔의 손에서 제작진이 마이크를 빼 갔다.

헛기침으로 웃음을 참은 메인 MC가 팔을 크게 들어 올렸다.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드디어 오늘의 하이라이트! 개인 최고 득표 후보생의 자리를 두고 또다시 이 두 명이 남았습니다! 범세혁 후보생, 그리고 하예찬 후보생!]

제작진의 수신호에 맞춰 예찬과 범세혁이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자, 그럼 두 분. 서로를 향해 한 마디씩 해 주실까요?]

먼저 마이크를 받은 범세혁이 예찬과 눈을 마주치고 활짝 웃었다.

[예찬아, 너랑 이렇게 겨루는 거 정말 재밌다. 앞으로도 평생 하고 싶어.]

‘진짜 웃긴 놈이야.’

가슴이 얼마나 울렁거리는지 마이크를 든 손이 떨릴 것 같았다.

예찬은 온 힘을 다해 마이크를 꾹 쥐었다.

그리고 똑같이 씩 웃어 주었다.

[언제든지 환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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