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85화
?
?
18위의 순서가 끝났다.
가족석에 앉아 있던 기해랑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기태랑, 한 번은 버텼구나!’
프로그램의 막바지까지 어찌어찌 질경이같이 버틴 엄마 아들의 실력은 그녀의 눈에도 처음보다 훨씬 향상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아직 같은 무대에 선 연습생들의 발목을 잡는 게 훤히 보였다.
도무지 9위 안에 들어 데뷔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다만 앞서 있었던 세 번의 순위 발표식 모두 문을 닫고 합격한 기태랑이었기에, 그의 팬들은 마지막 순위 발표식도 거짓말처럼 9위로 데뷔할 수 있지 않을까 믿고 있었다.
‘걔의 팬들은 실력이야 앞으로 더 늘 거라서 괜찮다고 하던데…… 근데 현시점에서 부족하면 끝 아닌가?’
기해랑이 냉정하게 생각했다.
미취학 아동 시절부터 그 순간의 실력으로 승패가 갈리는 겨루기의 세계 속에 살아왔던 기해랑은 아직 아이돌 업계의 정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다음은 17위입니다.]
MC의 말에 다시 전체 조명이 꺼지고 스포트라이트만 남았다.
기해랑은 모니터에 비치는 MC 대신 맨눈으로 무대 위의 기태랑을 바라보았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기해랑의 눈에도 보일 정도였다.
[17위는, 김세경 후보생입니다.]
‘한 번 더 살았구나!’
기해랑은 이 정도면 잘 버텼다고 생각했다.
최선을 다한 엄마 아들에게 간만에 모아 둔 용돈을 탈탈 털어 고기까지 사 줄 의향이 있었다.
그러나 기태랑의 이름은 그다음 순서에도 불리지 않았다.
[16위, 이민규 후보생입니다.]
이번엔 이민규의 조명이 꺼졌다.
“후우우…….”
거실의 커다란 TV로 생방송을 시청하고 있던 수험생 최모 양은 한껏 들이켰던 숨을 내뱉었다.
운 좋게 부모님이 부부 동반 모임에 참석한 덕에 큰 화면으로 예찬을 볼 수 있었다.
‘긴장해서 토 나올 것 같아!’
예찬이 지금 불릴 리 없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가슴은 모르는 건지, MC가 호명할 때마다 간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단속하며 그녀는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남은 연습생들의 얼굴이 클로즈업될 때마다 만감이 교차했다.
‘애들이랑 정들어서 그런지 마음이 무겁네. 으음, 그나저나 이경이랑 휘겸이, 의탁이는 데뷔할 거 같은데, 승헌이랑 은성이는 할 수 있으려나? 하면 좋겠다…….’
취향이 확고한 그녀는 처음 연습생들의 프로필을 봤을 때부터 냉미남 아홉을 골라 꾸준히 밀고 있었다.
예찬이 들어 있는 이상 츄마프를 통해 데뷔할 그룹은 당연히 응원할 예정이었다.
그 김에 이왕이면 취향인 연습생이 한 명이라도 더 같이 데뷔했으면 싶을 뿐이었다.
[15위는, 임버들 후보생입니다.]
‘앗, 순위 변동이 꽤 있긴 하구나…… 아니, 그래도 예찬이는 괜찮지! 괜…… 찮겠지?’
앞서 발표된 세 연습생과 달리 순위 하락 폭이 꽤 큰 임버들을 보고 최모 양은 초조함에 다리를 떨었다.
양손을 곱게 모으고 온갖 신을 찾고 있는 그녀의 귀에 지금 들려선 안 될 소리가 들렸다.
띠리릭.
현관 도어락이 풀리는 소리였다.
뻑뻑한 목을 뒤로 돌리자 부모님과 눈이 마주쳤다.
‘……망했다.’
예상보다 훨씬 이른 시간.
난데없는 부모님의 귀가에 최모 양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너무 급작스러운 탓에 리모컨을 잡을 새도 없었다.
최모 양과 그 뒤의 TV를 몇 번 번갈아 보던 어머니가 이내 상황을 파악하고 목청을 키웠다.
“아니, 너 독서실 안 가고 지금 뭐 하는 거야?”
“아, 엄마! 잠시만! 이것만 다 보고!”
고삼이 제정신이냐고 등짝을 맞으면서도 최모 양의 시선은 TV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MC가 다음 순위를 발표하려고 마이크를 들어 올린 순간.
조용히 다가온 아버지가 TV 화면을 껐다.
‘아, 이제부터가 진짜인데!’
* * *
15위인 임버들의 소감이 끝나고 다시 순위 발표가 재개되었다.
MC가 다음 봉투 안의 카드를 확인하는 동안 기태랑은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당연히 진작 이름이 불리고 끝났을 거라 생각했는데 벌써 14위 차례였다.
‘진짜 뽑아 주신 분들 감사해여……!’
마음 같아선 한 분 한 분 직접 감사 인사라도 드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더불어 작은 희망이 마음속에 싹텄다.
혹시.
정말 혹시, 지금까지 턱걸이로 합격의 문턱을 넘은 것처럼, 이번에도 그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
심장이 빠르게 쿵쿵쿵 뛰는 것이 느껴졌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진짜 열심히 연습하고, 같은 팀 멤버들한테도 잘하고, 팬들에게도 잘하고, 스태프들에게도 잘할게요!’
기태랑은 마음속으로 두 손을 모으고 간절히 기도했다.
[14위는!]
‘제발!’
기태랑이 눈을 꽉 감았다.
잠시 뜸을 들인 MC가 빠르게 이름을 외쳤다.
[기태랑 후보생입니다!]
‘……아.’
머리 위의 조명이 꺼졌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을 들으니 쿵쿵대던 심장이 금세 차분해졌다.
[기태랑 후보생, 마지막 소감을 부탁드립니다.]
[…….]
MC의 말에 기태랑은 주섬주섬 마이크를 들어 올렸다.
눈앞에 자신의 이름이 적힌 슬로건을 든 팬이 보였다.
평생 잊지 못할 광경이었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기태랑이 입을 열었다.
[츄마프에 참여해서 정말 많이 배우고 가는 것 같습니다. 응원해 주신 모든 분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사랑해여!]
지금까지 순위 발표식 중 가장 담담하고 편하게 소감을 말할 수 있었다.
기태랑은 환하게 웃으며 허리를 깊게 숙였다.
* * *
불사조처럼 끈질기게 살아남던 기태랑이 탈락한 후에도 발표는 이어졌다.
[13위는 윤여울 후보생입니다.]
[12위는 박나길 후보생입니다.]
예찬과 같은 조였던 윤여울에 이어 박나길이 불렸다.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박나길이 마지막 소감을 전하는 사이, 예찬은 남은 얼굴들을 살폈다.
‘이제 떨어질 만한 놈은 거의 다 떨어졌나…….’
예찬과 홀로그램 창으로 묶인 파티원들은 다행히 모두 남아 있었다.
[11위는, 이승헌 후보생입니다.]
또 하나 무대 위의 스포트라이트 개수가 줄어들었다.
“안 돼애애애!”
이승헌의 이름이 불리기 무섭게 팬의 절규가 체육관 안을 가로질렀다.
드넓은 체육관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비명에 메인 MC가 카메라에 잡히지 않도록 몸을 틀어 웃음을 삼켰다.
[크흠, 이승헌 후보생의 마지막 소감을 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
이승헌은 먹먹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음, 이렇게 탈락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정말 즐거웠습니다. 저를 응원해 주신 분들과 꼭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승헌이 소감이 끝나자 살짝 어두운 분위기의 배경음이 좀 더 웅장하고 신나는 분위기로 자연스럽게 전환되었다.
이에 맞춰 MC도 금색으로 숫자가 적힌 가죽 봉투를 들어 올렸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데뷔권 발표의 시작이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공주님들. 츄즈 마이 프린스 99 1화부터 오늘까지 2개월 반에 걸친 긴 여정을 끝내고, 드디어 왕위 계승권을 얻게 될 최후의 9인이 공개됩니다!]
무대에 설치된 모니터에 남은 연습생들의 얼굴이 차례차례 지나갔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연습생들을 둘러본 MC 앤드류는 가장 먼저 숫자 8이 적힌 봉투에서 카드를 꺼내 들었다.
탈락자 발표 때와 다르게 연습생들 위에 켜져 있던 조명이 꺼지고 전체 조명이 들어왔다.
‘남은 연습생은 열, 탈락자는 앞으로 하나.’
예찬이 진지한 얼굴로 앞을 바라보았다.
[후보생의 신분을 넘어 왕위 계승권을 얻게 될 첫 번째 왕자입니다! 8위는!]
자신에게 쏠린 시선을 충분히 즐긴 MC가 외치듯 발표했다.
[8위는! 심상록 왕자, 축하합니다!]
심상록의 머리 위를 스포트라이트가 비췄다.
보조 MC가 재빠르게 들고 있던 보주와 셉터를 심상록에게 건넸다.
이전에는 왕관 정도만 준비했던 것 같은데, 제작비가 늘어서인지 대관식 흉내가 좀 더 그럴듯해졌다.
‘그나저나 8위인가.’
아쉽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예찬의 머리를 스쳤다.
예찬의 생각에 심상록이 들어간 무대 중 지금까지 기대 이하의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5위에서 8위로 떨어진 것은, 딱히 시선을 끌 만한 큰 사건 하나 없이 평탄하게 온 것 때문인 듯했다.
‘확실히 SNS에서 언급량이 줄긴 했지.’
알아서 잘하는 놈이니 괜찮겠지, 하고 너무 방치한 게 아닌지 조금 반성이 됐다.
‘자칫 잘못해서 떨어졌으면 진짜 면목 없었겠는데. 거의 취업 사기 아닌가.’
예찬은 측면 모니터 가득 떠오른 심상록을 확인했다.
최상위권에서 뚝 떨어진 순위에 상심할 만도 했으나, 푸른색 왕관을 쓴 심상록은 더없이 환한 얼굴이었다.
[츄마프에서 정말 여러모로 과분한 사랑을 받은 것 같습니다. 여러분께서 주신 사랑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기 위해 더 노력하겠습니다.]
정중히 고개를 숙인 심상록에게 큰 호응이 쏟아졌다.
아무래도 심상록은 츄마프에 참여하는 동안 마음이 한결 단단해진 모양이었다.
[그럼 첫 번째로 계승권을 얻은 심상록 왕자께선 자리로 이동해 주십시오!]
평소보다 더 역할에 과몰입한 MC 앤드류가 정중하게 화려한 의자가 마련된 장소를 향해 손짓했다.
심상록은 번쩍거리는 의자를 보고 살짝 질린 듯했으나 의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심상록을 집요하게 따라붙은 카메라는 심상록이 흘러내릴 뻔한 왕관을 수습하며 자리에 앉고 나서야 MC를 비췄다.
[이제 두 번째로 왕위 계승권을 얻게 될 7위를 발표하겠습니다.]
긴장감이 무대 위에 흘렀다.
지난 계승식과 달리 이름 외에 다른 수식어를 붙이지 않을 모양인지, MC는 빠르게 7위 연습생의 이름 석 자를 불렀다.
[배새벽 왕자, 축하합니다!]
3차 순발식보다 또 한 단계 순위를 올린 배새벽이 왕자에게 마련된 물품들을 건네받았다.
왕관까지 머리에 올리고 고개를 들어 올리자 무대 조명 탓인지 평소보다 눈이 더 반짝반짝했다.
아직 젖살이 남아 있는 뺨과 곱슬곱슬한 머리카락 때문인지 양손에 보주와 셉터를 나눠 든 배새벽은 꼭 어린 왕자처럼 보였다.
예찬은 자신이 제안한 스타일링이 찰떡같이 어울리는 배새벽을 보며 흐뭇하게 박수를 보냈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전부 공주님들 덕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 더 좋은 모습, 좋은 무대로 보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지난 세 차례의 순발식에서 한 번도 운 적 없던 배새벽이었다.
그러나 마지막은 감회가 남달랐는지 목소리에 엷게나마 물기가 묻어났다.
배새벽이 합격자석으로 이동하고 다음 순위가 발표되었다.
[6위는 정의탁 왕자입니다. 축하합니다!]
‘우냐? ……우네.’
예찬이 돌아봤을 때 정의탁은 얼굴은 이미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니라 거의 쏟아 내는 수준이었다. 보주와 셉터를 건네기 위해 다가온 보조 MC가 당황했다.
[바, 받을 수 있어요.]
목소리만큼 덜덜덜 떨리는 손으로 정의탁이 합격자 상품을 건네받았다.
[어, 우선 저를 이렇게 지지해 주신 공주님들 너무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주도에서 지켜보고 계실 부모님과 누나들, 정말 고맙고, 츄마프 스탭분들 다들 감사드립니다. 정말, 다들 너무 감사합니다.]
감사하다는 말만 계속 반복한 정의탁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한 걸음씩 옮겨 합격자석으로 이동했다.
여전히 팔도 덜덜 떨리고 있어서 보는 사람이 다 조마조마했다.
‘저러다 떨어트리는 거 아니야?’
예찬은 다소 초조한 기분으로 정의탁을 지켜보았다.
정의탁은 다행히 물건이나 왕관을 떨어트리는 일 없이 무사히 자리에 앉았다.
마찬가지로 숨죽이고 정의탁을 바라보던 MC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다음 봉투를 꺼내 들었다.
[그럼 이번엔 5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