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1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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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
손뼉을 한 번 친 예찬이 멤버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까지가 오프 더 레코드고, 이제부턴 촬영을 하죠.”
예찬의 말에 정의탁이 준비해 온 삼각대를 꺼냈다.
“스마트폰으로 찍어야 하나? 촬영팀을 보내 줄 생각은 없어 보이지?”
“이경이 형, 이걸 보시죠.”
문 쪽을 힐끗거리는 선우이경의 말에 정의탁이 가방 안에서 자랑스럽게 캠코더를 꺼내 들었다.
“오! 어디서 났어. 도X에몽이야?”
카메라를 보자 얼굴이 확 밝아진 멤버들이 하나둘 정의탁에게 다가왔다.
정의탁은 의기양양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제주도에서 바다 건너온 소중한 친구라고요.”
“아, 부모님이 보내 주셨구나.”
제주도라는 말을 듣자마자 심상록이 출처를 눈치챘다.
“아빠가 원래 만지지도 못하게 하셨는데 아예 저 주셨어요.”
방송이 좋긴 좋다며 정의탁이 새삼스레 감탄했다.
막 캠코더를 만져 보려던 채은성은 급하게 손을 뗐다.
“은성이 왜 그래?”
“부모님 거라니까 갑자기 마음의 부담이 엄청나서…….”
“이제부터 마르고 닳도록 써야 하는데 그러지 마요!”
정의탁이 장난스럽게 캠코더 렌즈를 채은성에게 들이밀었다.
채은성은 빼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잘생긴 표정을 지었다.
예찬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 정확히는 채은성을 지켜봤다.
“예찬이 무슨 일 있어? 되게 기분 좋아 보인다.”
덩달아 웃는 얼굴로 심상록이 예찬을 내려다보았다. 예찬은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대답했다.
“뭐, 오늘부터 본격적인 시작이잖아요. 기분이 좋네요.”
실은 지난 며칠간 확인했던 채은성의 예고 시절 공연 무대를 떠올렸을 뿐이었다.
‘사람은 다 어딘가 쓸모가 있다고, 아주 좋은 발견이었어.’
아이돌 안무를 출 때와 달리 현대 무용을 하는 채은성은 무척 자연스럽고 유연했으며 힘찼다.
채은성이 마치 중력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공중에서 돌 때, 예찬은 그가 정찬양의 팬인 것마저 잊었다.
‘이건 된다!’
여태까지 가져 본 적 없는 스타일의 댄서를 얻은 예찬의 가슴이 이놈을 어떻게 쓸지 설렘으로 떨렸다.
‘그래, 사람이 어떻게 장점만 있겠어! 춤을 그렇게 추는데 리스피릿? 좋아할 수 있지! 정찬양? 좋아할 수 있어! 단점이 좀 아주 많이 무척 굉장히 크긴 하지만 살다 보면 정신 차리겠지!’
정찬양이 뒤집어쓴 가면을 차근차근 벗기다 보면 채은성의 눈에 낀 콩깍지도 벗겨지리라.
“그럼 이제 진짜 찍어요!”
그새 구경이 끝났는지 삼각대에 캠코더를 설치한 정의탁이 외쳤다.
“흠, 흠. 그럼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데뷔 앨범 준비를 시작해 보자.”
이상하게 경직된 얼굴로 심상록이 운을 띄웠다. 삽시간에 사방에서 야유가 밀려들었다.
“아니, 왜 새삼 카메라랑 낯가려요!”
“우우, 어색하다, 어색해!”
“NG! 다시 합시다!”
정의탁과 선우이경이 건수라도 잡은 것처럼 신나게 심상록을 몰아갔다.
범세혁은 장난스럽게 바닥을 두드리기까지 했다.
심상록이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하하, 우리끼리 찍는다고 생각하니 뭔가 쑥스러운데?”
뒤편에선 우휘겸이 동의하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근 석 달간 카메라랑 거의 붙어 다녔으면서. 독특하네.’
어쨌든 슬슬 본 회의로 들어가고 싶던 예찬은 다시 주제를 돌렸다.
“이제 진짜 데뷔 앨범 관련해서 이야기해 봅시다. 나는 꼭 해 보고 싶은 곡 있다, 하는 분?”
예찬은 손을 드는 시늉을 하며 멤버들과 한 명씩 눈을 마주쳤다.
분명 츄마프 촬영 당시 주야장천 진행했던 조별 회의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때보다 훨씬 넓어진 주제의 폭과 데뷔 앨범이라는 부담감 때문인지 누구 하나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나는 퍼포먼스가 엄청 화려한 곡을 하고 싶어!”
물론 그렇지 않은 놈도 있었다. 범세혁이 불끈 쥔 주먹을 치켜올리며 외쳤다.
훌륭한 의견이었다.
‘데뷔 앨범 안무는 츄마프 때보다 무조건 더 화려하고 힘들게 가야 해. 안 그러면 방구석 여포였다는 소리가 활동 끝날 때까지 쫓아다닐 테니까.’
범세혁의 말이 없었어도 3분짜리 무대가 끝나면 다리가 후들후들 떨릴 만한 안무를 계획하고 있던 예찬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히 듣고 있던 배새벽이 구석에 있던 화이트보드를 끌어오더니 범세혁의 의견을 맨 윗줄에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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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퍼포먼스 곡]
?
“또 다른 의견 있어요?”
배새벽이 마지막 글자까지 다 쓴 것을 확인한 예찬이 물었다.
범세혁이 정말 자유롭게 의견을 말하는 걸 보고 마음이 한결 편해졌는지, 이번엔 채은성이 손을 들었다.
“난 츄마프랑 이어지는 느낌이면 좋을 거 같아.”
‘이번에도 바로 괜찮은 의견이 나오는데?’
예찬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구체적으론?”
“왕자님이지.”
예찬의 되물음에 채은성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확신에 찬 얼굴로 채은성이 설명을 덧붙였다.
“사실 우리는 츄마프에서 왕자 후보생이었지 왕자가 아니었잖아. 진짜 왕자가 된 건 마지막 왕위 계승식 때고. 그러니 진짜 왕자가 된 우리의 모습을 보여 주는 곡이 있으면 좋겠어.”
채은성의 말이 끝나자 멤버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기승전결을 잘 이어서 마무리를 하자는 의도는 분명 좋았다.
그러나 드디어 지독한 왕자 콘셉트를 탈출했는데 다시 시도하기에는 망설여지는 모양이었다.
‘쉽게 품기 어려운 콘셉트긴 하지.’
그렇지만 채은성의 의견은 예찬이 딱 하고 싶던 말이었다.
완벽하게 새로운 콘셉트를 시작하기 전에, 지금까지 쌓은 서사의 완결을 위해 한 번 더 왕자가 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왕자를 아예 떼어 버리기엔 팬분들을 공주님이라고 부르는 데 너무 익숙해져 버렸지.’
시작이 츄마프였던 이상, 왕자 콘셉트는 아이돌 생활 내내 어느 정도 안고 가야 할 부분이었다.
예찬은 배새벽이 화이트보드에 적은 ‘왕자님 콘셉트’를 확인하고 망설이는 멤버들을 설득하기 위해 지원 사격에 나섰다.
“저도 은성이 생각에 동의해요. 우릴 왕자로 만들어 줘서 고맙다는 마음을 제대로 전달하기에도 좋고요.”
“음, 그렇긴 하지.”
멤버들은 예찬과 채은성의 주장에 동의하지만, 완전히 납득하진 못한 얼굴들이었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다는 의지가 강하게 느껴졌다.
‘다들 딱딱하긴.’
예찬은 그런 멤버들이 좋아할 만한 떡밥을 던지기로 했다.
“제가 방금 말한 건 가사 얘기고, 의상이나 앨범 디자인은 좀 더 현대식으로 가는 게 재미있을 거 같아요.”
“현대식?”
‘현대식’이란 단어 하나에 멤버들의 얼굴에 거짓말처럼 화색이 돌았다.
“그러네. 츄마프 때는 전부 그 세계관에 일원이 되어 움직였지만 이젠 그 나왔잖아. 현실로 나온 왕자한테 본격적인 왕자님 복장은 좀 어색할 수 있겠어.”
“그치, 왕관이나 망토 같은 몇 가지 소품만으로 왕자란 느낌은 충분히 살릴 수 있고.”
“왕자 콘셉트로 가면 처음 저흴 보는 분들도 츄마프와 콘셉트가 이어진다는 걸 듣고 호기심이 생길 수 있겠어요.”
어떤 영감이 단체로 멤버들에게 내려온 모양이었다. 거의 기획자에 빙의해 의견을 주고받는 걸 배새벽은 꼼꼼히 화이트보드에 옮겨 적었다.
“그런데 우리끼리 이렇게 정한 게 반영될 수 있을까? 레굴루스 전담팀이 생겼다는 건 전에 듣긴 했는데, 정확히 어떤 분들이 계신지도 모르니까.”
한참 신나게 이야기를 하던 심상록이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었는지 이마를 찌푸렸다.
“그러네요. 지금 나온 콘셉트는 사실 A&R 팀이랑 얘기하면서 정해야 하니까요.”
흥분을 가라앉힌 정의탁도 동의했다. 심상록은 민망한 듯 한마디 더 덧붙였다.
“사실 우리가 데뷔 앨범을 준비하자고 모이긴 했는데, 난 언제라도 앨범 준비에 들어갈 수 있도록 트레이닝을 할 거라 생각했거든.”
트레이너 선생님은 없지만 알아서 잘 연습을 해 오던 놈들인지라, 이번에도 적당히 나눠서 노래든 춤이든 연습할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확실히 연습생 기간이 좀 되는 놈들은 업계 돌아가는 걸 잘 아는군.’
그와 달리 아이돌 업계에 문외한인 채은성이나 우휘겸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파악이 덜된 모양이었다.
예찬도 이전이라면 기획 단계부터 전문가와 손발을 맞췄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특수한 경우였다.
‘일단 A&R 팀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있다고 해도 우리에게 지원을 해 줄지는 모르지.’
본심을 좀 더 덧붙이자면 A&R 팀의 실력도 믿을 수 없었다.
잠시 리스피릿 시절 원석부터 발굴해 소중히 긁어모은 스태프진이 떠올랐다.
‘수십 년간 모은 내 보물 창고를 그대로 털리다니…….’
그간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앨범 작업에 들어가자 좋았던 기억이 물밀듯이 들이닥쳤다.
예찬은 녹아내리는 멘탈을 지키기 위해 강해솔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강해솔이 이번엔 또 뭐냐는 듯 뚱하게 예찬을 돌아보았다.
예찬은 자신이 캐냈던 최고의 보석을 확인하고 급격히 안정을 찾았다.
‘그래, 하나씩 되찾으면 되는 거야. 하나씩.’
그러기 위해서 일단 끝내주는 기획으로 NJ의 시큰둥한 마음을 돌려놔야 했다.
정찬양에게 차근차근 복수할 것을 새삼 결심한 예찬은 멤버들의 의지를 북돋웠다.
“보통은 회사와 같이 진행하는 게 맞겠지만, 지금 상황이 좀 특수하잖아요. 그리고 우리는 사실 츄마프에서 알아서 다 해 왔던 터라…….”
자연스럽게 뒷말을 생략하자 멤버들의 얼굴에 만감이 교차했다.
‘그래, 떠올려라. 츄마프에서 뭐처럼 구르던 과거를. 그리고 그 결과 얻게 된 관객의 함성도.’
잠시 멤버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준 예찬이 다시 설득을 시작했다.
“저도 회사 측의 지원을 받아 견실하게 첫 앨범을 내는 게 정석이라곤 생각해요. 그렇지만 우린 보통 아이돌들과 결성 과정부터 다르잖아요. 회사가 우리를 언제까지 방치할지도 모를뿐더러, 지금 우릴 기다리고 있는 팬들이 언제까지 그 자리에 있어 줄지도 몰라요.”
‘그리고 내가 시간이 없어, 내가.’
마지막 생각을 생략한 예찬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럼 지금 할 수 있는 걸 하는 수밖에 없지 않나요?”
의지로 불타는 예찬의 눈동자에 심상록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예찬이 말대로 하루라도 더 빨리 팬들과 다시 만나고 싶은 것도 사실이고. 정확한 일정도 없이 마냥 기다리는 건 우리랑 안 맞을 것 같기도 하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강해솔도 불쑥 입을 열었다.
“그럼 콘셉트야 아까 이야기 나온 대로 간다고 치면, 일단 곡이 있어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하겠네요.”
날카로운 눈매가 예찬을 향했다.
“저 작곡에도 조금 관심이 있어서요. 옆방에 있는 장비들도 써도 된다고 하니 일단 몇 개만 찍어 올게요.”
강해솔의 고백 아닌 고백에 선우이경이 반색하며 앞으로 튀어나왔다.
“해솔이 너 작곡도 해……?”
단언컨대 지금까지 본 선우이경의 얼굴 중 가장 환한 표정이었다.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깔짝거려 본 수준이에요. 괜찮은 작곡가분한테 곡을 받을 수 있으면 당연히 그렇게 하는데, 혹시라도 그게 안 될 때를 대비해 잠깐 만져 보려는 거고요.”
“해솔이 넌 정말 최고다.”
선우이경은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강해솔은 질린 얼굴로 선우이경을 바라보다 예찬을 향해 몸을 틀었다.
“뭐 해.”
“네?”
해솔이 예찬이 들고 있는 마커 펜을 낚아채 화이트보드 트레이에 내려놓았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예찬을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흘겨본 강해솔이 덧붙여 말했다.
“너도 가야 할 거 아니야.”
……갑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