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105화 (106/224)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105화

?

?

‘누구예요?’

욕실에서 나온 정의탁이 입 모양만 움직여 예찬에게 물었다.

‘있어, 진상.’

예찬도 마찬가지로 입을 움직여 대답했다.

수화기 너머의 PiPiPi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어떻게 자기보다 더 중요한 약속이 있을 수 있냐며, 곡의 가치도 알아보지 못하는 애송이라며 쏘아 대고 있었다.

예찬은 적당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내일 동선을 생각했다.

- 후회하게 될 겁니다!

삼류 악당 같은 대사를 끝으로 PiPiPi는 전화를 뚝 끊어 버렸다.

웅얼거리던 소음이 끊기자 정의탁이 다가왔다.

“끊었어요?”

“어.”

“누군지 물어봐도 돼요?”

“작곡가 PiPiPi.”

“아.”

정의탁의 얼굴에 알 만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정의탁을 뮤즈니 뭐니 떠들었던 PiPiPi가 알면 대성통곡을 할 만한 얼굴이었다.

‘자업자득이지 뭐.’

이번에 레굴루스가 계획하고 있는 데뷔 앨범은 미니로 인트로와 아웃트로를 포함해 대여섯 곡을 수록할 예정이었다.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 작곡가 PiPiPi라면 확실히 어느 정도 화제가 될 것이었다.

또 아직 곡이 들어갈 자리도 남아 있었다.

그렇지만 예찬은 PiPiPi를 끼워 줄 생각이 없었다.

‘재수 없단 말이야.’

자신만만하게 나오는 걸 보니 괜찮은 곡을 써 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재수 없음을 감내하고 작업할 만큼의 매력이 PiPiPi에겐 없었다.

‘그리고 이번엔 나랑 해솔이 형의 작곡으로 띄우는 게 나아. 괜히 피대기까지 끼워 줬다가 화제성이나 나눠 먹을 수도 있지.’

먼 훗날 아주 만약 PiPiPi와 작업하는 날이 온다면, 그건 갑을 관계가 명백해서 PiPiPi가 제발 자신을 써 달라고 삼고초려라도 한 후일 것이었다.

‘그보다 지금은 이쪽이지.’

PiPiPi에 대한 생각을 깨끗이 지운 예찬은 신 PD에게 받은 회신을 다시 확인했다.

?

- 내일 보죠. 내가 갈까요, 하예찬 씨가 올래요?

?

예찬은 결투장으로 상대의 홈그라운드를 선택했다.

“의탁아, 나 내일은 잠깐 들를 곳이 있어서 너 먼저 연습실에 가 있어.”

보디로션을 꼼꼼히도 바르고 있는 정의탁에게 말을 걸자 빠르게 대답이 돌아왔다.

“누구 만나는데요? 설마 PiPiPi 작곡가님?!”

PiPiPi라고 했다간 도시락을 싸 들고 말리든지, 자기도 가겠다고 쫓아올 기세였다.

예찬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설마.”

정의탁의 얼굴에 안심한 기색이 감돌았다.

“신 PD님 보러 가.”

“……누구요?”

“신 PD님.”

“츄마프 메인 PD인 신 PD님?”

“정확히는 전 메인 PD였던 신 PD님.”

예찬의 정확한 정정에 정의탁이 버럭 화를 냈다.

“아니, 그 인간을 또 왜 보러 가요!”

충분히 나올 만한 반응이었다.

어쨌든 지금 레굴루스의 입지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워진 것은 신 PD 때문이었으니까.

몇몇 기획사에 주제곡을 미리 유출하는 등 혜택을 주고, 중간에 들어온 수상한 표를 거르지 않아 순위 조작 꼬리표를 달게 한 것이 바로 신 PD 아니던가.

지난번 NJ 측에서 아무리 불러도 연락이 닿지 않던 것까지 더해 정의탁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모양이었다.

그러나 예찬은 레굴루스 멤버들이 여기까지 화제성을 모은 데에도 신 PD의 공이 있다고 생각했다.

‘일은 참 잘한단 말이지.’

일도 못하고 밉상인 놈이 널린 이 판에, 좀 밉상이지만 일은 잘하는 놈이 있으면 주워다 써야 하지 않겠는가.

?

* * *

?

다음 날, 꾸역꾸역 같이 가겠다는 정의탁을 떼어 놓은 예찬은 N-net 스튜디오 근처의 오피스텔로 도착했다.

딩동.

건물 출입구에 달려 있는 벨을 누르자 대답도 없이 문이 열렸다.

예찬은 망설임 없이 공동 현관을 지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8층에 내리자 현관문에 기댄 채 예찬을 기다리고 있는 신 PD가 바로 보였다.

“안녕하세요.”

예찬은 붙임성 있게 인사했다.

이마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인상을 확 구긴 신 PD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물론 신 PD의 심기가 불편하든 말든 상관없는 예찬은 태평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그 뒤를 따랐다.

실내로 들어오자 퀴퀴한 냄새와 여기저기 널린 쓰레기들이 거슬렸으나, 예찬은 내색하지 않고 신 PD를 불러 세웠다.

“PD님, 이거 받으세요. 빈손으로 오기 뭐 해서요.”

예찬이 당당하게 오피스텔 앞 편의점에서 대충 산 과일 음료가 든 500mL 페트병을 내밀었다. 어이없다는 듯 바라본 신 PD가 한숨을 내쉬며 병을 받았다.

“……이런 걸 사 올 거면 차라리 빈손이 낫다는 거 못 배웠어요?”

“네, 뭐. 츄마프 프로필에 적었다시피 어렸을 때 부모님이 돌아가셔서요.”

“…….”

순식간에 불꽃 패드립을 날려 버린 놈이 된 신 PD의 얼굴이 볼 만했다.

“음, 내가 모든 연습생의 프로필을 체크하는 건 아니라서요. 아니, 분명 예찬 연습생 거는 보긴 했는데…… 어, 그, 본의는 아니었습니다. 미안해요.”

구차하게 변명을 시도하던 신 PD가 깔끔하게 포기하고 사과했다.

‘기선 제압은 성공했군.’

예찬은 태연히 생각했다.

“아뇨. 그럴 수 있죠, 뭐. 너무 어릴 때 일이라 별로 신경 안 씁니다.”

예찬의 대답에 신 PD의 얼굴색이 좀 더 잿빛이 되었다.

예찬은 이 분위기를 그대로 몰아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저랑 일할 마음은 드셨나요?”

갑자기 치고 들어온 예찬을 어이없다는 눈으로 흘겨본 신 PD가 떡진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럴 리 없겠지만 흰 가루가 그 머리에서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예찬은 티 나지 않게 거리를 조금 벌렸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어이가 없어서 보자고 했습니다. 이 문자는 대체 뭡니까?”

신 PD는 신경질적으로 스마트폰을 예찬의 코앞까지 들이밀었다.

?

- 저 하예찬인데요. 답장이 없으시면 같이 일하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

예찬은 그 아래 이어진 메시지도 읽었다.

?

- 하예찬 연습생, 무슨 소리를 하는 거죠? 전화 받으세요.

- 이야기는 대면으로만 진행하겠습니다. 모레 NJ 담당자분을 통해 기자님들에게 신 PD님과 다시 일하게 되었다고 연락 돌리겠습니다.

?

보통이라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한다고 무시해 버릴 메시지였다.

그러나 예찬이 또라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신 PD라면 답을 할 거라 생각했다.

‘양심 없는 놈이지만, 그래도 사람이라면 나랑 레굴루스 멤버들에게 마음의 빚도 아주 미세하게나마 있겠고.’

“그런 식으로 문자 보내는 거 정말 예의…….”

한마디 쏘아붙이려던 신 PD가 좀 전의 본의 아닌 패드립이 떠올랐는지 멈칫했다.

“예의가 진짜 없는 건 PD님 아니신가요.”

물론 예찬은 망설이지 않았다.

똑바로 신 PD를 쏘아보며 예찬이 말했다.

“저희 데뷔 다큐 찍으셔야죠. 저흰 연기자가 아니라 재연하려고 했다간 티가 날 거라 연습 진도도 못 나가고 있다고요.”

신 PD가 또다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예찬을 바라보았다.

“지금 나보고 레굴루스 데뷔 다큐를 찍으라고요?”

“그럼 누가 찍어요.”

“허.”

헛웃음을 지은 신 PD는 소파 위에 널린 쓰레기를 대충 치우고 그 위에 앉았다.

“하예찬 연습생, 기사 난 거 다 봤을 거 아닙니까. 내 PD 인생은 이제 끝났어요. 난 쓰레기라고요.”

신 PD는 비련의 주인공이라도 된 양 고개를 푹 숙였다.

예찬은 띠껍게 팔짱을 끼고 그런 신 PD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저기요, PD님. 만약 기사들이 안 나왔다면 PD님이 지금 이렇게 자책하고 있으실까요, 아니면 다음 기획안을 들고 룰루랄라 웃고 계실까요?”

예찬의 말에 신 PD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예찬은 후, 한숨을 쉬고 이어 말했다.

“쓰레기 짓은 츄마프 방송 중에 하셨는데 그 당시엔 목에 힘 빡 주고 잘만 다니셨잖아요. 세상 사람들이 알게 되니 이제야 창피하고 괴로우세요?”

‘아, 바닥 너무 더러운데. 집에 가서 갈아입고 연습실 갈 시간이 되나?’

찝찝함을 무릅쓴 예찬은 소파에 앉아 있는 신 PD 앞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전 PD님의 잘못은 츄유프 안무 영상을 센트럴 기획사에 넘긴 것도, 범세혁한테 들어온 수상한 표를 내버려 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예찬의 흉흉한 눈과 마주친 신 PD가 꿀꺽 침을 삼켰다.

“그걸로 얻는 것보다 잃은 게 많은 장사를 하신 게 문제죠.”

예찬은 센트럴의 두 연습생을 조작돌이라 명명하고 우습게 봤지만, 두 사람이 미리 안무를 알아 왔기에 비웃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하고도 받아먹질 못하는 게 웃긴 거지.’

그나마 그 둘은 턱걸이로나마 한두 번 츄마프에서 데뷔 멤버가 된 적이 있다 보니 기억에라도 남았다.

나머지 조작 소속사들은 어딘지 기억도 안 났다.

‘애초에 비겁한 짓을 했어도 그걸 품고 갈 만큼의 메리트가 있는 놈들이면 어떻게든 끌고 같이 데뷔했지.’

딱히 정의의 사자 노릇을 할 생각은 없는 예찬이기에 신 PD가 딱했다.

“소속사들에게 지원 좀 받아 보려고 영상을 넘기신 거잖아요? 근데 그걸로 얻은 지원보다 잃은 게 더 크면 그건 장사를 잘못한 거죠. 애초에 츄마프가 성공할 거란 믿음이 있었다면 그런 어설픈 수는 안 쓰셨겠죠. 자신을 믿지 못한 게 첫 번째 패인이세요.”

슬슬 다리가 저렸다.

끙, 소리를 내며 일어선 예찬은 두 번째 패인을 읊었다.

“다음으로 세혁이에게 들어온 조작이 의심되는 표를 내버려 둔 거. 이게 진짜 멍청했죠. 눈에 불을 켜고 초 단위로 프로그램을 뜯어 보는 팬들이 많은데 너무 무시했잖아요. 아마 제가 연속으로 1위를 차지하는 것보다 순위가 바뀌는 게 재미있을 거 같다고 판단하신 거 같은데, 그 작은 재미로 잃은 게 너무 크지 않나요?”

거기까지 말한 예찬이 혀를 찼다.

“연습생과 팬들의 간절함을 팔아서 재미를 보시는 거면서, 정당하게 얻은 숫자를 그렇게 바꾸면 어떡합니까.”

“그…… 미안했습니다.”

신 PD가 깊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예찬은 신 PD의 사과를 진심이라 믿었다.

‘물론 들키지 않았다면 진심으로 사과는커녕, 뻔뻔하게 배 째라고 굴었겠지만.’

만약 기사가 나지 않았다면 신 PD는 자신이 했던 선택들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다.

덕분에 시청률이 오르고 프로그램이 더 흥했다며 자화자찬이나 했겠지.

좀 전에 말했듯, 예찬의 생각에도 신 PD가 잘못한 것은 잘못을 대중에게 들켜 기껏 일군 것을 전부 잃게 된 것이었다.

물론 잘잘못과 별개로 자신의 순위를 떨어트린 신 PD는 예찬에겐 몹쓸 놈이었지만.

예찬은 차가운 눈으로 신 PD를 내려다 보며 따스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뭐 1등을 뺏겼던 게 좀 열 받긴 하는데, 무사히 데뷔도 했고 세상 사람들도 나랑 팬들의 억울함을 알아줬으니 PD님한테 따질 생각은 없어요.”

거기까지 말한 예찬은 잠깐 말을 끊었다.

잠시 침묵을 유지하고 있자 신 PD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기다렸다는 듯 예찬은 지금 이 사태의 가장 큰 피해자의 이름을 말했다.

“근데 세혁이는 아니죠.”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