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123화
“여긴 왜 왔어?”
“당연히 우리 아들 보러 왔지.”
범인을 추궁하는 것 같은 배새벽의 태도에도 이서후는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했다.
‘배해선 대표에겐 존댓말을 하더니, 아버지한테는 반말하는군.’
일단 경계하고는 있지만 어머니를 대할 때보다 한결 편해 보였다.
예찬은 피자를 한 입 더 베어 물며 부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엄마도 아셔? 아빠 여기 온 거.”
“너희 엄마가 모르는 게 어디 있겠니.”
더 수상하다는 눈빛으로 배새벽이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너무 날 세우면 아빠 섭섭하다? 아빠랑 윤 감독님이 얼마나 오래 알고 지냈는데. 알콩이 너랑 촬영한다고 하니 옛날 생각도 나서 온 거야.”
거기까지 말한 이서후가 멤버들을 돌아보았다.
“제가 연락도 없이 찾아와서 놀랐죠? 미안해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심상록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버지뻘 되는 연예계 대선배의 사과가 무척 불편한 모양이었다.
“알콩이 엄마가 한 말이 있으니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정말 레굴루스 여러분을 응원하고 있어요.”
진중한 눈빛으로 멤버들과 차례차례 눈을 마주친 이서후가 이내 사람 좋게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정말로 여러분을 아들처럼 생각할 테니, 당장은 아니더라도 절 편하게 대해 주면 좋겠어요.”
‘과연 저 표정이 진심일지, 연기일지…….’
예찬은 새 피자 조각을 집어 들며 생각했다.
워낙 연기력이 뛰어난 사람인데다 직접 말을 섞은 적은 처음이라 판단을 내리기엔 정보가 부족했다.
“이 배우님! 여기, 여기!”
멤버들이 이서후에게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뮤비 감독이 그를 열렬히 불렀다.
“그럼 맛있게들 들어요.”
이서후가 자리를 뜨자 정의탁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드라마 보는 것 같았어요…….”
정의탁은 실감이 안 난다며 그 아들의 팔을 붙잡고 흔들었다.
정말 놀랐는지 피자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였다.
배새벽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엄마에 이어 아빠까지 소란스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니, 새벽이 네가 사과할 일은 아니지!”
“맞아! 그리고 아버님은 이렇게 피자도 사 주셨잖아!”
정의탁이 깜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범세혁도 피자 조각을 들어 올리며 천진난만하게 동의했다.
‘사실 쟤들은 배해선 대표가 NJ에 왔을 때 없었지만.’
실제로 배해선 대표의 깽판을 목격했다고 해도 저렇게 대답할 놈들이긴 했다.
예찬이 순수한 어린 양들을 바라보고 있자 선우이경이 씩 웃으며 말했다.
“오히려 오늘은 감사해야 할 것 같은데? 감독님 눈에 총기가 깃들었어.”
온 얼굴에 웃음꽃이 핀 뮤비 감독을 보며 선우이경이 말했다.
선우이경의 말대로 이서후와 이야기할수록 감독의 얼굴색이 훤해졌다.
잠시 뮤비 감독과 이서후 쪽을 확인한 예찬은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시작했다.
오래전 일이지만 대상이 워낙 유명하다 보니 어렵지 않게 필요한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신인 배우 이서후, 뮤직비디오 데뷔!]
[윤 감독, ‘이서후 씨만큼 영감을 주는 배우는 없어.’]
‘신인 시절 이서후가 배우로 출연한 뮤직비디오를 윤 감독이 찍었군.’
그리고 그 뮤직비디오를 시작으로 감독의 승승장구가 시작되었다.
뮤직비디오를 찍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서후 또한 당대 최고의 라이징 스타가 되었다.
그 후로 러브 콜을 날리는 광고주가 줄을 섰으나, 전부 고사하고 오직 뮤비 감독이 찍는 뮤비에만 몇 번 더 출연했다고 한다.
이후로도 쭉 매년 명절이나 기념일에 선물을 보내곤 했다는 감독의 몇 년 전 인터뷰를 확인한 예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좋아할 만하군.’
자신의 찬란하던 시절을 떠올리게 해 주는 상대라는 것만으로 이미 호감인데, 과거에 자신의 체면까지 세워 줬다?
게다가 국민 배우가 된 후에도 깍듯하게 기념일을 챙긴다?
업고 다녀도 이상하지 않았다.
‘굉장히 자기 관리가 철저한 사람이군.’
이 정도로 오랜 시간 변함없이 이미지를 관리하다니, 역시 방심하면 안 될 상대였다.
“그럼 전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윤 감독님. 뮤직비디오 기대할게요.”
마지막까지 웃는 얼굴을 잃지 않은 이서후는 뮤비가 공개되는 날 바로 볼 거라며 덧붙였다.
“어어, 조심해서 들어가.”
이서후가 철두철미한 인물임을 알게 된 것과 별개로, 예찬은 그가 오늘 찾아온 것은 순전히 호의였다고 결론 내렸다.
아쉬운 기색으로 이서후를 배웅한 감독은 촬영을 재개한 이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 될 걸 알고 온 거 같지?’
그전까지 정말 성의 없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이젠 멤버들을 붙잡고 촬영 의도며 편집 방향까지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여기랑 아까 찍은 그 장면을 교차할 거란 말이야! 그다음 데굴루루가 단체로 나오는 거지! 어때요, 상상이 가나?”
“아, 네…….”
이번에 붙잡힌 것은 우휘겸이었다.
“끝이야? 더 할 말 없어요?”
“……저희 이름은 레굴루스입니다, 감독님.”
“응? 그래서 내가 그렇게 말했잖아?”
“…….”
우휘겸의 뒤에서 프리뷰를 함께 확인한 예찬은 이서후를 향해 속으로 짧은 감사 인사를 전했다.
‘확실히 영상의 질이 변했어.’
번쩍거리는 영감이 튀어 오르거나 갑자기 영상미가 흘러넘칠 정도로 극적인 변화는 아니었다.
냉정히 말해서 촬영 결과물은 여전히 그의 전성기보다 떨어졌다.
“자, 다시 한번 갑니다!”
그러나 뮤비 감독이 지금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붓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노쇠한 감독의 눈에 푸른 열정이 깃들었다.
예찬의 심장이 느리지만 강하게 뛰었다.
‘조금 샘이 나네.’
이서후가 결과물을 확인한다는 이유만으로 뮤비 감독은 이렇게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것도 꽤 즐거운 듯이.
감독에게 그런 절대적인 대상이 된다는 것에 호승심이 일었다.
분야와 나이가 좀 다를 뿐, 어쨌든 같은 연예계 소속 아닌가.
어느 쪽이 연예인으로서 더 빛나는지, 언젠가 승부를 가릴 기회가 있길 바랐다.
예찬이 멤버의 아버지를 경쟁 상대로 삼아 불타고 있는 사이, 개인 컷 촬영이 막힘없이 진행되었다.
“이서후 배우님이랑 전혀 안 닮았네. 배 대표랑도 별로 안 닮았고.”
배새벽의 프리뷰를 확인하던 뮤비 감독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확실히 두 사람 모두 빼어난 미형이었으나 인형처럼 생긴 배새벽과는 결이 좀 달랐다.
“……이마는 아빠랑 닮았다고들 하시던데요.”
잠시 고민하던 배새벽이 입을 열었다.
붙임성 좋은 아버지를 보고 나름대로 자신도 감독과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옆에 서 있던 심상록이 기특하단 얼굴로 눈을 빛냈다.
말수 적은 배새벽이 없는 사교성을 쥐어짜서 대화의 물꼬를 튼 모습이 무척 흐뭇한 모양이었다.
근래 자기가 배새벽을 키운 줄 아는 심상록이어서 놀랍지는 않았다.
‘배새벽이 캔 뚜껑만 따도 감동하던데.’
“이마?”
뮤비 감독이 흥미를 보이자 배새벽이 훌렁 앞머리를 넘겼다.
훤히 드러난 둥근 이마를 확인한 감독이 말했다.
“전혀 아닌데?”
“네?”
“누가 닮았대? 그 사람 눈썰미가 없네!”
못 볼 걸 봤다는 듯 혀까지 찬 뮤비 감독은 말을 이었다.
“배우님 이마는 좀 더 이렇게, 어? 이렇게 반듯하고 말이야!”
‘똑같던데.’
예찬은 미적지근하게 식은 눈으로 감독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이서후한테 두꺼운 콩깍지가 박혀 있는 듯했다.
“알콩 씨 이마가 못났다는 건 아닌데, 둘이 닮았다는 건 진짜 아니야. 그런 말 하는 사람이랑은 거리를 두어야 해. 눈썰미가 그렇게 없는 것도 죄라고.”
“아, 네…….”
배새벽도 비슷하게 느꼈는지 굳이 감독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 * *
“그럼 내일 다시 봅시다.”
“고생하셨습니다!”
첫날 예정되어 있던 분량을 모두 촬영하고 스튜디오를 나오자 이미 달이 하늘 꼭대기에 떠 있었다.
“오늘 괜찮으셨어요?”
“네? 아, 네네.”
“말 편하게 하시라니까요, 형.”
조수석에 앉은 심상록은 아직 긴장이 다 풀리지 않은 매니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나머지 멤버들은 대부분 차 시트에 앉자마자 곯아떨어진 상태였다.
‘오전부터 바빴으니 그럴 만하지.’
마음 같아선 예찬도 눈을 붙이고 싶었으나 먼저 할 일이 있었다.
예찬은 옆에 앉은 강해솔이 혹여 깰까 봐 조용히 가방을 뒤져 무선 이어폰을 찾았다.
오후에 올라온 리얼리티 1화 선공개 영상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뮤비 나오기 전에 레굴루스 채널도 개설해야 하는데.’
익숙한 손놀림으로 아이튜브의 N-net 채널을 찾아 들어간 예찬은 광고가 나오는 동안 생각했다.
아이튜브뿐만 아니라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정말 태산이었다.
그사이 광고가 끝나고 신 PD와 인터뷰 중인 멤버들이 화면에 나오기 시작했다.
[룸메이트! 누구든 좋아요!]
[전 의탁이 형이 제일 편해서 또 룸메하고 싶어요.]
[꼭까지는 아닌데, 굳이 한 명을 고르라면 해솔이 형이요.]
[휘겸이. 조용해서요.]
먼저 같은 방을 쓰고 싶은 멤버를 고르는 인터뷰가 훈훈하게 이어졌다.
그리고 곧바로 방을 같이 쓰고 싶지 않은 멤버를 말하는 인터뷰로 전환됐다.
[상록이는 제가 감당하기에 너무 깔끔해서요, 하하.]
[휘겸이 형은 너무 커서 같은 방 쓰면 답답할 거 같아요. 네? 아니, 저도 작은 키는 아니죠!]
[하예찬은 좀…… 잔소리 너무 심하지 않나요?]
[상록이 형이 자꾸 알콩이라 해서 부담스러워요.]
‘이게 뭐냐…….’
절망적일 만큼 엇갈리는 멤버들의 선택을 혼잡하게 보여 주고 있는 주제에 자막과 배경음은 더없이 밝고 희망찼다.
‘그래서 더 어이없어.’
요즘 신 PD의 상태를 생각하면 의도적으로 이 언밸런스함을 노린 것 같진 않았다.
‘해 오던 가락이 있다 보니 이렇게 된 거지.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기란 거네.’
뜻밖의 행운에 고단함이 날아갔다.
[과연 원하는 룸메이트와 함께할 멤버는?!]
마지막으로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몽글몽글한 자막과 함께 멤버들이 선택한 방을 보이지 않게 편집한 것을 보여 주며 선공개 영상이 끝이 났다.
예찬은 설레는 기분으로 팬들의 반응을 살폈다.
예상대로 딱 봐도 재밌어 보이는 떡밥에 팬들은 이 시간까지도 쉴 새 없이 떠들고 있었다.
[선공개에 나온 사랑과 증오의 작대기 정리]
사랑
예찬→해솔→휘겸→예찬←이경
새벽→의탁→세혁→전부 OK
미공개 : 상록, 은성
증오
해솔→예찬→이경→상록←새벽
의탁→휘겸
미공개 : 상록, 세혁, 은성, 휘겸
- 정리추
- ㅅㅂ 어째 이어지는 작대기가 하나도 없냐 ㅋㅋㅋㅋ
- 사랑도 좀 그런데 증오는 너무 심하지 않냐ㅋㅋㅋ
- 예찬이 해솔이한테 차이고 이경이 찼어ㅋㅋㅋㅠㅠ
- 전부 OK 뭔데 설렘;
- 애매하게 안 보여 준 거 개킹받네
└ 채은성 따돌리는 거 너무 티 나지 않음?ㅋ 분량 실화냐고
└ 아직 데뷔도 안 한 애들 가지고 분량 따돌림 이ㅈㄹ
└ 이런 식으로 입 막아서 X된 그룹 한둘이 아님 데뷔 전에 최대한 잡고 가야 한다
└ 애미들 ㅈㄴ 웃기네 그럼 9등 분량을 자르지 1등을 자르냐?
└ 그래 순위대로 가자 ㅋㅋㅋㅋㅋ 앞으로 무대 뮤비 예능 분량 전부 순위대로 잘라서 줘 공평하게 ^^ 니들 새끼는 뭐 분량 많이 뽑을 것 같지? 응 아냐ㅎㅎ
└ 채은성 팬 수준ㅋ
└ 이게 채은성 팬으로 보이면 지능 검사 다시 해야 할 듯
└ 팰 거면 범주작을 패던가 왜 은성이한테 ㅈㄹ임
어김없이 어그로가 꼬이긴 했으나 대체로 재미있다는 분위기였다.
그 밖에도 룸메이트가 어떻게 되었을지 추측하는 글이나 자신의 희망을 말하는 글들이 여기저기 쏟아지고 있었다.
다른 글들도 확인한 예찬은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 참지 못하고 옆자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가 무슨 잔소리를 했는데?’
억울한 마음에 절로 눈이 세모꼴이 되었다.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강해솔은 평화로운 얼굴로 잠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