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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141화 (142/224)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141화

합의되지 않은 질문을 던진 팬, 아니 여자는 당당하게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찬은 객석에서 범세혁이 잘 보이지 않도록 교묘하게 가리고 섰다.

“예찬아, 나 괜찮은데.”

마이크를 거치지 않은 범세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슬쩍 뒤를 돌아보자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얼굴이 보였다.

‘……인생 1회 차가 이렇게 대범해도 되냐?’

예찬이 범세혁을 살피는 사이 선우이경이 여자를 향해 말을 걸었다.

[오늘 쇼케이스는 사전에 협의한 질문으로 진행한다고 공지했던 것 같은데, 지금 하신 질문은 저희가 전달받은 적이 없네요.]

[대답을 회피하시는 건가요? 그렇게 나오면 뭔가 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거 아시죠?]

여자의 뾰족한 목소리엔 명백한 비아냥이 섞여 있었다.

그러나 선우이경은 뻔한 도발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지금 하신 질문에 대답을 하면 형평성에 어긋나서요.]

[하지만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건 제 질문 아닌가요?]

팬들은 살벌한 눈초리로 그녀를 쏘아보았으나 기자들은 동의한다는 듯 눈을 빛냈다.

지금쯤 SNS와 인터넷 기사들이 어떤 꼴이 되어 있을지 생각하니 속이 쓰렸다.

‘팬으로 위장해서 데뷔 쇼케이스에 재를 뿌리다니…….’

순간 여자의 위로 재수 없는 정찬양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레굴루스가 망하길 고사 지내는 게 정찬양뿐은 아니겠지만, 그런 놈 중 누구보다 이런 상황을 만들기 쉬운 놈이었으니까.

‘하, 내가 별의별 짓을 다 하긴 했어도 남의 팬은 안 건드렸는데, 리셋 창 아니랄까 봐 상도덕 없네.’

자고로 팬이라 함은 우리 팬이든 남의 팬이든 신성불가침지역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닌가.

여자의 배후를 정찬양으로 반쯤 확신한 예찬은 무대를 향하고 있는 카메라를 의식해 표정이 너무 험상궂어지지 않도록 했다.

‘마음 같아선 범세혁이 조작한 것도 아닌데 어쩌라고? 배 째든가! 하고 나가라고 하고 싶다.’

까놓고 말해서 2차 순발식에서 조작 표를 거르면 범세혁이 떨어졌으리라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물론 이렇게 진실한 속내를 털어놓으면 앞으로 연예계에 발붙이고 살긴 어렵겠지.

예찬은 한숨을 익숙하게 속으로 삼켰다.

규칙을 어긴 건 상대방인데, 무시하기는커녕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신중하게 골라서 대응해야만 했다.

예찬이 막 마이크를 들어 올리려던 순간이었다.

[비록 선우이경 씨가 말씀하신 것처럼 형평성에 어긋나지만, 이번 질문에 대해선 예외를 두어야 할 것 같네요.]

무대 위로 예상치 못한 인물이 올라왔다.

[안녕하십니까. 츄즈 마이 프린스 99의 PD를 맡았었고, 지금은 레굴루스의 데뷔 리얼리티 PD를 맡고 있는 신준일이라고 합니다.]

평소와 다르게 강단 있는 목소리가 쇼케이스 장에 퍼졌다.

꼿꼿하게 편 신 PD의 등이 멤버들의 앞을 막아섰다.

뜬금없는 슈퍼스타의 등장에 기자들의 카메라가 미친 듯이 플래시를 터트렸다.

신 PD는 곧장 허리를 숙였다.

[우선, 최근 여러 가지 논란으로 물의를 일으킨 점 사과드립니다.]

또다시 카메라 셔터음과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두서없이 쏟아졌다.

깊게 숙였던 허리를 편 신 PD가 말을 이었다.

[먼저 저를 포함한 츄즈 마이 프린스 99 제작진 일동은 지금 제기되고 있는 문제에 대해 파악하고 있으며,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답변을 드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그 말씀은 조작을 인정하신다는 뜻인가요?”

특종감에 가슴이 설렜는지 기자 하나가 마이크 없이도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물었다.

신 PD는 대답하기에 앞서 레굴루스 멤버들과 MC를 돌아보며 양해를 구했다.

단단히 각오를 다지고 나온 듯 눈빛이 결연하기 그지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된 만큼 어느 정도 말씀을 드리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괜찮을까요?]

[어, 네. 물론 괜찮죠.]

어쩔 줄 모르던 MC가 고개를 끄덕이며 멤버들의 눈치를 살폈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눈을 하고 헛소리를 하진 않겠지.’

이런 중요한 일을 남의 손에 맡기는 것은 영 달갑지 않았으나, 예찬과 멤버들이 나서기엔 그림이 안 좋긴 했다.

무사히 동의를 구한 신 PD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2차 왕위 계승식, 그러니까 2차 순위 발표식에서 범세혁 씨의 표가 공개 집계 기간 후 비정상적인 수치로 오른 것은 사실입니다. 투표 상황을 모니터링하던 스태프가 부정 투표를 의심하고 보고했으나, 표가 들어온 장소와 IP에서 부정 투표라는 증거를 찾아낼 수 없었기에 정상적인 표로 처리했습니다.]

잠시 숨을 고른 신 PD가 말을 계속했다.

[많은 연습생의 꿈의 무게를 지고 있는 프로그램이니만큼 좀 더 신중히 검증해야 했는데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츄마프에 참여했던 연습생들과 프로그램을 응원해 주신 국민 여러분, 그리고 누구보다 범세혁 씨와 하예찬 씨에게 사죄드립니다.]

예찬과 범세혁의 방향으로 몸을 돌린 신 PD가 전보다 더 깊게 고개를 숙였다.

예찬과 범세혁도 엉겁결에 PD를 향해 마주 인사를 했다.

‘범세혁은 그렇다 치고. 나도?’

[정확히 얼마만큼의 표가 어떤 경로로 부정하게 들어왔는지는 현재 검토 중이며, 정확한 결과가 나오는 대로 국민 여러분께 투명하게 공유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또 지금까지 조사한 결과 순위가 바뀐다면 오로지 1, 2위뿐이고, 그 외엔 없음을 정확히 말씀드립니다.]

범세혁의 순위가 2위 아래로 떨어질 일은 없으니 부정 합격이란 염불은 그만 외우라는 뜻이다.

더불어 원래 1위였던 예찬에게도 겸사겸사 사과한 모양이었다.

분명 갑작스러운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무대에 난입한 것일 텐데, PD는 벼르고 있던 사람처럼 끊이지 않고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송구한 것은 제 불찰로 인해 피해를 본 범세혁 씨가 비난을 받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번 일은 모두 메인 PD였던 잘못이며, 스태프들이나 연습생들은 그저 피해자임을 아무쪼록 상기해 주시길 바랍니다.]

신 PD는 진심으로 범세혁을 지저분한 소문에서 꺼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예찬은 잠시 기억 속 신 PD를 떠올렸다.

직접 얼굴을 마주한 적은 없었지만, 연예계라는 공통분모가 있기에 소문은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츄마프로 성공한 이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재수 없게 떵떵거린다든지. 갑질 PD의 대명사라든지, 연예인을 사람이 아니라 상품으로 본다든지.

사람은 변할 수 있는가?

그 질문에 대해 예찬은 언제나 Yes라고 대답해 왔다.

멀리 가지 않아도 예찬이나 리스피릿 멤버들이 좋은 예가 되어 주지 않는가.

그렇다면 사람은 좋은 방향으로 변할 수 있는가?

“…….”

몇 번이고 실패해 온 예찬은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신 PD의 단단한 등을 바라보았다.

[다음으로 특정 소속사에 대한 특혜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단계에서 출연진 섭외에 도움을 받는 대가로 츄마프의 타이틀곡인 ‘Choose your prince’와 1차 경연곡 목록을 제공했습니다. 이 또한 메인 PD인 제 불찰이고 제가 책임져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외엔 표 조작이나 등급 조작, 같은 조 멤버 조작 등의 특혜는 일절 없었음을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레굴루스 멤버들이 속해 있던 소속사 중엔 제가 곡을 제공한 소속사가 없었음도 말씀드리겠습니다.]

‘……너무 시원하게 까는데?’

법정까지 가서도 제 잘못이 아니라고 빽빽 우겨 대던 사람과 동일 인물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렇게 지은 죄가 크신데 책임은 어떻게 질 생각이시죠?]

격양된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귀에 꽂혔다.

‘아, 마이크 아직도 수거 안 했었나.’

시선을 돌리자 이 상황을 만들어 낸 당사자가 객석에서 일어나 눈을 치켜뜨고 있었다.

신 PD는 당황한 기색 없이 대답했다.

[제가 받을 징계 또한 정확한 자료 분석과 함께 올릴 예정이었으나, 지금 말씀드리는 게 맞을 것 같네요. 원래대로라면 정직 처분을 받는 게 맞다고 생각하나 레굴루스의 리얼리티를 맡게 된 이상 책임을 져야 하기에 12개월 감봉 처분을 받게 되었습니다.]

‘감봉 12개월이면 승진은 물 건너간 거 아니야?’

리셋 이전보다 훨씬 강한 징계였다.

예찬이 어찌 된 일인지 깊게 생각해 보기도 전에 신 PD의 발언이 이어졌다.

[다만 법적으로 감봉 금액이 정해져 있고, 정직 시에는 무급임을 고려해 앞으로 1년간 제가 받은 모든 급여는 츄마프 이름으로 기부하려고 합니다.]

“무급? 미친 거 아니야?”

조용해진 주위 속, 무대 가까이에 앉은 팬이 혼잣말하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예찬도 동의하는 바였다.

‘신 PD, 오피스텔 월세 낼 돈은 있는 건가?’

지저분하긴 했지만 위치와 크기를 보면 값이 만만치 않을 텐데.

지금 이 상황이 현실감 없어서인지 시답잖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물론 돈으로 제 잘못을 전부 없던 일로 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지난 한 달여간 레굴루스 멤버들의 데뷔 준비를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이 멤버들이 얼마나 아이돌이란 직업에 진지하게 임하는지 느꼈습니다. 동시에 츄마프 연습생들이 프로그램에 걸었을 꿈의 무게를 실감했습니다.]

신 PD는 데뷔 쇼케이스라고 평소와 달리 제법 깔끔하게 단장한 상태였다.

꾸며 놓으니 볼 만한 얼굴에 그늘이 지자 화면에 그럴듯하게 잡혔다.

씁쓸하게 내리깔았던 눈을 다시 정면으로 향한 신 PD가 쐐기를 박듯 말했다.

[앞으로 전과 같은 과오를 반복하는 일 없이, 진정성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 것을 약속드립니다. 부디 넓은 아량을 베풀어 한 번만 더 제게 기회를 주시길 바랍니다.]

신 PD가 마지막으로 허리를 깊게 숙였다.

장내가 숙연해졌다.

예찬은 이 상황을 세 글자로 정리했다.

‘끝났군.’

돈에 살고 돈에 죽는다고 해도 좋을 이 대한민국에서, 자발적 무급으로 1년 동안 일하며 반성하겠다는데 더 욕하기 뻘쭘하지 않겠는가.

제작진에게 무언가 전달받은 MC 앤드류가 목을 가다듬고 진행을 이어 갔다.

[어, 지금까지 신준일 PD님의 질의응답이었습니다. 시간이 많이 지체된 관계로 나머지 질문은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반발은 나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상황에서 누가 ‘내 질문도 받아 준다며!’하고 따지겠는가.

[그러면 잠시 PV를 보고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함께 감상해 주시죠.]

전광판에 준비해 둔 영상이 나오기 시작하자 멤버들은 스태프들의 손짓에 따라 급하게 무대 아래로 내려갔다.

“와, 이게 무슨 난리래. 세혁아, 욕봤다.”

“아니요, 저보단 PD님이 고생하셨죠.”

범세혁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대답했다.

예찬은 말없이 옷을 갈아입는 데 집중했다.

“저 진짜 식은땀 났어요.”

“아까 그 사람 끝까지 있으려나?”

“제발 갔으면 좋겠다…….”

부산스럽게 다음 무대를 위한 준비를 하면서도 멤버들은 좀 전에 맞닥뜨린 충격적인 사건에 대해 떠드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멤버들뿐만 아니라 스태프들도 어쩌다 직관한 흥미진진한 사건에 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다들 놀라셨죠?”

얼렁뚱땅 준비를 마친 멤버들의 곁으로 오늘의 주인공 신 PD가 다가왔다.

“PD님!”

멤버들의 열렬한 환대가 쑥스러운지 신 PD는 괜히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괜히 제가 나서서 분위기가 산만해진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여러분이라면 분명 남은 무대도 평소처럼 훌륭하게 해낼 거라고 믿습니다. 무대 아래서 응원하고 있겠습니다. 레굴루스, 파이팅!”

‘하여간 말은 청산유…….’

“네!”

예찬이 냉소적인 생각을 채 끝내기도 전에 옆에서 우렁찬 대답이 튀어나왔다.

대답한 놈뿐만 아니라 다들 심지에 불이 붙었는지 눈이 불타고 있었다.

‘……뭐, 좀 어울려 줘야겠네.’

시큰둥한 생각과 달리 예찬의 눈도 멤버들 못지않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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