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145화
먹음직스러운 스테이크를 메인으로 한 도시락 세트 샘플을 손수 든 도지윤 팀장이 나타난 것은 수록곡 ‘Day & Day’의 사전 녹화가 끝나 갈 무렵이었다.
“나머지는 팬 미팅 장소로 보내 두었습니다.”
예찬은 도 팀장에게 도시락과 가볍게 포장된 장미꽃 한 송이를 건네받았다.
‘꽃까지 챙겨 왔네. 밑에 묶은 리본 색도 레굴루스 색이랑 맞췄고.’
밤하늘을 닮은 짙은 푸른색 리본과 함께 묶인 얇은 황금색 리본이 도지윤 팀장의 성격을 보여 주는 듯했다.
“와, 새벽에 어떻게 이걸 구하셨어요?”
사전 녹화가 끝나고 미니 팬 미팅 때 나눠 줄 도시락을 준비했다는 소식은 알고 있었으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퀄리티에 멤버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도시락 뚜껑의 로고를 확인한 선우이경이 물었다.
“엔조이 스테이크? 여기 NJ였죠?”
“맞습니다. Njoy-steak의 도시락이죠. 오픈 시간이 한참 남긴 했는데 그쪽에 아는 분이 계셔서 조금 도움을 받았습니다.”
도지윤 팀장의 말처럼 Njoy-steak는 얼마 전 NJ가 야심 차게 론칭한 패밀리 레스토랑의 이름이었다.
“짧은 시간에 준비하시기 힘드셨을 텐데, 감사합니다.”
팬들이 정말 좋아할 거 같다며 심상록이 대표로 감사 인사를 건넸다.
도 팀장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직영점이 서울에 꽤 있어서요. 양을 나눠서 준비해 주셨죠.”
‘아직 레스토랑 직원들이 출근도 안 했을 시간일 텐데. 역시 인맥과 돈이 있으면 불가능은 없군.’
생각보다 더 훌륭한 도시락의 모양새에 예찬이 조용히 만족하는 사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도시락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범세혁이 더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이거 좀만 먹으면 안 돼요?”
“앗! 저, 저도……!”
채은성도 재빨리 범세혁의 옆에 붙어서 애절한 눈으로 도지윤 팀장을 바라보았다.
‘그럴 만한가.’
사전 녹화를 시작하기 한참 전, 샵에서 대충 김밥을 입에 욱여넣는 것으로 식사를 때웠으니 배가 고플 만했다.
두 사람처럼 직접 말은 하지 않았으나 다른 멤버들의 눈에도 간절함이 엿보였다.
도지윤 팀장의 차가운 얼굴이 순간 허물어졌다.
도 팀장은 괜히 안경을 만지는 척하며 표정을 숨겼다.
“크흠, 팬 미팅 장소에 여러분 것도 함께 준비되어 있습니다.”
“팀장님 진짜 최고!”
“사랑해요!”
“사…… 사랑…….”
애정을 말로 표현하는 데 망설임이 없는 멤버들 사이에 낀 도지윤 팀장은 어색하게 굳었다.
머쓱해진 도지윤 팀장이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얼른 정리하고 팬 미팅하러 갑시다.”
“네!”
힘찬 대답과 함께 레굴루스의 첫 사전 녹화가 마무리되었다.
* * *
“애들이다!”
‘왔다!’
뒤쪽에 서 있던 팬들의 외침에 카메라를 잡은 홈마 박모 씨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무대 의상을 그대로 입은 멤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둘, 셋.]
[빛나는 당신의 별! 안녕하세요, 레굴루스입니다.]
팬들의 호응이 잦아들기를 잠시 기다리던 멤버들이 예찬의 선창을 신호로 인사를 했다.
[우리 이클립틱, 이렇게 바로 다시 만나서 너무 좋네요.]
“우리도 좋아!”
예찬의 말에 한 팬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예찬은 잠시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을 더 커다랗게 뜨더니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박모 씨는 침착하게 셔터를 눌렀다.
‘하예찬 미모 실화냐…… 눈물이 난다…… 이게 대한민국의 미래고 복지다…… 문화재청은 뭐 하냐고 당장 국보로 지정 안 하고……!’
물론 속마음은 전혀 침착하지 않았다.
그러나 방방 뛰다가 지금 아침 햇살 아래 눈부신 예찬의 모습을 놓쳤다가는 환갑잔치 때까지 두고두고 생각이 날 것 같았다.
[다들 너무 배고프지 않아요? 우리 우선 밥 좀 먹으면서 이야기합시다.]
예찬이 장난스럽게 납작한 배를 문지르며 말했다.
대기하고 있던 스태프들이 앞쪽에 놓여 있던 보온 가방 안에서 도시락을 꺼냈다.
은은하게 풍기던 고기 냄새가 팬들 쪽으로 강하게 훅 불어닥쳤다.
‘와, 냄새 진짜…… 헉!’
그렇지 않아도 굶주린 배가 요동치는 가운데, 스태프들에게 도시락과 꽃을 건네받은 멤버들이 팬들을 향해 다가왔다.
힘이 풀린 박모 씨가 들고 있던 카메라를 스르르 내렸다.
타이밍 좋게 반보 앞까지 다가온 예찬이 상냥하게 웃으며 도시락과 장미꽃을 건넸다.
“오늘 와 줘서 고마워요. 맛있게 먹어요.”
입을 열었다간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기에 박모 씨는 도시락을 꽉 붙잡고 고개만 미친 듯이 끄덕였다.
예찬은 그런 그녀에게 진한 눈웃음을 남기고 품 안 가득 도시락을 안은 채 멀어졌다.
그제야 박모 씨는 예찬의 손이 닿은 성스러운 도시락의 자태를 제대로 살필 수 있었다.
‘이게 먹을 게 아니었으면 가보로 물려주는…… 돈 좀 썼는데?’
사회의 때가 탄 박모 씨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었다.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테이크를 메인으로 한 도시락은 잘 구운 아스파라거스와 가지, 방울토마토와 통마늘을 가니쉬로 했다.
그 옆으로 게살 볶음밥과 연어 샐러드, 웨지 감자와 먹기 편하게 잘라 둔 식전 빵, 마지막으로 황도 복숭아 한 조각이 들어 있었다.
‘센스 미쳤고.’
보기에도 좋은 데다 먹기까지 좋아 보이는 센스 있는 구성에 절로 침이 넘어갔다.
멤버들의 뒤를 따라 움직이는 스태프가 도시락을 받은 팬들에게 생수병을 하나씩 건네주었다.
‘돈 없는 소속사, 돈 많지만 안 쓰는 소속사, 돈 이상하게 쓰는 소속사를 다 겪어 봤는데, NJ, 제법 괜찮네.’
속단하긴 이르지만 돈 많은데 제대로 쓸 줄 아는 놈들 같았다.
여기저기서 도시락을 받은 팬들이 인증 사진을 찍느라 스마트폰 셔터음 소리가 바쁘게 울렸다.
팬들에게 도시락을 전부 돌린 멤버들이 다시 앞으로 이동했다.
[우리 복숭아들! 맛있게 먹어요!]
[저희도 맛있게 먹을게요!]
“네!”
팬들과 똑같은 도시락을 든 정의탁과 범세혁의 외침에 팬들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레굴루스도 이클립틱도 굶주릴 대로 굶주렸기에 무슨 말이라도 하려면 일단 배부터 채워야만 할 것 같았다.
박모 씨는 빠르게 도시락을 비우고 다시 카메라를 들었다.
‘밥 먹는 예찬이, 귀하다!’
멤버들과 팬들이 도시락 통을 깨끗하게 비우고 나서야 본격적인 미니 팬 미팅이 시작되었다.
멤버들은 앨범을 준비하면서 있었던 소소한 일들을 팬들에게 이야기를 풀어놓기도 하고, 이번 앨범이 어떤지 팬들의 솔직한 감상을 묻기도 했다.
물론 팬들은 무조건 ‘좋아요’를 연발했다.
이윽고 예찬이 안타까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 이제 슬슬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에요.]
‘뭐? 벌써?!’
빠르게 끝나 버린 좋은 시간에 박모 씨를 포함한 팬들이 수긍하지 못했다.
“우우우우.”
“싫어요!”
멤버들이 우는 소리를 내는 팬들을 달래기 시작했다.
[저희도 너무 아쉽지만 어쩔 수가 없네요. 그래도 헤어짐이 있어야 다시 만나지 않겠어요?]
선우이경이 애교를 담아 고개를 귀엽게 기울이며 말했다.
“아니야! 싫어! 가지 마!”
“계속 같이 있자!”
물론 팬들은 이번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아쉬움이 가득 담긴 팬들의 목소리에 멤버들이 곤란한 듯 시선을 주고받았다.
박모 씨의 손가락이 또다시 바빠졌다.
‘난감해하는 예찬이, 귀하다!’
비슷한 생각을 하는 팬들이 많은지 셔터 소리가 빨라졌다.
이번에 입을 연 것은 평소 말수가 적은 배새벽이었다.
[음…… 지금 바이바이 해야지 본무대에서도 보고, 또 새로운 무대에서 만날 수 있잖아요. 저희 진짜 준비 많이 했거든요. 다 보여 드리고 싶어요.]
“억, 바이바이……!”
박모 씨의 옆에서 열심히 셔터를 누르던 팬이 예고도 없이 훅 들어온 배새벽의 말에 입을 틀어막았다.
귀여운 얼굴과 다르게 다소 무뚝뚝한 막내의 예상치 못한 막내다운 단어 선정에 앓는 팬들이 여기저기 속출했다.
정작 배새벽은 팬들이 왜 이렇게 흥분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 뭐 잘못 말했어요?]
“아니!”
“완전 잘했어!”
[……뭘요?]
여전히 영문을 알지 못하는 배새벽의 활약 덕에 레굴루스의 첫 미니 팬 미팅은 훈훈하게 정리되었다.
* * *
미니 팬 미팅을 끝내고 대기실로 이동한 멤버들은 옷을 갈아입고 저마다 편한 자리를 찾아 드러누웠다.
“하, 배부르니까 살 것 같다.”
“뭔가 오래간만에 식사다운 식사를 한 기분이었어.”
“하…… 고기만 먹고 빵이랑 감자는 남길걸…….”
거울 앞에 선 정의탁은 그새 부은 것 같다며 얼굴을 요리조리 돌려보고 있었다.
“팬들이 사진 찍고 있는 거 아는데도 젓가락을 못 멈추겠더라.”
“인정. 꼭 분위기 있게 먹을 거라고 맘먹었는데 오늘 찍힌 사진 보면 가관일 듯.”
범세혁과 채은성이 나란히 소파에 널브러진 상태로 떠들었다.
예찬이 헛웃음을 지었다.
“분위기 있게 먹는 건 뭔데? 어떻게 하는 거야?”
“하, 얘가 또 사람 일어서게 만드네.”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난 채은성이 젓가락을 잡는 시늉을 시작으로 도시락 먹는 마임을 선보였다.
채은성은 먼저 사연이 한 백댓 가지는 있어 보이는 우수에 찬 눈빛을 장착했다.
“풉!”
멤버들의 웃음소리도 채은성을 굴하게 만들 수 없었다.
채은성은 도시락을 살펴보는 흉내를 내더니 투명 반찬을 집어 투명 젓가락으로 입에 넣으며 눈을 살포시 감기까지 했다.
도시락을 먹고 있다는 설정을 잊지 않고 입은 우아하게 우물거리고 있는 상태였다.
멤버들은 더 이상 참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시원하게 웃었다.
“으하하! 그게 뭐야!”
“와, 제대로 웃었다. 은성이 덕분에 소화했네.”
채은성은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소파에 늘어졌다.
동갑내기 멤버의 재롱 잔치를 본 예찬은 못 말리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 인사하러 다니려면 좀 남았죠? 잠깐 눈을 붙이는 게 나으려나…… 지금 자면 부을까요?”
“눈이 새빨간 것보단 얼굴이 좀 부은 게 낫지 않을까?”
“세혁이 형은 그게 위로가 된다고 생각해요?”
사전 녹화와 미니 팬 미팅을 무사히 끝내서인지 멤버들의 목소리가 녹화 전보다 한결 편안해 보였다.
자기들끼리 투닥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예찬은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이쯤 되면 사녹 후기가 올라왔을 텐데.’
아니나 다를까 SNS를 가볍게 훑었을 뿐인데 레굴루스의 첫 사녹 이야기와 역조공 이야기가 끝도 없이 보였다.
신인 아이돌 그룹의 역대급 역조공이라며 벌써 기사도 뜬 모양이었다.
빠르게 링크를 클릭해 기사를 확인했다.
‘도지윤 팀장 작품인가.’
도시락과 함께 미리 준비한 것처럼 보이는 기사는 레굴루스에게 온통 호의적인 내용으로 가득했다.
예찬은 일단 기자의 이름을 외워 두었다.
‘사람을 쉽게 속단하면 안 되지만, 도지윤 팀장…… 보면 볼수록 일을 할 줄 아는 사람이야.’
알아서 척척척 스스로 일하는 어른의 표본 같은 도 팀장을 생각하자 부른 배만큼 가슴이 든든해졌다.
예찬은 미니 팬 미팅까지 지켜본 후 다시 회사로 복귀하기 전 도지윤 팀장이 남긴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 앞으로 담당 직원을 뽑기 전까지 역조공은 한 번 더 점검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과장을 조금 보태서 근래 들었던 말 중 가장 설레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