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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176화 (177/224)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176화

‘이젠 또 괜찮아 보이는군.’

징징거리니까 멀쩡해 보인다니 어떤 의미론 대단한 놈이었다.

예찬은 고갯짓으로 출구를 가리켰다.

“혼자 동동 떠다니지 말고 그만 돌아가자.”

“동동 떠다니긴 무슨…….”

채은성은 시답잖은 소리를 들었다는 듯 코웃음을 쳤지만, 입과 달리 몸은 솔직했다.

출구를 향해 돌아간 몸뚱이가 채은성이 얼마나 신이 났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예찬은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러면 저희는 이만 들어가 볼게요.”

예찬의 인사에 스튜디오 내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벌써여? 아직 예찬이 형 사인도 못 받았는데!”

“요 녀석 봐라? 콕 집어서 예찬이 사인에만 관심 있단 티를 내네?”

“우리도 사인할 줄 아는데!”

“헤헤헤. 물론 다른 형들, 동생들 사인도 주시면 그저 감사히 받겠습니다!”

멤버들의 타박 아닌 타박에 기태랑은 뒤통수를 긁으며 넉살 좋게 웃었다.

예찬은 잠시 차 안에 사인 CD가 남아 있는지, 또 음방까지 시간은 얼마나 되는지를 가늠해 보고 입을 열었다.

“메시지로 주소 남겨 주면 그쪽으로 CD 보낼게. 오늘 깜빡하고 안 가져왔네.”

“지, 진짜여?!”

한번 찔러나 보자는 심산이었는지, 예찬의 대답에 기태랑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오, 태랑이 잘됐네. 완전 성공한 덕후야.”

“크읍, 살아 있어서 다행이에여! 다들 진짜 감사해여!”

남지유가 헤드록을 걸고 흔들자, 기태랑은 힘겨운 와중에도 감사 인사를 멈추지 않았다.

두 사람의 훈훈한 모습에 미소를 지은 레굴루스 멤버들은 비타 측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하고 빠르게 스튜디오를 빠져나갔다.

“추억 얘기가 진짜 타임머신이긴 하구나. 시간이 이렇게 많이 지났을 줄 몰랐어.”

“녹화도 진짜 순식간에 끝난 거 같지 않아요?”

주차장을 향해 빠르게 발을 놀리며 멤버들이 놀라움을 표했다.

차에 타서 점호를 마치고 나서도 멤버들의 입은 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른 츄마프 참가자들은 뭐 하고 지낼까?”

“상록이 형, 연락하는 사람 없어요? 되게 의외네요.”

“의탁이 너도 없어?”

“네, 뭐…… 잠깐. 왜 아무도 의외라고 하지 않는 거죠?”

“예찬이가 진짜 아닌 척하면서 정이 많다니까. 그러니까 태랑이도 예찬이한테 연락했지.”

예찬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좀 없는 게 없는 편이죠.”

“어우! 재수 없어야 하는데 왜 재수가 있지?”

“전 얄미운데요? 우우! 하예찬 너무 얄밉다!”

예찬의 너스레에 멤버들이 야유를 보냈다.

다시 한번 어깨를 으쓱인 예찬은 멤버들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튀기를 잠시 기다렸다.

“그런데 지유 형이랑 태랑이 형이 이렇게 따로 팀을 짤 만큼 사이가 좋은 줄 몰랐어요.”

“아까 들어 보니까 콘셉트 무대 빼고는 다 같은 조였다던데?”

“와, 진짜요?”

“엄청난 우연인데요!”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대화 주제가 또 바뀌었다.

‘좋아, 이 틈에 조용히 채은성에게…….’

“사실 태랑이랑 지유보다 우리 예찬이랑 휘겸이 인연이 더 찐하지!”

막 채은성의 옆구리를 찔러 보려던 찰나, 다시금 활시위가 예찬에게 향했다.

“예찬이랑 휘겸이도 엄청 붙지 않았어?”

선우이경의 질문에 멤버들의 시선이 예찬과 우휘겸으로 반반 나뉘었다.

“네, 맞아요.”

어딘가 뿌듯해 보이는 얼굴로 우휘겸이 먼저 대답했다.

예찬도 보충하듯 말을 얹었다.

“마지막 빼고는 다 같은 조였죠.”

“와. 진짜 운명이다, 운명.”

“얘네는 지유네보다 더 심한 게, 첫 합숙 때도 룸메고 레크리에이션도 짝꿍이었어.”

‘……가만. 뭔가 알 것 같기도 한데.’

멤버들이 호들갑을 떠는 가운데 예찬의 머리가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나 우리 멤버들 중에 츄마프 때 같은 조 못 해 본 사람 되게 많아.”

“세혁이 너, 지유랑 태랑이랑도 같은 조 한 적 없지 않았어?”

범세혁의 말에 선우이경이 잠시 기억을 되짚다가 물었다.

“어, 맞아요!”

“그랬어요? 시작부터 되게 사이좋아 보여서 츄마프 때 엄청 친했을 줄 알았는데.”

“세혁이도 그렇고 지유랑 태랑이도 붙임성이 좋잖아. 나도 같은 조 해 본 적 없는데 애들이 되게 싹싹하더라.”

정의탁이 눈썹 한쪽을 들어 올리며 놀라워 하자 조수석에서 심상록이 끼어들었다.

뒤에서 듣고 있던 선우이경도 역시나 말을 더했다.

“맞아, 맞아. 오히려 같은 조였던 휘겸이나 해솔이가 어색해하던데?”

“왜 가만히 있는 저를…….”

“…….”

선우이경에게 갑작스럽게 소환당한 강해솔은 입술을 삐죽거렸고, 우휘겸은 민망한지 창밖을 바라보는 척을 했다.

‘……진짜 알 것 같은데?’

예찬은 다시 꾹 입을 닫은 채은성을 바라보았다.

예찬이 슬쩍 손가락을 세워 옆자리에 앉은 채은성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깜짝이야! 아까부터 왜 이래?”

파드득 어깨가 튀어 오른 채은성이 옆구리를 문질렀다.

‘그렇게 아프게 찌르진 않은 것 같은데…… 여기가 약점인가.’

혹시라도 예능에서 채은성을 웃겨야 하는 미션을 받으면 저 옆구리를 기억하겠다고 다짐하며 예찬은 본론을 꺼냈다.

“너, 아까 촬영 내내 이상했던 거 어색해서 그런 거야?”

“뭐? 무, 무, 무슨 소리지?”

채은성의 눈이 엄청난 속도로 깜빡거렸다.

“뭐라고? 우리 은성이가 아까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있던 게 낯가림 때문이라고?”

귀가 밝은 선우이경이 호들갑스럽게 끼어들었다.

말투와 표정을 보아하니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다른 멤버들도 어느새 이야기를 멈추고 채은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은성이 형이 낯가림이요? 에이, 말도 안 돼.”

“난 오늘따라 말이 너무 없어서 어디 아픈가 했는데.”

정의탁이 먼저 말도 안 된다며 손사래를 치자 말수가 적은 편인 강해솔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 뒤편엔 정말로 입이 무거운 우휘겸도 동의한다는 표정으로 멀뚱히 앉아 있었고.

“은성이도 되게 싹싹한 편이지 않나?”

“낯가림이란 단어랑 되게 안 어울리는데?”

멤버들의 관심이 쏠리자 얼굴이 점점 빨개진 채은성이 부들거리며 외쳤다.

“그래요, 나 낯 많이 가려요! 오늘도 너무 어색해서 말을 못 하겠었어요!”

멤버들은 여전히 아리송한 얼굴이었다.

“채은성이 낯가림?”

“그거야말로 어색한데.”

“그런 반응 때문에 말을 안 하려고 했다고요!”

한번 물꼬를 튼 채은성은 거침없이 속내를 털어놓았다.

“저 진짜 극도로 낯가림이 심한 사람인데, 그렇게 말해도 아무도 안 믿어 준단 말이에요! 다들 콘셉트 잘못 잡았다며 웃어!”

예찬을 포함한 멤버들은 잠시 각자 채은성과 처음 말을 텄을 때를 떠올렸다.

‘안 믿어질 만한데?’

“지금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죠?!”

채은성이 예리하게 지적했다.

선우이경이 유들유들하게 채은성의 말을 받았다.

“생각해 보니까 은성이 너, 우리랑 츄마프에서 같은 조 된 적이 거의 없지?”

옛이야기를 꺼내자 조금 진정한 채은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무대 말고는 한 번도 같은 조 안 됐어요. 근데 마지막 즈음엔 이미 다들 친해질 대로 친해져 있었고…….”

“아, 그러고 보니 그땐 좀 더 과묵한 인상이었던 것 같기도…….”

마지막 무대에서 채은성과 같은 조였던 심상록이 말꼬리를 흐렸다.

“그나마 같이 연습이라도 해 본 게 1차 합숙 때 A등급이었던 사람들인데, 다들 자꾸 등급이 바뀌어서 말 한 마디도 못 해 봤다고요…….”

채은성의 한탄에 이번엔 배새벽이 물었다.

“그런데 형, 우리랑 처음 NJ에서 만났을 땐 별로 낯가리는 것 같지 않았는데요.”

“저기 새벽아, 그 상황에 낯가림이 중요하겠니……?”

“아.”

NJ 회의실에선 배해선 대표가 한바탕 난리를 치고, 루벨 엔터 건물에 감금된 두 멤버도 구하러 가야 했던 다소 산만한 첫 만남을 떠올린 배새벽이 침묵했다.

“그리고 루벨에서 나올 때쯤엔 뭔가 묘한 유대감이 싹트더라고…….”

아련한 눈으로 채은성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때 채은성이 파티원으로 등록됐었지.’

예찬도 짜릿했던 추억을 회상했다.

“생각해 보니 그날도 배해선 대표님이 오시기 전까지 계속 화장실에 들락날락했던 거 같기도…….”

“왁! 그런 건 기억에서 지워요! 얼른!”

턱에 손을 짚고 고민하던 강해솔의 말에 채은성이 소리를 질렀다.

“아, 맞다. 나도 배탈 난 줄 알았었어. 낯가림이었다니 오해가 풀렸네!”

“으으,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지…….”

심상록도 아는 체를 하자 채은성이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런데 다른 촬영 때는 전혀 낯가린다는 생각을 못 했어.”

“은성이 형, 항상 스태프분들한테 말도 잘 붙이고 살갑지 않았어요?”

“좋은 지적이야.”

범세혁과 정의탁의 말에 채은성은 있지도 않은 안경을 치켜올리는 시늉을 했다.

어딘지 의기양양하게까지 보이는 채은성의 모습에선 직전까지 낑낑거리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그렇게 살갑게 행동하는 것조차 낯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낯선 사람들이 모여서 어색한 공기가 형성되는 게 참을 수 없어서 죽을힘을 다해 분위기를 푸는 거죠.”

“와, 굉장히 신기한 낯가림이다…….”

“그러나!”

잠시 말을 끊어서 모두의 집중력을 한껏 끌어올린 채은성은 차 안을 둘러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저를 뺀 나머지 사람들이 이미 친밀한 관계를 형성한 집단에 들어가게 되면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는 겁니다! 내가 뭘 안 해도 이미 화기애애하니까! 그냥 편하게 낯만 가리면 되는 거죠!”

“아, 오늘 편한 거였구나…….”

“휴, 이렇게 진솔한 마음을 전하고 나니 속이 다 시원하군요. 오늘은 낯가리느라 좀 프로답지 못했습니다. 앞으론 주의할게요.”

화끈하게 알아서 결론까지 낸 채은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말을 꺼낸 예찬을 비롯한 다른 멤버들도 서로 눈치를 살피다 그냥 고개를 끄덕이기로 했다.

‘뭐, 별로 문제 될 일은 아니니까 이거면 됐나.’

그러나 채은성과 관련된 문제는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튀어나왔다.

“예찬아, 건호 형한테 전화 오는데?”

“그래요?”

매니저인 김건호가 음악 가온이 끝난 뒤 멤버들을 숙소에 내려 주고 돌아간 게 조금 전 일이었다.

무슨 일인지 스마트폰이 그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띄운 채 맹렬히 울리고 있었다.

“네, 건호 형.”

[예, 예찬아! 커, 커뮤니티 좀 확인해야 할 것 같은데……! 어, 그러니까 인터넷 커뮤니티 중 아무 곳이나…….]

‘기사도 아니고 커뮤니티? 그것도 아무 곳이나?’

당황한 매니저의 목소리가 휴대전화를 뚫고 나와 다른 멤버들에게도 전해졌다.

예찬이 눈짓하기도 전에 선우이경의 손이 무언가를 검색하듯 분주해졌다.

“어이쿠, 이게 뭐야.”

원하던 결과물을 찾았는지 선우이경이 곤란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 그, 커뮤니티에 예찬이 너랑 은성이 얘기가 좀…….]

횡설수설하는 매니저의 설명을 기다리는 것보단 눈으로 보는 게 빠를 것 같았다.

예찬이 선우이경의 뒤로 성큼성큼 걸어가자, 눈치 빠른 선우이경이 스마트폰 화면을 보기 쉽도록 들어 올렸다.

다른 멤버들도 하나둘 고개를 들이밀었다.

[얘네 미친 거 아님?;]

자극적인 제목 아래엔 코피를 흘리는 예찬과, 잔뜩 찌푸린 얼굴로 그런 예찬을 내려다보는 채은성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아, 개운하다! 다음 누구 씻을 차례예요?”

마침 사진 속 당사자 중 하나가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 욕실에서 나왔다.

“……다들 왜 그렇게 쳐다봐요?”

조용히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들을 느낀 채은성이 양팔을 들어 헐벗은 상체를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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