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185화 (186/224)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185화

“하, 입맛 없는데…….”

“제 말이 그 말이에요. 안 먹어도 된다는데 굳이 이렇게 숟가락까지 주시고.”

“그렇게 말하는 거치곤 너희 둘 다 굉장히 잘 먹었어.”

강해솔의 지적에 예찬은 앞에 놓인 그릇을 내려다보았다.

‘언제 다 비웠지?’

곧 있으면 전국에 방영될 자신의 추태를 생각하느라 뭘 먹을 기분이 아니었는데, 그릇이 왜 이렇게 깨끗한지 모르겠다.

정의탁도 알 수 없단 얼굴을 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빈 그릇을 바라보고 있었다.

“집밥 해 먹으니까 좋은데?”

“정리하는 것도 일이지만요.”

어제 제작진이 남기고 간 재료로 흔쾌히 오늘 저녁 준비를 맡은 선우이경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4위의 여유인가…… 근데 아홉 중에 4등이면 중간 아니야?’

1, 2등 외엔 다 고만고만한 거 아니냐며 정신 승리를 끝낸 예찬은 그릇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뒷정리는 제가 할게요.”

“어, 저도 같이해요!”

넋을 놓고 있던 정의탁도 부지런히 빈 그릇을 챙겼다.

정의탁과 나란히 서서 설거지를 하고 있자, 물소리와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 사이로 찰칵, 하고 셔터음이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언제 돌아온 건지 신 PD가 흐뭇한 얼굴로 스마트폰을 들고 있었다.

“꼴찌들의 단란한 설거지 장면, 아주 좋습니다! 오늘 방송 끝나고 SNS에 업로드하면 딱 맞을 거 같지 않나요?”

조용히 다시 고개를 돌린 예찬은 저 싱글벙글한 얼굴에 고무장갑을 던지는 상상을 하며 설거지에 집중했다.

옆에서 묵묵히 거품 칠을 하는 정의탁도 수세미를 살벌하게 쥐었다 놓기를 반복하는 걸 보니 같은 마음인 것 같았다.

설거지를 마치고 거실로 나오자 멤버들과 신 PD가 소파와 바닥에 편하게 앉아 있었다.

‘언제 팝콘까지 준비해 뒀냐.’

팝콘 통 옆에 딱 붙어 앉아 있던 배새벽이 살며시 예찬의 눈치를 살폈다.

몇 분 전에 저녁 식사를 마쳤는데 저렇게 간절한 얼굴이라니.

실로 대단한 대한민국 고등학생의 위장이었다.

평소라면 칼로리 생각은 안 하냐며 당장 저 멀리 치웠겠지만, TV 옆에는 리액션 촬영용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슬쩍 인상을 쓴 예찬은 대충 빈자리에 몸을 구겨 넣었다.

“제 입으로 말하기 그렇지만 5화, 정말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반응이 장난 아닐 거라며 신 PD가 설레발을 치는 가운데, 드디어 데뷔 리얼리티 5화가 시작되었다.

다짜고짜 팔씨름으로 시작하면 표정 관리가 제대로 될지 고민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5화는 타이틀곡 녹음부터 시작했다.

*   *   *

[응, 괜찮다. 힘 좀 빼고 한 번 더 해 볼까?]

부드러운 제안에 녹음 부스에서 조마조마한 얼굴로 예찬의 눈치를 살피던 채은성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3화에 방영되었던 계정엽 작곡가와의 프로듀싱 현장보다 훨씬 훈훈한 분위기에 이를 지켜보는 시청자들의 얼굴에도 웃음이 떠올랐다.

- 멤버가 프로듀서라 그런지 애들 되게 편해 보인다!

- 하예찬 완벽주의라 예민할 거 같다고 생각했는데 완전 따수운데??

- 나는 알고 있었어 우리 예찬이 얼굴만 챠갑지 마음은 따뜻한 도시 남자라는걸...

- 애들 녹음 되게 힘들었다고 하지 않았음?? 계 씨랑 작업이 힘들었단 뜻이었나? 오늘 왤케 훈훈해

그러나 비슷한 장면이 계속 반복되자 하나둘 이상함을 느끼게 되었다.

[아니야, 진짜 괜찮았어. 다시 해 보면 완벽할 거 같아.]

[괜찮네. 그 부분은 그대로 하고 앞에 마디를 살짝 빠르게 해서 한 번 해 보자.]

[괜찮은데? 거기서 좀 더 시원하게 뻗는 느낌으로 불러 볼래?]

- 하예찬 아까부터 괜찮다고 말은 하는 데 계속 다시 시키네ㅋㅋ

- 은성이 녹음하는 거 보고 화장실 다녀왔는데 또 은성이가 녹음하고 있음ㄷㄷㄷ;;;

- 애들 샌드위치 먹는 거 왜 이렇게 처량해 보이냐ㅋㅋㅋㅋㅋㅠㅠ

- 어허 우민들아 명곡이 그리 쉽게 나오겠느냐? 멤버들을 저리 쥐어짰기에 우리가 지금의 온마유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니라!

- 애들 웃음 사라진 거 봐 이젠 칭찬받아도 울상이야ㅋㅋㅋㅋ

계속 반복된 타이틀곡 녹음은 이윽고 다음 날까지 이어졌다.

[이번 거 진짜 괜찮았어요.]

[응, 괜찮구나. 그래서 어떻게 다시 해 볼까?]

[아니, 아니. 그거 말고요. 지금 거 다시 들어 볼래요?]

예찬이 방금 녹음한 소절을 틀자 자연스럽게 ‘괜찮다’를 ‘다시’로 받아들이고 있던 심상록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본방송엔 아예 대조하기 쉽도록 어제 녹음했던 파트와 지금 파트를 순서대로 편집해 들려주었다.

순식간에 스트리밍 사이트의 채팅창이 소란스러워졌다.

- 뭐지? 분명 아까 것도 좋았는데 훨씬 좋아졌는데?

- 애들 놀란 얼굴 너무 리얼함ㅋㅋㅋ

- 역시 하예찬 그저 빛......

누가 들어도 나아진 결과물에 멤버들의 태도가 전날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변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을 하고 부스에 들어가는 멤버들 뒤로 인터뷰 영상이 이어졌다.

[어, 처음엔 너무 오래 녹음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하다 보니까 제가 생각이 짧았다는 걸 알겠더라고요. 선배님들이 왜 녹음이 어렵다고 하셨는지 알 것 같아요.]

[녹음을 하면 할수록 더 좋아지니까 사실 몇 번 더 하고 싶었어요.]

[이번 앨범은 준비 기간이 짧아서 이틀로 끝났지만, 다음 앨범은 진짜 예찬이랑 멤버들 모두가 만족할 때까지 녹음을 계속해 보고 싶네요.]

누가 봐도 빡빡했던 녹음 현장을 보통이라고 받아들이다 못해 더 빡빡하게 굴려 주길 바라는 멤버들의 인터뷰에 채팅창은 또다시 뒤집어졌다.

- 얘들아 그거 아니야!

- 앞으로도 열심히 녹음할 것 같아서 고맙긴 한데 이래도 되는 건지 잘 모르겠음ㅋㅋ

- 자진해서 지옥불 걸어가는데 말릴 수도 없고......

뒤이어 프로듀서를 맡은 예찬과 타이틀곡 작곡가인 강해솔의 인터뷰가 차례대로 나왔다.

[해솔이 형이 좋은 곡을 쓰느라 고생 정말 많았죠. 프로듀싱은 처음이긴 했는데, 멤버들이 잘 따라와 줘서 좋은 곡을 완성했다고 생각해요. 제가 아니라 다 멤버들 덕이죠.]

[그냥 고마운 마음이에요. 멤버들도 그렇고, 예찬이도 그렇고…… 사실 아직 실감이 안 나네요. 직접 작곡한 곡이 앨범으로 나온다니 안 믿겨요.]

다시 녹음실로 바뀐 화면은 은근슬쩍 옆에 앉은 예찬을 바라보던 강해솔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잡았다.

몇 번이고 망설이던 강해솔이 다소 삐죽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고생 많았어, 프로듀서.]

[나보다 멤버들이 고생이 많았지. 우리 강 작곡가님도 포함해서요.]

누가 봐도 쑥스러워 죽겠는 얼굴을 한 강해솔은 예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해솔아, 앞! 앞을 봐야지! 어이쿠, 늦었네.]

[악!]

대답도 듣지 않고 급히 뛰쳐나가던 강해솔이 문틀에 머리를 찍는 것으로 녹음 현장이 마무리되었다.

채팅창엔 강해솔을 부르짖는 팬들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 강해솔 미쳤냐고ㅠㅠㅠ

- 강해솔 귀여워서 벽 두들기다 구멍 남 옆집 사람이랑 눈 마주쳤는데 옆집도 강해솔 귀엽다더라

- 강해솔 유죄

- 내 작곡가가 이렇게 귀여울 리 없어

*   *   *

퍽, 소리와 함께 주저앉은 화면 속 강해솔을 바라보던 강해솔이 멀쩡한 이마를 괜히 몇 번 문질렀다.

그때의 아픔이 되살아난 모양이었다.

조용히 리얼리티에 집중하던 멤버들은 중간 광고가 시작하고 나서야 자유롭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와, 녹음했던 거 이렇게 다시 보니 되게 새롭다.”

“그러게요. 저게 5월 중순 즘이었으니 벌써 한 달도 더 지났네요.”

“어떻게 생각하면 그 후 한 달 조금 넘는 사이에 뮤비도 찍고, 데뷔도 하고, 음방 1위도 하고 아주 많은 일이 있었네.”

“생각해 보면 츄마프 시작한 지 이제 반년이잖아요. 진짜 신기하죠.”

아무래도 매주 반복되던 음악 방송 출연도 끝나고 별다른 스케줄도 없다 보니 데뷔 활동이 마무리되어 간다는 실감이 드는 것 같았다.

향수에 젖은 멤버들을 향해 슬슬 다음 앨범 이야기를 꺼낼지 말지 재 보는 사이, 광고가 끝났다.

자연스럽게 데뷔 쇼케이스 리허설 날로 바뀐 화면은 멤버들의 긴장과 설렘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이동하는 멤버들의 시선을 담아낸 것처럼 바뀌던 화면에 마침내 레굴루스의 쇼케이스 장소이자 츄마프 마지막 경연 장소이기도 했던 잠실 실내 체육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서정적으로 편곡한 츄마프의 주제곡 ‘Choose your prince’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츄마프와 데뷔 쇼케이스 준비 장면을 절묘하게 교차 편집한 화면이 차례차례 지나갔다.

부지런히 팝콘 통을 오가던 멤버들의 손이 멈췄다.

어느새 ‘I‘m your prince’로 바뀌었던 배경음은, 쇼케이스가 시작됨과 함께 데뷔 앨범의 타이틀곡인 ‘Only my you’로 또다시 바뀌었다.

[You, Only my you.]

정말 지겨울 정도로 듣고 부른 타이틀곡이었음에도 눈도 귀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화면 속, 지금보다 조금 어설프고 설렘으로 가득하던 그 시간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신 PD가 자신만만할 만했군.’

츄마프와 데뷔 리얼리티를 같은 PD가 맡았기에 만들 수 있는 감성이었다.

예찬은 소파 끄트머리에 앉아 있는 신 PD의 얼굴을 확인했다.

신 PD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씰룩거리고 있었다.

아이돌 리얼리티에 걸맞지 않게 대단한 영상미를 뽐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니 찬물을 끼얹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팔씨름이 들어갈 틈이 있나? 벌써 한 시간 다 된 것 같은데. 팔씨름 대회 시작하는 장면에서 끝나는 거 아니야?’

영상이 훌륭한 건 훌륭한 거고, 허위 광고는 허위 광고였다.

그런 예찬의 걱정을 깨 버리듯 무대 위에서 객석을 향해 인사하는 멤버들의 모습 아래로 자막이 떠올랐다.

[광고 후 Regulus : Debut on air 5화 2부로 이어집니다.]

“……2부?”

예찬의 혼잣말이 들렸는지 신 PD가 반응했다.

“아, 제가 말을 안 했군요! 우리 방송이 워낙 반응이 좋아서 5화부터 편당 시간을 좀 늘리기로 했거든요! 이번 5화는 아예 두 시간 특별 편성이고, 6화부터는 90분 편성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하하하!”

고요한 거실엔 광고 소리와 신 PD의 웃음소리만이 존재했다.

조용히 기억을 더듬던 예찬이 물었다.

“……언제 정해졌는데요? 아니, 공지는 어디에 했어요? 왜 못 본 거 같지?”

전혀 들은 바가 없었다.

“그게 이야기는 전부터 나오긴 했는데, 어제 정해져서 오늘 급하게 편성표만 고쳤지 뭡니까! 휴, 다음 화 편집을 미리 마쳐 둬서 다행이었죠! 정식 공지는 아마 오늘 방송 끝나고 나갈 거예요.”

이 무슨 얼레 벌레란 말인가.

지금까지 느꼈던 감동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일이 다 끝나고 공지를 내는 또라이들이 어디 있어.’

N-net, 답이 없는 건 알았지만 상상 그 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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