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네르하 라데우스가 되다. (1)>
천마의 영혼과 함께 회전하는 거대한 흑암의 구체에 휩쓸려 버린 뒤.
뚝! 뚝!
뺨을 적시는 물방울의 느낌이 신무조의 정신을 깨웠다.
‘여긴, 어디지?’
사지가 결박당한 채로 바다 깊은 곳에 처박힌 느낌.
언제나 자신을 배신하지 않던 육체가, 이번만큼은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다.
‘몸이 움직이질 않아.’
그나마 시각이 눈을 떴지만, 그 외엔 아무리 발악해도 육체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뚝! 뚝!
그 외에 느낄 수 있는 건, 동굴 위쪽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추정되는 물방울이 주는 촉감.
신무조가 강제로 육체를 깨우려고 하던 찰나.
“크윽!”
어마어마한 고통이 전신을 찢어버릴 기세로 날뛰기 시작했다.
“컥! 커윽!”
쿨럭거리며 검은 핏물을 토해낸 신무조는 자신의 몸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걸 자각했다.
‘무엇보다 내상이 치명적이다.’
당장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육체가 곧 절명할 거라 직감했다.
“푸후우!”
눈을 감은 신무조는 그대로 기본적인 운기요상법을 운용하며 천천히 내공을 일주천시켰다.
‘어, 어어?’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당황과 동시에 일주천을 중단시켰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왜, 왜 내공이 순환되지 않는 거지?’
원활하게 돌아야 할 내공이 이곳저곳에서 턱턱 막히고 있다.
수십 년 전에 전부 뚫어놨을 기경팔맥과 십이경락의 혈도들이, 어째서인지 대부분 막혀 있었던 것이었다!
신무조는 이 사태에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외부의 작용으로 막힌 게 아니다. 오히려 애초부터 막혀 있었던 것마냥 굳건하게 닫혀 있어.’
마치 ‘신무조’의 육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육체인 것 마냥 느껴지는 이질감.
‘지금 상황이 어쨌든 몸을 회복하지 못하면 죽는다.’
설사 최악의 상황이라 해도, 당황하지 않고 해결책을 찾아 돌파하는 것이 무인이란 존재 아니던가?
신무조는 통각을 차단하고 자신의 의식을 무의식 깊은 곳으로 집어넣었다.
모든 일념을 회복에만 집중시키기 위한 작업.
단전에 쥐꼬리만하게 남아 있는 백금색의 내공이, 육체를 되살리기 위해 경락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신무조의 머릿속으로 생전 처음 겪어보는 기억이 뇌리를 쑤시기 시작했다.
* * *
그 기억은 마치 동경 속에 영상이 나타나듯 시작되었다.
그 남아는 형제자매가 많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엄청나게 부유하고, 또 엄청나게 많은 가신들이 있는 집안.
그리고 신무조가 ‘생전 처음 보는 힘’을 다루는 집안이었다.
‘특이한 문화, 특이한 힘이군. 서양은 원래 다 저런가?’
왕족이 아닐까 싶었지만 조금 지켜보니 그건 아니었다.
아이는 ‘마법(魔法)’이라는 힘을 다루는 가문에서 태어났다. 혈족 자체가 전체적으로 상당한 재능을 타고났고, 그 재능을 바탕으로 부와 성취를 일구어낸 자들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뛰어난 피를 이어받았음에도 아이에게는 재능이 없었다.
―다시 하십시오, 도련님. 술식이 정교하지 못하고 헐겁습니다.’
―으, 으응…….
아무리 명가(名家)에서 타고났다 하더라도 그 명가의 혜택을 끝까지 누리려면 이름값에 걸맞은 결과물을 보여야만 한다.
하지만 ‘네르하 라데우스’는 그 결과물을 보여주지 못하고 낙오하고 말았다.
마법이란 학문의 성취는 형제자매는 물론 또래와 비교해도 딱히 특출 난 것이 없었다.
본인은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끝없이 노력했지만 세상은 네르하의 노력에 따른 결과를 공평하게 전달해 주지 않았다.
자신보다 뒤늦게 시작한 이들이 점차 자신을 넘어서기 시작하는데도 네르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노력했다.
하지만 재능이 없는 자에게 이 ‘라데우스’라는 가문은 그렇게 친절하지 않았다.
―아직도 1레벨? 정말 라데우스의 혈통이 맞아?
시간이 지날수록 기대는 실망으로. 그리고 괄시와 무시로 변해갔다.
직계 형제들은 물론 가신들까지 네르하를 푸대접하기 시작했다.
신무조는 그 모습이 익숙했다.
자신 역시 명가의 방계로서 태어났기 때문에.
‘나보다 딱히 낫다고 볼 순 없겠군. 아니, 오히려 더한가?’
일인 전승 문파의 후예로 후계자를 찾던 스승님과 만나지 않았다면 신무조 역시 하북신가 직계들의 횡포에 인생을 갉아먹었으리라.
게다가 방계인 신무조와는 다르게 네르하는 직계였다.
그런데 직계임에도 재능이 없었다.
그 비참함이 어느 정도일지는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네르하는 재능의 벽을 넘지 못하고 도태되어 갔다. 노력만큼 돌아오지 않는 결과에 절망하고, 의욕을 잃고, 또 그만큼 성취가 더뎌지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그럼에도 네르하는 포기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경지를 끌어올리기 위해, 이 가문 내에서 인정받기 위해 무리하고 또 무리했다.
그걸 위해 스스로를 동굴 안에 가두어버리는 극단적인 폐관 수련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본인의 역량을 넘어서는 무리는,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는 법.
―아…… 으아…….
동굴 안에서 이루어진 폐관 수련 30일 째.
기어코 네르하는 통제 가능한 수준을 벗어난 기를 무리해서 품으려다, 오히려 그 기가 폭주해 주화입마에 들고 말았다.
팔다리의 신경이 끊어지고 내장이 뒤집어지는 극악한 고통.
고통에 몸부림치며 꿈틀거리던 네르하의 육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시체가 되어 널브러졌고.
그 시체의 심장이 다시 뛰게 된 것은, 네르하의 육체가 기묘한 황금빛으로 살짝 빛난 이후부터였다.
* * *
“그렇게 된 것이었군.”
정신을 차린 신무조는 멍한 표정으로 어두컴컴한 동굴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만한 기억이 흘러들어왔는데 이젠 모를 리가 없다.
필사적으로 회복시킨 육체가 천마에게 당한 원래의 몸이 아니라 ‘네르하 라데우스’의 몸이라는 것을!
“중원에서의 결전에서 나는 결국 죽었고, 또 이미 죽어버린 녀석의 몸을 차지하게 된 것인가?”
신무조는 조용히 이 육체의 원래 주인의 이름을 불렀다.
“네르하 라데우스라.”
세계 최고의 마법 가문 ‘라데우스’의 5남.
중원의 ‘세가(世家)’와도 같은 집안의 자식이자 가문에선 유명한 낙오자이자 패배자.
신무조는 그런 존재의 몸을 차지한 것이다.
이유도, 원인도, 인과도 모른 채 뜬금없이 진행된 전생.
아니, 애초부터 이게 전생인지, 환생인지, 그것도 아니면 빙의인지조차 아직 확실치 않다.
‘이 삶은 나의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삶을 탈취한 것인가.’
신무조의 영혼이 네르하로 전생하여 어느 순간 각성한 것인가.
아니면 네르하가 죽고 신무조가 그 자리에 들어가 육체를 탈취하게 된 것인가.
완전히 기억이 없었다면 모르겠는데, ‘네르하 라데우스’의 기억이 신무조의 자아에 드문드문 섞여 융합되어 있다.
즉, 지금으로선 어느 것도 알 도리가 없었다.
“후우, 자아 성찰은 사정이 좀 나아지면 해야겠군.”
신무조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빈사 상태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여전히 육체는 무리한 기의 운용으로 여전히 상당히 망가진 상태다.
아직도 몸 구석구석에서 통증이 올라오고 있었다.
이 몸을 온전히 회복시키려면 섬세한 내공 운용 이전에 충분한 영양 섭취가 필수적이었다.
“어디 보자.”
어두컴컴하고 인기척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지하실이었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역시나 기억대로 폐관 수련 중이었군.”
신무조는 수북하게 쌓인 식량 상자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설사 네르하가 죄를 지어 구금이나 유폐형을 받았다 하더라도 아무런 식량도 없이 굶어 죽으라고 넣어 놓진 않았을 것이다.
“뭐, 딱히 죄인의 몸은 아니니 그냥 나가서 천천히 요양하면 되겠어.”
맛이 극악인 보존식품을 먹으면서 몸을 회복하기보단 차라리 나가서 보약 한 첩이라도 지어 먹는 게 회복엔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게다가 아무리 봐도 남은 식량의 양이 그리 많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꾸욱! 꾸욱!
“아, 제길.”
꿈쩍도 하지 않는 문을 바라보며 신무조는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마법이란 것이 일정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면 아예 문을 열지 못하게 설계되었다고?”
마법적인 술식이 걸려 있는 통짜 강철로 된 쇠문.
‘네르하’는 이 쇠문의 술식을 파훼하기 위한 마법 수련에 돌입했던 것이었다.
그야말로 배수의 진.
신무조는 허탈해하며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제약이고 나발이고 다 좋은데 말이야.’
아무리 네르하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네르하는 네르하고 신무조는 신무조다.
즉, 신무조는 마법이란 학문에 대해 1도 모르는 초짜 중의 생초짜.
“이거, X 된 건가?”
꿈쩍도 하지 않는 강철의 문을 바라보며 신무조는 서서히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 * *
네르하가 이 장소에 스스로를 가둔 이유는 단순히 성취의 향상을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라데우스 가문에 존재하는 전투 마법사 육성 기관, ‘리브라’.
그곳에 들어가기 전에 최대한 자신의 경지를 끌어올리기 위함이었다.
네르하가 기관에 들어가기 전에 이곳에서 무리를 한 이유는 당연히 그가 라데우스의 직계이기 때문이었다.
리브라는 라데우스의 창과 방패가 될 인재를 육성하는 장소.
그곳에 들어간 라데우스의 직계가 수준 이하의 모습을 보인다면 가문으로서도, 네르하 개인으로서도 큰 문젯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멍청한 놈.”
신무조는 바닥에 대자로 누운 채로 나지막하게 네르하를 욕했다.
기억을 되짚으면 되짚을수록 과거의 자신과 겹쳐지는 것이 많아 씁쓸함이 올라왔다.
‘여전히 내가 이 녀석으로 환생한 건지, 아니면 완전한 타인인 건지 헷갈리는군.’
어린 시절부터 최근의 일까지 거울에서 보지 못한 일들이 상당 부분 기억에 섞여 있다.
마치 자신이 겪었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생생한 감각.
그런 감정과 기억의 해일 속에서 신무조는 만 하루 동안 생각을 정리했다.
만약 네르하의 영혼이 별개로 공존하고 있다면 신무조는 기꺼이 육체를 내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리고 관조해도 네르하의 자아나 영혼은 발견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한 결과, 신무조는 결론을 내렸다.
‘적어도 지금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굶어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중에 네르하가 돌아와서 자기 육체 내놓으라고 따진다면…… 그건 그때 생각하기로 했다.
이미 네르하의 육체를 차지한 이상 무를 수도 없다.
자살이나 우화등선 이외에는 이 몸에서 떠나는 방법도 모른다.
“그냥 팔자대로 사는 수밖에.”
즉, 지금 이 순간부터 ‘신무조’는 ‘네르하 라데우스’로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신무조의 자아가 깨어나지 않고 시간이 그대로 흘렀다면 어차피 네르하는 그대로 죽었을 것이다.
“아니,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 위안일 뿐이지.”
신무조는 씁쓸한 기색으로 몸을 일으켰다.
천운이든 무엇이든 간신히 얻은 새 삶을 다시 빼앗기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약속하겠다.’
네르하를 지켜보면서, 그리고 네르하의 기억을 계승하면서 신무조는 네르하가 품었던 수많은 감정 역시 그대로 이어받았다.
네르하가 그토록 갈구했던 것.
죽기 직전까지 손에서 놓지 못했던 망념이자 한.
“이 ‘네르하 라데우스’라는 이름은 앞으로 이 가문에서 가장 인정받는 이름이 될 것이다.”
가장 존귀하고, 가장 높은 곳에서 만인을 내려다보는 자리에 앉을 것이다.
“그것이 지금부터 너, ‘네르하 라데우스’라는 이름을 사용할 나, 신무조의 약속이다.”
신무조, 아니, 네르하는 어두컴컴한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탄이 섞인 다짐을 내뱉었다.
『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
사비연 퓨전 판타지 소설
(주)조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