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네르하 라데우스가 되다. (2)>
그렇게 신무조가 네르하 라데우스로서의 자아를 인정한 이후로, 다시 얼마의 시간이 지났다.
“흠,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간다?”
자신이 네르하로 살아가고자 결정한 건 결정한 거고.
이 일생일대의 결심이 헛수고로 끝나지 않으려면 이 빌어먹을 쇠문을 어떻게든 열고 바깥으로 나가야만 했다.
네르하는 마법 술식이 새겨진 쇠문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최소 다섯 치(약 15cm)는 될 법한 두께. 아무리 봐도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열 도리가 없었다.
‘강기를 쓰지 않는 이상엔 무리겠군.’
지금 이 육체는 명부의 문턱을 살짝 밟았다가 돌아왔다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다. 당연히 강기는커녕 권기(拳氣)조차도 제대로 쓸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결국 돌고 돌아 남은 방법은 단 하나.
‘결국엔 이 수수께끼 같은 걸 풀어야 한다는 건가?’
온갖 기하학적인 문양과 언어로 이루어진 마법진.
‘네르하’의 기억으로는 마법이란 학문이 3레벨에 해당하는 수준이 되어야만 풀 수 있다고 되어 있다.
당연히 3레벨은 커녕 1레벨도 되지 않는 네르하에겐 불가능한 과업.
그런데…….
“가능할지도 모르겠는데?”
문에 새겨진 마법진을 한참 동안 관찰하던 네르하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마법적인 지식은 그다지 필요 없어. 감각과 경험이 더욱 중요한 녀석이군.”
내력. 즉, 마나를 흘려보내 길을 찾고 최종적으로 마법진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트리거’라는 것을 건들면 문이 열리는 방식.
하지만 이게 말이 쉽지. 이걸 해내려면 올바른 길을 찾는 판단력과 집중력, 그리고 마나를 끝까지 유지할 수 있는 절대치가 필요했다.
‘이전에 ‘녀석’은 그 세 가지 모두를 갖추지 못했지.’
그나마 썩어도 준치라고 라데우스 가문의 핏줄을 타고난 덕에 마지막 조건인 마나의 양 자체는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었다.
그마저도 무리한 연공으로 인해 그나마 있던 장점마저도 날아갈 뻔했지만 말이다.
‘가능성이 있더라도 지금 몸 상태로는 열 수 없다.’
네르하는 냉정하게 결론을 내렸다. 무리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그렇다면 현재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식량.’
사방이 막혀 있지만 식량 상자가 쌓여 있는 구석에 ‘전이 마법진’이라 추정되는 것이 보였다.
아마 저곳을 통해 식량을 공급받는 것으로 보이지만 문제가 있었다.
‘기억대로라면 마지막으로 식량이 공급된 지 열흘이 넘었어.’
원래라면 3일에 한 번씩 식량이 공급되어야 하지만 그러지 못한 것이 오래.
그 대가문 라데우스가 그런 초보적인 실수를 할 리가 없으니 분명 ‘외부 요인’이 작용했다고 봐도 좋을 터다.
남은 보존식과 식수를 모아 보니 그 양이 얼마 되지 않았다.
“잘해야 이틀 치인가.”
아마 ‘네르하’가 무리를 한 이유 중 하나도 이것과 큰 연관이 있을 것이다.
네르하는 현재 자신의 몸상태를 체크했다.
‘이 몸의 부상은 하루 이틀 정양해서 나을 수준이 아니야.’
일반적으로는 족히 한 달 이상 충분한 영양 공급과 함께 치료를 병행해야만 완치가 가능했다.
“쩝, 하는 수 없지.”
계산을 마친 네르하는 작게 뇌까리곤 자리에 주저앉았다.
털썩!
“조금 모험을 하는 수밖에.”
어차피 이대로는 방법은 없다.
가부좌를 튼 네르하는 그대로 눈앞에 있는 남은 식량을 모조리 입에 욱여넣기 시작했다.
우걱우걱!
고열량의 고체와 액체들이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모든 집중력을 동원해 단 한 번에 가능한 한계치까지 손상된 기혈을 회복시킨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저 결계의 트리거를 발동시키는 데 마법적인 지식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는 점이다.
가장 중요한 건 정답까지 길을 잃지 않도록 도와줄 날카로운 감각과 판단력.
본래 무적권신 신무조는 중원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내가기공의 고수.
원래의 ‘네르하’가 갖추지 못했던 앞의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는 건 일도 아니었다.
꿀꺽꿀꺽!
그렇게 모든 음식과 식수를 먹어 치운 네르하는 의식을 집중함과 동시에 사문의 심법, ‘천원무극신공(天元無極神功)’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모 아니면 도. 이것이 실패하면 가능성은 없다.’
기껏 얻은 두 번째 삶이 이렇게 허무하게 날아가도록 놔둘쏘냐?
웅웅웅!
네르하는 가공할 정도의 집중력을 보이며 내공. 즉, ‘마나’를 다스려 전신에 인위적인 활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본래 라데우스 가문의 마나 연공법에 길든 네르하의 육체가 전혀 다른 체계의 내공심법을 받아들이며 조금씩 조금씩,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 * *
“으으, 괜찮을까?”
라데우스 가문의 수습 집사인 사미르는 이제 막 2년 차가 된 신입 중의 신입이었다.
과거 몰락한 마법 가문 출신이었지만, 자신을 좋게 보아준 라데우스에 적을 둔 마법사 덕분에 이렇게 집사로나마 라데우스에 들어올 수 있었다.
원래라면 이제 막 커리큘럼을 소화한 사미르는 다른 수습들과 함께 방계들의 생활을 돕는 직무가 주어져야 했지만.
어째서인지 4년 차 이상의 정식 집사들에게만 주어지는 직계 혈족의 직속 수행 임무가 주어지고 말았다.
그 직계 혈족이 누군가 하면, 다름 아닌 가문에서도 유명한 다섯째 공자 네르하 라데우스.
그가 현재 폐관 수련 중인 지하 동굴의 입구를 지키는 임무였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아무런 일도 없기를!”
사미르는 동굴 앞에서 경건한 신도마냥 기도를 올렸다.
이제 막 1년을 채운 애송이에겐 지나치게 무거운 임무인 만큼 사미르가 느끼고 있는 부담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 이거 원래라면 전투부대 마법사분들이 맡아야 할 임무 아닌가?’
아니, 그 전에 선임 집사나 정식 집사들도 잔뜩 있는데 그들을 다 제치고 일개 수습생에게 이런 임무를 맡기다니!
임무를 배정받은 지 벌써 두 달이 지나가고 있고, 지금까지의 과정만으로 보면 아무것도 할 필요 없는 꿀 같은 시간이긴 했다.
하지만 여전히 사미르는 이 환경에 익숙하지 않았다.
‘나, 독박 쓴 건가? 정말로?’
사미르는 그제도, 어제도, 그리고 오늘도 굳게 닫혀 있는 철문 앞에서 좌절감을 표출했다.
아무리 수습이라 해도 그 역시 라데우스 소속인 만큼 5남인 네르하 라데우스에 대한 평가나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가문의 낙오자’, ‘역사 이래 최하(最下)의 재능’, 그냥 간단하게 ‘병신’ 등등등…….
직계에게 붙는 평가라고는 믿을 수 없는 혹평이었지만 이전, 딱 한 번 보았던 네르하의 모습을 떠올리면 그럴 만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문제는 그런 네르하의 수련 장소를 지키는 곳에 자신이 배정받았다는 것이었다.
‘설마 내가 버림 패는 아니겠지? 제발, 제발!’
무릇 대가문의 정식 집사를 꿈꾸는 자라면 가문 내의 권력 구조와 이동에 대해선 빠삭하고 민감해야 하는 법.
네르하가 언제 가문에서 축출되어도 이상할 게 없는 처지이긴 하지만 그런 네르하를 옹호하는 세력 역시 분명히 존재하긴 했다.
당연히 그런 고래들의 싸움에 새우등이 터져도 이상할 게 없으며, 사미르는 라데우스 가문에 들어온 지난 1년 동안 네르하와 엮인 사건을 세 차례나 목격하기도 했다.
‘아, 어쩌지? 지금이라도 도망가야 하나?’
아무리 본인이 새우보다 못한 플랑크톤이라고는 하지만 언제 어디서 조용히 사라져도 모르는 게 바로 플랑크톤이다.
애초에 사미르는 네르하가 무슨 목적으로 이 안으로 들어갔는지 알고 있었다. 아니, 이 거대한 가문 내에서 이걸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 만큼 네르하가 ‘목적’을 달성할 가능성은 지극히 낮을 것이라는 걸 자타가 공인하고 있으며, 달성하지 못한다는 건 네르하가 저 안에서 객사한다는 뜻과도 같았다.
사미르는 머리카락을 쥐어 잡으며 소리 없이 절규했다.
‘으아아아! 그러면 내 목도 같이 날아가는 거잖아!’
다른 어떤 잘못도 없이, 그저 네르하가 객사한 동굴의 문을 지켰다는 것만으로도 목이 날아갈 명분은 충분했다.
‘도망갈까? 아니, 도망가도 살아남을 수 있나? 아아악! 애초에 죽어도 이런 미션을 받아들이면 안 됐어! 아니, 죽으면 안 되잖아?’
그렇게 사미르가 이도 저도 못 하며 갈등에 휩싸이고 있을 때.
드르륵!
방황하던 사미르의 귀에 철과 바닥이 긁히는 소리가 조금씩 흘러들어 오기 시작했다.
“……어?”
절대 열리지 않을 거로 생각했던 문이 조금씩 움직이며 공간을 열어젖히고 있다.
그것이 의미하는 건 단 하나.
“실화인가?”
집사의 본분을 잊어버리는 말을 내뱉을 정도로 사미르가 맞이한 상황은 그만큼 비현실적이었다.
그렇게 완전히 내부가 드러난 동굴의 저 너머에서, 거대한 존재감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허, 허억!’
오싹!
사미르는 순간, 등골에 소름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마치 맹수와 눈을 마주쳤다는 착각.
하지만 착각은 착각이었을 뿐이었고, 맹수라고 여겼던 그 눈의 주인이 천천히 빛을 받으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뭐냐, 넌?”
맹수…… 아니, 네르하의 모습을 목격한 사미르의 입이 덜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네, 네, 네, 네르하 도련님?!”
“내 이름은 신,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뭔가 잠깐 혼란스러운 기색을 보인 것 같았던 네르하는 한숨을 내쉬며 온전히 동굴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저, 정말 문을 연 건가?’
네르하의 폐관 수련 내용은 수행을 명 받은 사미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네르하가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아 가문에서 나온 몇몇 마법사들이 쇠문에 무언가 수작질을 벌였다는 것 역시.
네르하는 멍하니 있는 사미르를 향해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그래서 네놈의 정체가 뭐지?”
정체라니? 지금 자신을 시험하고 있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전에 자신과 네르하가 마주친 건 아주 잠깐이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미르는 어떻게든 착실하게 교육받은 대로 입을 열었다.
“라, 라데우스 가문을 모시는 수습 집사 사미르 에델입니다! 얼마 전에 네르하 도련님의 직속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집사? 집사라. 아, 확실히 그런 게 있었지.”
마치 자신은 기억할 필요가 없다는 오만한 태도.
이전의 네르하 라데우스에게선 느낄 수 없었던 이질적인 모습에 사미르는 멍하니 두 눈을 깜빡거렸다.
“일단은 좀 쉬고 싶군. 네게 길 안내를 부탁해도 되나?”
“아! 무, 물론입니다! 저희는 라데우스의 혈족들을 모시기 위해 고용된 몸이니까요!”
사미르는 다급하게 고개를 흔들며 네르하를 인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방금 전 자신이 느꼈던 기이한 공포를 되짚어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착각이겠지?’
사미르는 자신의 뺨을 긁고는 네르하를 저택으로 인도하기 위해 마차를 호출했다.
하지만 사미르의 감각은 절대로 착각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암살자나 간자는 아닌가 보군.’
사미르의 기척을 알아차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
네르하는 저 녀석이 다른 형제자매들이 보낸 자가 아닌지 면밀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렇게 라데우스의 유명한 낙오자였던 네르하가 귀환했다.
『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
사비연 퓨전 판타지 소설
(주)조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