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클로이아 (2)>
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순 없는 노릇.
클로이아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네르하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가장 먼저 궁금한 건 이곳인데 말이야.”
네르하는 마법 서적의 어딘가를 짚으며 클로이아에게 질문을 날렸다.
“하아, 기본적인 룬어에 대한 문제로군요.”
대체 뭔 장난질인지…….
독박을 쓴 클로이아는 어쩔 수 없이 그 질문에 답해 줄 수밖에 없었다.
뭐, 몇 번 물어보고 나면 알아서 지쳐 떨어지겠지 했는데.
“이것에 대한 의미를 좀 알고 싶은데 이해가 잘되지 않거든?”
“……?”
날아오는 질문이 20개가 넘어가면서 클로이아는 슬슬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나.
“클로이아, 어째서 이 술식은 복잡하게 다섯 번의 파지를 거치는 거지?”
“파지가 지정하는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셔야 해요. 마법이란 기본적으로 마나 응축, 위력 조정, 목표 조준, 궤도 조정, 후폭풍 감소. 이렇게 다섯 가지의 과정을 거치죠.”
클로이아는 기본적인 윈드 마법을 시연하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종류에 따라 몇 가지 과정을 생략할 수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마법을 행하는 데 있어 이 다섯 가지는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이 당연한 걸 왜 모르냐는 시선을 무시한 채 그 답변이 끝나자마자 네르하가 다시 질문을 날렸다.
“하이델 로룬 데아 소사카예스라는 룬어는 ‘바람이여, 내 손끝에 모여 흐트러져라’라는 뜻 아닌가? 왜 모은 다음 흐트러뜨리는 거지?”
“그래도 이건 좀 괜찮은 질문이군요. 소사카예스는 ‘소카라예스’라는 단어와 혼동하실 수 있는데 ‘흐드러지다’라는 뜻이에요. 즉, ‘내 손끝에 모여 탐스럽게 성하라’라는 뜻이지요.”
“흠, 그렇군.”
거의 폐점 시간이 될 때까지 네르하는 모르는 것이 생기면 모조리 클로이아에게 물어대었다.
그야말로 ‘전부’라고 대답한 것이 거짓이 아닐 정도로 폭풍 같은 질문의 세례였다.
‘뭐, 이 정도면 대충 만족했겠지?’
첫날이 끝나고, 클로이아는 네르하가 자신에 대한 장난을 그만둘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5일이 지나면서 그녀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음, 이건 말이죠…….”
“그래그래.”
클로이아는 오늘도 여전히 기초 서적과 씨름하는 네르하를 기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진짜 뭐지?’
수습 집사 하나만을 대동하고 들어와 매일같이 기초 서적만을 탐독하고 있다.
처음엔 장난질을 치는 줄 알았는데 저 진지한 표정과 열의는 도저히 장난으로 보이질 않는다.
‘물어보는 수준은 정말 마법에 갓 입문한 초보자 수준인데.’
그렇다고 5일이나 시간을 들여 자신에게 장난질을 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좀 아니었다.
그래서 물어보았다.
“왜 제게 그런 모습을 보이시는 거죠?”
“……?”
클로이아의 물음에 네르하는 고개를 들어 그녀와 눈동자를 마주쳤다.
‘그런 모습? 왜 갑자기 열심히 하냐는 질문인가?’
뭔가 다른 의미가 있는 질문 같았지만 네르하는 일단은 보편적인 뜻으로 이해하여 대답했다.
“음, 알아보니까 내게 남은 시간이 석 달밖에 남지 않았거든?”
“남은 시간이라뇨?”
“‘리브라’에 들어가기까지 남은 시간 말이야.”
라데우스의 전투 마법사 육성 기관, 리브라.
혈족이나 가문의 휘하에 들어온 이들을 하나의 당당한 전사로 키우기 위해 설립된 최고의 마법 교육기관으로, 거의 모든 라데우스의 혈족들은 이곳 리브라를 거쳐야만 가문의 중직을 맡을 수가 있었다.
“아무래도 부족한 게 많다 보니 열심히 할 수밖에 없지.”
“아니, 그…….”
“적어도 들어가기 전까진 최선을 다해 준비해야겠더라고.”
“…….”
“그러니 좀 부탁한다고. 내가 기댈 건 너밖에 없으니까.”
질문의 의도는 그게 아닌데라고 말하려고 해도 뭔가 다시 물어볼 타이밍이 지난 느낌이었다.
클로이아는 입술을 살짝 삐죽 내밀며 고개를 돌렸다.
* * *
바멜 라데우스.
대륙 최강의 마법 가문 라데우스의 4남이자 젊은 나이에 5레벨의 경지에 올라 라데우스 직계로서의 역량을 입증한 젊은 피.
가문 내에 마련된 자신만의 마탑에서 바멜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부하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임무에 실패한 부하의 보고였지만.
“그래. 네르하가 어떻게 그곳에서 빠져나왔는지는 알지 못했다고?”
“죄, 죄송합니다, 바멜 도련님. 네르하 도련님이 모든 접견을 거부한 탓에 자세한 정보를 얻지 못했습니다.”
사절로 갔던 수하는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바멜은 인상을 쓰며 그런 수하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후, 설마 네르하가 5레벨에 이르렀을 리는 절대 없고. 운이 좋았거나 다른 누군가가 개입했을 테지?”
“예. 아무래도 셋째 부인께서 손을 쓰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셋째 부인이란 네르하의 친모, 로젤리아 라데우스를 뜻했다.
“쯧! 영락없이 그곳에서 굶어 죽을 줄 알았는데. 명줄도 질기군.”
한번 계략이 실패한 이상 당분간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대상이 네르하라 해도 가문의 이목은 결코 두 번을 허용하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네르하는 요즘 뭐 하고 있지?”
“저택에 심어 둔 자의 보고에 의하면 14번 구역에 있는 0레벨 서고에 드나들고 있다 합니다.”
“뭐라고?”
14번 구역, 0레벨 서고.
‘그 녀석은 그곳의 의미를 알고 들어간 걸까?’
그건 알 수 없다.
하지만 단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건 그로 인해 네르하가 가문 내 누군가의 역린을 건드릴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살짝 혀를 찬 바멜은 수하에게 지시를 내렸다.
“놈이 저택에만 틀어박히지 않은 건 다행이군. 일단 내 밑에 있는 방계 몇을 움직여서 네르하를 자극해 보라고 해.”
“그, 너무 네르하 도련님께 신경 쓰시는 것이 아닐는지? 그분이 아무리 성장해 봐야 바멜 도련님의 발끝에도…….”
“멍청한 놈!”
딱!
들고 있던 지팡이로 수하의 머리통을 두들긴 바멜이 인상을 쓰며 외쳤다.
“당연히 네르하 따위를 신경 쓸 리가 있나? 그 여자가 네르하를 구한 이유가 뭐겠어? 막내가 다 자라기 전까지 네르하를 방패막이로 세우기 위함이 아니냐!”
바멜의 일갈에 수하는 그제야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아! 네이하 아가씨 때문이었군요!”
네이하 라데우스.
계승권을 가진 여덟 명의 직계 중 막내이자 5남인 네르하와는 같은 친모를 공유하고 있는 친남매.
하지만 낙오자인 네르하 따위와는 다르게 네이하의 재능은 여덟 명의 형제자매 중에서도 그 ‘첫째’와 비견할 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바멜은 이를 갈았다.
“가주님께서 아직 정정하시니 이대로 10년쯤 지나면 네이하는 가주 계승전에 참여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게다가 네르하 역시 썩어도 계승권자 중 하나이니 미리 밟아 놓는 것도 나쁘진 않아.”
“그, 그렇군요! 역시 바멜 도련님이십니다!”
“네이하야 그 여자의 철통같은 보호를 받고 있으니 건드리기 쉽지 않지만 네르하는 다르지. 알아들었으면 빨리 움직여!”
“예, 옙!”
그렇게 수하가 허둥지둥 사라지고, 혼자가 된 바멜은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으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차라리 거기서 죽는 게 나았을 것을. 괜히 살아남아 더 큰 화를 초래하게 되는구나.”
수면 밑에서 진행되고 있던 가문 내의 권력 다툼은 슬슬 본격적으로 치달아가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네르하가 리브라에 들어가는 건 분명 탁월한 선택이 분명했지만 바멜에게 있어선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 * *
“훅, 후욱!”
네르하는 현재, 가문 내에 마련되어 있는 단련 시설에서 육체를 단련하고 있었다.
시설 내부의 기구를 이용하거나 뜀박질 등으로 땀을 흘리는 일반적인 단련.
“…세상에.”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지나가던 가문의 사람들이 입을 뻐끔거리며 경악했지만 네르하는 단련을 멈추지 않았다.
‘이 빌어먹을 정도로 허약한 육체 같으니!’
한 달 정도 걸릴 줄 알았던 육체의 내상은 본가에서 치료 마법을 사용하는 술사가 내려오자 고작 일주일도 안 되어 완치에 가깝게 회복할 수 있었다.
마법이란 힘의 체계가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은 것은 기쁜 오산이었지만 그와는 별개로 이 ‘네르하 라데우스’의 저질 육체는 무적권신의 입장에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나약함이었다.
“저,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닌가요, 도련님?”
요즘 항상 옆에 끼고 다니는 수습 집사 사미르는 네르하의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며 당황해하고 있었다.
“이 정도 무리는 해 줘야 해. 제길, 신경 쓸 게 마법만이 아니라니!”
단순히 마법만을 배울 거라면 상관없겠지만 어디까지나 네르하는 마법과 무공을 병행할 생각이었다.
정확히는 무공을 기반으로 마법의 힘을 섞을 계획이었다.
‘중원에서 무공과 술법을 병행하는 놈은 딱 한 놈 있었지. 십대고수 중 하나인 귀명우사(鬼命羽士) 놈.’
솔직히 순수한 무공으로 따지면 귀명우사는 고작 절정의 문턱을 갓 넘은 정도였다.
하지만 거기에 가공할 술법 능력에 무공에 합쳐지니 어지간한 초절정 고수들조차 잡아먹는 어마어마한 신위를 선보였다.
무엇보다 마교 놈들의 함정에 걸렸던 숭산 퇴각전에서 그 천마를 물 먹이고 오천에 달하는 무림맹 병력을 무사히 빼돌린 일은 그야말로 전설이었다.
‘놈이 가진 힘의 근원은 무공과 술법이 융합한 전혀 새로운 힘. 그 새로움에 적응하지 못해 많은 이들이 놈에게 목숨을 내주었지.’
단순히 주먹에 불이나 바람을 덧씌워 사용한다는 수준이 아니다.
마법을 계속 파고들면 이전, 천마와의 마지막 결전 당시 뚫었던 천지신통의 경지를 다시 한번 노려볼 수 있을 거란 직감이 들었다.
‘아마 원래의 힘을 다시 되찾는다 해도 그 단계에 다시 도달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아.’
하지만 이 세계의 완성된 힘의 계통인 마법이란 체계를 수련하다 보면, 분명 과거의 경지를 뛰어넘을 수 있는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전에 이 빌어먹을 육체를 어떻게 개조해야지, 원.’
길바닥에 널린 삼류무사도 이놈보단 낫다. 아니, 이 몸뚱어린 애초에 무사라고 부를 수 있는 육체도 아니었다.
고작 연병장 두어 바퀴 뛰었다고 체력이 방전되는 게 말이나 되나!
“헉, 헉!”
네르하는 어느새 육체가 한계까지 도달한 것을 느끼곤 뜀박질을 멈췄다. 사미르가 가져온 얼음물이 꿀맛처럼 느껴졌다.
“괘, 괜찮으십니까?”
“아주 괜찮아. 간만에 옛날로 돌아간 기분이군.”
“옛날요?”
“그런 게 있어.”
네르하는 거의 하루 대부분을 클로이아가 있는 서고에 들르거나 아니면 체력 단련으로 시간을 보냈다.
당연하지만 기존에 있던 저택에서는 몸을 단련할 환경이 되지 않았기에 자연히 밖에 나돌아다니는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가문 내부에서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슬슬 움직이는 자가 나올 법도 한데…….’
가문 내의 권력 구조는 얼추 파악이 끝났다. 그리고 자신을 객사시키려 했던 원흉에 대한 대략적인 정체 역시.
‘5년이면 된다. 5년이면 충분히 내 한 몸 지킬 수 있는 힘을 갖출 수 있어.’
마법의 성취와 가주의 자리를 노리는 건 별개로 둬야 하겠지만 적어도 5년이면 네르하는 가문 내 누가 와도 몸을 지킬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후우, 슬슬 돌아가지.”
“네! 갈아입으실 옷을 준비하겠습니다!”
이제 완전히 네르하의 기행에 익숙해진 사미르는 옷을 가져오기 위해 빠르게 눈앞에서 사라졌다.
이 짓도 벌써 일주일째다.
슬슬 근육이 붙고 있고, 마법사들이 마나를 다루는 방식에도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그 육성 기관이라는 데 들어가기 전에 기초적인 문제는 해결할 수 있을 거 같군.’
우연히 인연을 맺은 클로이아의 존재는 네르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귀찮아하는 그녀의 태도를 네르하가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네르하가 진심을 다해 학습에 대한 열의를 보이자 그녀 역시 나름 정성을 들여 네르하를 대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단 말이지. 그 여자 정도의 실력자가 고작 그런 곳에서 썩고 있을 리가 없는데…….’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여겼던 서고에 무언가 비밀이 있는 것일까?
‘사미르도 그녀에 대해선 모르는 것 같았고, 뭔가 다른 이유가 있나?’
네르하가 클로이아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오랜만이군, 네르하.”
저 바깥에서 뭔가 건들건들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
사비연 퓨전 판타지 소설
(주)조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