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계약 (2)>
[뇌와 심장과 하복부에 세 가지 마나 저장소를 만들어 순환하는 방법에 대한 소고 – 19대 마탑주, 카르안 라데우스.]
과거, 라데우스 가문의 선조 중 하나가 시도했던 방법이었다.
‘상, 중, 하단전을 모두 이용하는 방법이라……. 중원에도 그런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었지.’
내가기공의 대가라고 불리는 무당파에서도 그런 시도를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무당파의 그 연구는 실패했다고 알고 있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갓 내공심법에 입문하는 초보자는 결코 익힐 수 있는 난이도가 아니었다지?’
분명 혁신적이고 강력한 내공심법은 맞았지만 그렇다고 무당파의 진산절기 ‘태극이원신공’보다 딱히 우월한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새로 개발한 그 내공심법을 무난하게 익힐 수준이라면 이미 강호에서도 초절정 고수라고 불릴 정도는 되어야만 했다.
즉, 일가(一家)를 이룰 수준의 고수가 기존의 내공을 모두 포기하고 처음부터 이 심법으로 내공을 쌓아야 하니 자연적으로 폐기될 수밖에 없는 것.
지금 눈앞에 있는 카르안 라데우스의 논문은 과거, 무당파의 연구와 상당히 일맥상통한 부분이 있었다.
‘이거다. 이거야!’
살짝 훑어본 것만으로도 느낌이 온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 이 논문을 차분히 살필 만한 시간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
네르하는 살짝 고개를 돌려 클로이아와 눈을 마주쳤다.
“뭡니까, 그 느끼한 눈빛은?”
“이거, 가지고 나가는 거 가능하지?”
“안 된다고 사전에 말씀을 드렸…….”
“절대로 이 서고 바깥으로 반출하지는 않겠어. 퇴실 시간이 되면 너에게 반납하고 그 내용은 철저하게 함구하지.”
“…….”
클로이아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런 편법은 통하지 않습…….”
“만약 네가 라데우스 본가의 누군가와 연결되지 않았다면 내가 훗날, 네 후원자가 되어 줄 수도 있어.”
“……!”
순간,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저 말인즉 네르하가 지금 그녀를 스카우트하겠다는 말과 같다.
사실, 클로이아의 실력이라면 가문 내에서 중책을 맡고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지난 열흘간 관찰한 결과, 네르하는 클로이아가 이 가문 내에서 ‘푸대접’을 받는 위치에 있다는 걸 확신했다.
‘‘후원자’란 한마디에 저런 동요를 보이는 것이 그 증거.’
네르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난 라데우스의 직계이자 가주직에 도전할 수 있는 계승권을 가진 자야.”
“그래서요?”
“즉, 지금 너의 처지를 타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라는 뜻이지.”
“…….”
“네가 왜 이런 곳에서 썩고 있는지는 몰라. 아마 가문 내의 누군가에게 찍혔거나, 혹은 실수를 저질러 벌을 받고 있다고 가정할 수 있지.”
“무슨 헛소리를! 지금, 벌이라고 하셨습니까?!”
“진정해. 그냥 가정이 그렇다는 거지. 그럼 전자일 가능성이 높군.”
“……!”
정곡을 찔린 클로이아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네르하는 신형을 돌려 클로이아와 그대로 마주했다.
“네 눈으로 본 나는, 내가 무력하게 라데우스에서 도태될 것으로 보이나?”
“외부의 평가로 보면 그렇죠.”
“평가가 아닌 네 눈으로 판단하면 어떻지?”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뭘 믿고 저런 소리를…….’
네르하가 클로이아를 지켜보았듯, 클로이아 역시 네르하를 깊게 관찰했다.
그런 그녀 지난 시간 동안 지켜본 네르하 라데우스란 인물은 소문과는 전혀 다른 인종이었다.
‘절대로 재능이 없어 도태된 자가 아니야.’
이해가 빠르고 응용력도 최상급이다.
무엇보다 마나에 대한 감각은 절대 저 나이대의 존재가 보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특히 마나를 이용해 뇌를 활성화시키던 그 수법은…….’
클로이아는 네르하가 기초서를 공부하는 와중 마나를 움직여 틈틈이 상단전을 개발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 수법은 어지간한 대마법사라고 해도 함부로 시도할 수 없는 위험천만한 작업.
30대가 되기도 전에 ‘아크 메이지’의 칭호를 얻어 낸 자신의 이름값을 걸고 장담할 수 있었다.
‘후원자라.’
클로이아의 표정이 어둡게 변했다.
자신이 이곳, 라데우스 가문에 들어온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물론 이 가문의 지원 덕에 자신의 재능이 만개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지만 근본적으로 자신의 처지는 ‘인질’에 가까웠다.
“당신은…… 제가 뭘 원하는지 알고 절 거두겠다는 제안을 하시는 거죠?”
“글쎄? 잘 모르겠군. 너와 내가 만난 지는 이제 열흘째니까.”
네르하의 말에 그녀의 뺨에 분노의 홍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제 처지가 어떠한지 그에 대한 정보도 수집하지 않았으면서 잘도 그딴 소릴……!”
“그렇게 말하면 할 말 없군. 하지만 대충 짐작은 하고 있어. 인질 비슷한 거겠지.”
“……!”
네르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나는 라데우스의 가주가 될 생각이다.”
“뭐, 뭐라고요?!”
“뭘 그렇게 놀라지? 내가 계승권을 들이밀었다면 가주를 목표로 하고 있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
클로이아가 경악에 잠겨 입을 뻐끔거리는 사이.
“방해되는 형제가 있다면 모두 치워 버리고, 이 라데우스라는 거대 세력의 주인이 될 거다.”
네르하는 아낌없이 자신의 포부를 그녀에게 들이대었다.
“그렇다면 네 소원이 무엇이든 간에 이루어 줄 수 있겠지?”
“…….”
클로이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지금 이 일상이 불만족스러운 건 아니었지만 저 북방에 있는 일족들을 생각하면 이곳에서 안주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걸 생각해도 이 라데우스라는 가문은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개미지옥과도 같은 장소.
썩은 동아줄이든, 황금 동아줄이든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하다고 느끼고는 있었다.
그녀는 결심했다.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
“제 눈으로 보는 것을 믿으라고 했지만 전 당신에 대해 그다지 본 것이 없습니다.”
‘실패인가?’
네르하가 살짝 낙담하던 그때, 클로이아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니 당신이 무엇을 보여 줄지 직접 제 눈으로 볼 기회를 드리죠.”
“……!”
스아아아아!
순간, 네르하의 전신에 어마어마한 한기가 몰아닥치기 시작했다.
‘크윽!’
순식간에 손과 발에 동상이 생기고 안면 근육이 굳어갈 정도의 한기.
그 한기 속에서 클로이아는 동작을 멈춘 네르하를 노려보며 말했다.
“지금 이건 약 5레벨에 해당하는 냉기를 압축한 것입니다.”
주변에 영향을 끼치지 않고 오롯이 네르하 하나만을 향해 냉기를 집중하는 극한의 제어 능력.
“이 냉기의 주박을 뚫고 제한 시간인 4분 안에 저 문밖으로 나갈 수 있다면…… 도련님께서 제게 그런 제안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인정하죠.”
5레벨에 해당하는 냉기라면 4분이 아니라 1분도 되지 않아 사람을 얼려 죽일 수 있는 힘이었다.
지금 서 있는 자리로부터 출구까지는 약 백여 미터.
일반인이라면 세 걸음도 떼지 못하고 그대로 동사할 것이다.
“만약 실패한다면 저를 가지고 장난질을 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 당신이 이곳에서 논문을 가지고 나가려던 시도를 가문에 알리겠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건 직계라도 쉽게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퇴로가 없는 사면초가.
클로이아는 싸늘한 눈으로 네르하를 향해 대답을 종용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야…….”
네르하가 할 대답은 당연히 정해져 있었다.
* * *
좁고 어두운 사각형의 밀실.
고작해야 몇 개의 촛불만 타오르는 공간.
그 공간의 상석에 앉아 있는 한 남자와, 그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중년인이 남자의 앞에 엎드려 있다.
이 좁고 어두운 밀실이 마법계의 대부(代父)이자 세계 패권의 사분지 일을 쥐고 있다는 라데우스 가문.
그 가문의 정점인 가주가 거주하는 곳이라고 말한다면 그 누가 믿을 수 있을까.
“흐음.”
금색 수실과 휘황찬란한 문양으로 고급스럽게 포장된 편지 봉투.
은은한 꽃의 향기가 나도록 세심하게 처리를 한 편지지.
그 누가 봐도 최대한의 정성을 들였다고 볼 수 있는 이 편지는 라데우스 가문의 가주 카이젤 아우구스트 라데우스의 손에 들려 있었다.
“이게 정말 케프렌 가문의 의지인 건가?”
케프렌.
라데우스의 대척점에 속해 있는 가문의 이름이자 검의 성지이자 검술의 정점. 그리고 800년 동안 라데우스와 대립해 온 숙적의 이름이기도 했다.
“네. 케프렌 원탁의 기사 중 하나인 고드멜이 직접 가져왔으니 그 내용의 진실성은 진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카이젤의 앞에 부복한 중년인은 가주의 혼잣말에 극도의 낮은 자세로 대답했다.
“웃기는군. 고작 자기 아들을 자랑하기 위해 우릴 끼워 넣겠다?”
케프렌에서 보낸 이 편지는 온갖 미사여구와 마법 명가 라데우스에 대한 찬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허식을 걷어 내고 나면 단순한 기만이자 조롱의 내용만이 남음을 카이젤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열여덟 살의 나이로 최연소 원탁의 기사라……. 확실히 무시할 수 있는 건 아니군.”
편지지 곳곳에서 자기 아들에 대한 자랑과 자부심이 대놓고 드러나 있다.
케프렌 원탁의 기사는 가문의 대소사에 관여하는 최고 위원회를 지칭하는 말이자 오로지 가문의 혈통과는 관계없이 실력으로만 뽑히는 자리였다.
즉, 어떻게 되었든 원탁의 기사에 이름을 올렸다는 건 전 세계 무인들이 들어가길 염원하는 검술 명가 케프렌 가문에서 서열 20위권 이내에 이름을 올렸다는 뜻이다.
카이젤은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눈앞의 중년인에게 물었다.
“암살할 수 있겠나?”
중년인은 잠깐의 침묵 이후 곧바로 대답했다.
“본가 전력의 10%를 투입하면 가능합니다.”
“불가능하단 소리군.”
“아직은 케프렌 가문과 결전을 벌일 시기는 아닌 듯합니다. 더군다나 최근, 케프렌 가문은 급격히 황실과 가까이하고 있습니다.”
“쯧!”
카이젤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짧게 혀를 찼다.
“그래. 원탁의 기사라는 건 우리로 따지면 7레벨에 이르렀다는 뜻. 그 성취를 고작 열여덟 살에 이르렀다는 말이니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이해는 가는군.”
화륵!
카이젤은 볼일이 끝났다는 듯 망설임 없이 편지지를 태워 버렸다.
“그래. 암살할 수 없다면 축하의 사절이라도 보내 줘야지. 놈들이 바스텔과 아르바의 성인식 때 했던 짓들은 차치하더라도 말이야.”
“…….”
“적당히 나이대에 맞는 녀석을 보내면 되겠군. 안톤, 추천하는 녀석이 있나?”
안톤이라 불린 중년인은 송구하다는 듯 다시금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나이대만 고려하면 상대와 동갑인 네르하 도련님이 있습니다만…….”
“…….”
“역시 그분의 성취를 생각하면 케프렌 가문에서 망신만 당할 가능성이 큽니다.”
감히 아들을 폄하하는 말을 그 아비의 앞에서 내뱉었음에도 카이젤에겐 그다지 분노가 없었다.
애초에 네르하에 대한 가문의 평가는 고작 그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무난한 선택으로는 바멜 도련님이나 레티안 아가씨, 혹은 세티안 아가씨를 보내시는 것도 나쁘진 않아 보입니다.”
사실, 가문 내의 평가를 보면 세 명을 네르하에 빗대는 건 그들에게 큰 실례일 정도로 차이가 났다.
“네이하는 어떻지?”
“네이하 아가씨를 보내는 건 너무 위험부담이 큽니다.”
네이하의 재능은 라데우스에겐 보물이나 다름없다.
라데우스 직계 8인 중에서 어쩌면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이니.
안톤의 말에 카이젤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
“……네르하가 얼마 전에 폐관 수련을 마치고 나왔다지?”
“네. 바멜 도련님의 수작으로 감찰원에서 개입 시기를 재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스스로의 힘으로 5레벨에 달하는 봉인 술식을 해제하고 나오셨습니다.”
5레벨.
정말로 네르하가 5레벨에 이르렀는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천지가 뒤집힐 정도의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로젤리아나 다른 이들이 개입한 정황은?”
“아직까진 찾지 못했습니다.”
카이젤은 턱을 쓰다듬다가 문득 피식 웃었다.
“재밌겠군.”
“그 말씀은?”
안톤이 고개를 살짝 들며 의외라는 기색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차피 케프렌 놈들이 축제를 벌이는 시기는 8개월 후. 넉넉잡아 반년 정도면 네르하가 옥인지 돌인지 확실히 알 수 있겠지.”
“그건.”
안톤의 표정엔 부정으로 가득했다. 사실, 증거만 찾지 못했을 뿐 네르하가 스스로의 힘으로 나왔다고 믿는 이는 안톤을 포함해 원로 중에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일단은 지켜보도록 하지. 녀석이 곧 리브라에 들어간다며? 그럼 곧 알게 되겠지. 수작인지 아닌지.”
“……예에.”
“만약 네르하가 사기를 쳤다는 것으로 판명된다면 적당한 벌을 내리고 이 일은 바멜에게 맡기도록 하지. 그때까진 다른 녀석들에게 네르하를 건들지 말라고 전해.”
가주의 입에서 ‘적당한’이라는 말은 당사자에겐 절대로 적당한 벌이 아닐 것이다.
“알겠습니다, 가주님.”
안톤은 속으로 혀를 차며 네르하의 명복을 빌었다.
『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
사비연 퓨전 판타지 소설
(주)조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