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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11화 (11/237)

11화

<계약 (3)>

사아아아!

시간이 지날수록 사지의 감각이 사라져 간다.

앞으로 남은 갱신 시간까지 4분.

만약 4분 안에 나가는 데 실패한다면 클로이아는 지체 없이 가문에 네르하에 대한 사실을 알릴 것이고.

아무리 출입 권한이 있다고 하나 논문을 빼돌리려던 시도를 한 네르하는 가문의 추궁을 받아 대번에 입지가 불안해질 것이다.

쩌적! 쩌적!

무언가가 갈라지는 불안한 소리가 전신에서 들려온다.

시시각각 육체가 죽어가고 있었지만 네르하의 표정은 오히려 편안했다.

‘웃어?’

클로이아는 입꼬리를 올리는 네르하의 모습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비록 고유 계통의 마법을 쓴 것은 아니지만 들어간 마력량 만큼은 충분히 5레벨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

“그럼…… 입구에서 보도록…… 하지.”

쩌저저적!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네르하가 천천히 신형을 돌려 입구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우, 움직인다고?’

클로이아는 경악했다. 그녀는 네르하가 이 시험을 통과할 확률은 한 자릿수 미만이라고 생각했다.

라데우스의 최상위 순위에 있는 직계들은 자신도 쉽게 볼 수 없으며, 당연히 지금의 네르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괴물들뿐.

그야말로 이제 막 마법을 깨닫기 시작한 네르하는 죽었다 깨어나지 않는 이상 그들을 넘어서는 게 불가능할 정도의 실력자들이었다.

‘지금의 경지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 주는 것. 그 가능성을 보여야만 최소한의 승산이 있어. 하지만 과거의 행적으로 봤을 땐 불가능에 가깝지.’

고작 1레벨 2레벨에서 아등바등하는 범재가 아니라 훨씬 윗줄을 노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야만 한다.

그게 근성이든, 노력이든, 재능이든 무엇이든. 클로이아는 겁대가리 없이 자신에게 손을 내민 애송이가 뭔가를 보여 주기를 은연중에 기대했다.

뚜둑! 뚜둑!

네르하는 필사적으로 마나를 일주천시키며 전신의 잠재력을 폭발시켰다.

‘죽겠군.’

클로이아가 네르하에게 건 마법은 단순히 냉기가 아니라 움직임을 속박하는 주박.

이것을 깨뜨리려면 체내에 마나를 열양지기(熱陽之氣)로 바꾸어 끝없이 순환시켜야 한다.

그걸 가능케 하려면 화경의 경지에 이르러야 하지만 네르하는 이미 과거에 그 경지를 지나간 지 오래였다.

네르하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전신에서 시뿌연 연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클로이아는 입을 살짝 벌렸다.

“어, 어떻게?”

클로이아가 생각하기에 이 주박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총 세 가지다.

최소 4레벨 이상의 디스펠이나 안티 프리징 마법을 사용하든가, 아니면 강체법(强體法)을 사용할 수 있는 기사급의 육체를 가지든가.

‘그것도 아니면 마나를 피부에 덧씌워 냉기를 차단할 정도로 세밀하게 운용하든가.’

사실, 뒤로 갈수록 현실성이 없어지는 방법들이었다.

차라리 디스펠을 쓰고 말지 마나 컨트롤만으로 이 냉기에서 육체를 보호한다는 건 클로이아 본인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예 속성 변환으로 체내의 마나를 화 속성으로 변환하는 방법도 있지만…….’

클로이아는 마지막으로 떠오른 가정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속성의 ‘발현’이 아니라 체내 속성의 ‘변환’은 그냥 대마법사의 영역이니까.

“후우, 후우!”

“내가…… 헛것을 보고 있나?”

벌써 30미터다. 입에서 김을 내뿜으면서 네르하는 한 발짝 한 발짝 입구를 향해 착실히 나아가고 있었다.

‘저건 근성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내가, 이 내가 상대의 역량을 잘못 판단한 건가?’

클로이아는 멍하니 네르하의 신형이 멀어지는 걸 지켜보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는 줄도 모르고 네르하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도착했다.”

네르하가 비밀 논문 보관소의 입구, 그곳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하면서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푸른 서리가 껴 있는 네르하의 눈썹이 호선을 그렸다.

“내기, 내가 이겼다. 아직 시간, 지나지 않았지?”

“아? 아아!”

네르하의 선언이 있고서야 클로이아는 화들짝 놀라 시간을 확인했다.

갱신까지 남은 시간은 단 5초.

클로이아는 다급히 손을 움직여 만료 직전에 보관소의 시간을 갱신했다.

‘……후우!’

큰일 날 뻔했던 일을 수습하고 클로이아는 탈진하여 자리에 주저앉은 네르하를 바라보며 숨을 삼켰다.

‘어마어마한 재능이야.’

분명 네르하는 상식을 뛰어넘는 마나 제어 능력으로 조건을 클리어해 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 이 상황은 설명되지 않는다.

‘마법사가 전신의 마나를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 건 못해도 6레벨에 이르러서야 가능한 일.’

그 전까진 심장과 양손을 오고 가는 마나를 제어하는 것만으로도 벅차기 마련이니까.

거기에 더해.

‘5레벨에 해당하는 속박 마법을 고작 1에서 2레벨에 불과한 마나를 가지고 파훼했다면 저 녀석의 실제 제어 능력은 아마도…….’

오싹!

그 순간, 이전엔 상상도 못 했던 가정이 클로이아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설마 레벨을 올리는 걸 포기하고 마나 제어 능력 하나만을 위해 지난 모든 세월을 투자해 왔던 건가?’

레벨이 올라갈수록 마나의 제어 능력이 올라가는 건 상식이지만 반대로 윗단계의 술식을 습득했다 하더라도 그 술식을 발현할 수 있는 제어 능력이 없으면 있으나 마나 한 일이었다.

클로이아는 그런 식으로 오랜 시간 제자리걸음을 하는 마법사들을 수없이 보아 왔다.

‘더 위로 올라가기 위해.’

지난 시간 보아온 네르하의 두뇌는 결코 낙오자라 부를 만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입문자라는 잣대를 들이민다면 ‘천재’의 부류에 속했다.

낙오자란 오욕을 참으며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목표를 위해 인생을 걸고 거대한 포석을 둔 야심가.

“나는 라데우스의 가주가 될 생각이다.”

‘그게 진심이었다고?’

“이봐, 나 좀 힘든데……. 회복 마법 좀 써 주지?”

부들부들!

“아, 이런!”

주박 마법은 풀렸지만 그 여파는 여전히 남아 네르하의 육체를 괴롭히고 있었다.

클로이아는 순간, 자신의 추태를 자각하고는 다급하게 네르하를 향해 회복 마법을 퍼부었다.

―리커버리!

리커버리와 함께 기초적인 온열 마법이 시전되고 나서야 네르하는 서서히 육체에 감각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고작 이 정도도 버티지 못하고 골골대다니……. 굴욕적이군.’

정마대전 당시에는 이것보다 훨씬 가혹한 북해의 환경에서도 거뜬히 활동했었다.

‘역시 몸부터 어떻게 만들지 않으면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곤란해질……. 으음…….’

긴장이 확 풀리자 그 반동으로 급격하게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정신력으로 버틸 수도 있었지만 모든 상황이 종료된 지금, 딱히 그럴 만한 동기는 없었다.

흐릿한 시야 너머, 복잡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클로이아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네르하는 조용히 수마에 몸을 맡겼다.

* * *

“으, 으음…….”

네르하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일어났나요?”

“……그래.”

클로이아는 막 눈을 뜬 네르하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당황했던 감정은 이제 완전히 정리가 되었는지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로 되돌아와 있었다.

“솔직히 정말 놀랐습니다. 네르하 도련님, 당신이 정말로 그 주박을 깨고 내기에서 승리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어요.”

“그러냐?”

“잠든 사이 잠깐 몸을 살펴봤는데, 체내에 잠재된 마나의 절대치는 잘 봐줘야 3레벨이더군요. 딱히 숨겨 둔 아티팩트도 없었고…….”

“손버릇이 나쁘군.”

“그만큼 믿기 힘들었던 일이었다고 여겨 주시길.”

클로이아는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녀의 미소에서 네르하는 그녀가 무언가를 ‘결심’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주변 서고의 풍경을 바라보며 클로이아가 말했다.

“제 목표는 라데우스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전혀 의외의 목표에 네르하는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네 실력이라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저 혼자라면 그렇겠죠.”

“…….”

약간 체념이 섞인 말투. 그것이 의미하는 건 하나뿐.

“딸린 식구가 있었나.”

“네. 라데우스 가문에 목줄이 매인 제 일족들이 있죠.”

클로이아와 같은 푸른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특징인 북방 서리 일족.

북방에서 나오는 온갖 특산물과, 서리 일족 특유의 강인한 마법 실력은 라데우스 가문에 있어선 아주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다.

“가능하겠습니까?”

네르하는 피식 웃었다.

서리 일족의 자유가 억압된 배경에는 분명 라데우스의 가주, 혹은 직계 누군가가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가 연관되었든 자신이 가주의 자리에 오르면 모든 게 의미가 없어지는 가정이었다.

“좋아. 내가 가주 자리에 오르면 너와 너의 일족에게 자유를 주겠어.”

“자유만으로는 안 됩니다.”

“……응?”

클로이아의 표정은 단호했다.

“지난 10여 년간 개고생한 것에 대한 충분한 보상도 같이 주십시오.”

“…….”

“가능하면 보상은 제가 직접 골랐으면 좋겠습니다만.”

방금 전의 차가운 인상은 어디다 갖다 버리고 금전에 욕망을 숨기지 않는 웬 수전노가 자리하고 있다.

그, 뭐냐. 동방에서 온 친우 녀석이 이런 상황에서 ‘김칫국 마시네’라는 말을 자주 했었는데 지금이 딱 그 꼴이었다.

네르하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당연한 거지. 잘 챙겨 줄 테니 그건 걱정하지 말라고.”

“감사합니다. 그때 가서 딴소리하기 없기입니다?”

“너나 내 뒤통수 때리지 마.”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게 네르하와 클로이아의 계약은 이루어졌다.

네르하는 그녀와의 약속 직후, 기묘한 표정으로 자신의 뒤통수를 느끼며 말했다.

“그런데, 대체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정신을 차리자마자 클로이아가 말을 걸어왔기에 가만히 있었지만.

지금 자신의 뒤통수는 클로이아의 무릎에 닿아 있는 상황이었다.

그녀가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후후, 그 나이대의 남자는 ‘무릎베개’라는 걸 좋아한다고 들었는데요?”

굳이 이 나이대가 아니더라도 미인의 무릎베개를 싫어하는 남자는 없지만…….

“허벅지 안 아프나? 못해도 몇 시간은 그렇게 있던 것 같았는데.”

“확실히 슬슬 저리네요. 그러니 이제 일어나세요.”

“쩝.”

네르하는 살짝 아쉬움(?)을 느끼며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 * *

클로이아를 수하로 들인 이후에도 네르하는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이 서고에 머무르기로 했다.

애초에 하루 방문자가 많아야 다섯 명 이하인 이곳에선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본격적으로 수련이나 연구를 병행할 수 있었다.

“가져왔어요.”

카르안 라데우스의 논문을 분석하는 것 외에도 네르하는 본격적으로 마법에 입문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건 기본적인 1레벨 필수 마법 술식들, 그리고 이건 참고하면 좋은 속성 마법의 운용 노하우를 담은 추천 서적들이에요.”

“고맙군.”

원래라면 엄중한 감시 속에 대여가 이루어지는 것이었지만 클로이아는 라데우스의 직계는 아니더라도 대단히 뛰어난 마법사였다.

그런 만큼 가문 내에서도 권한이 제법 큰 편에 속했다.

물론 가문의 대소사에 간섭할 권한은 없지만 이런 식으로 타 서고에서 저레벨 마법서를 대여해 오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하아, 이런 식으로 남의 심부름이나 하는 처지라니.”

“힘든 시절 같이 고생해야 올라가서도 나누는 몫이 많아지지.”

“……그거, 돈 안 주고 사람 부려 먹으려는 사기꾼들의 단골 전용 멘트인 건 아세요?”

“그런가?”

클로이아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상계에 몸을 담지 않았던 네르하로서는 진심으로 한 말이었는데…….

아무래도 클로이아의 눈에 불신감만 심어 주는 결과가 된 것 같다.

“그래도 네 안목은 믿을 수 있지. 덕분에 내 성장은 훨씬 빨라질 거야.”

“입만 놀리지 말고 빨리 결과를 보여 주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곧 그렇게 될 거다.”

『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

사비연 퓨전 판타지 소설

(주)조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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