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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17화 (17/237)

17화

<기숙사에서의 일 (1)>

‘괜찮은 수업들이었어.’

이론 수업은 거의 여덟 시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바하레스 교수만이 아니라 다른 두 명의 교수가 추가로 들어와 강의를 진행했고, 네르하는 그들과의 수업을 통해 ‘기초’를 되짚는 시간을 가졌다.

‘아무래도 그들에게서 진짜 비전을 배우긴 어렵겠지만 이런 식으로 보편적인 이론을 배우는 것도 좋지.’

무공에도 수많은 유파(流派)가 존재하듯, 마법 역시 수많은 학파가 존재한다.

지금 이곳에 초빙된 교수들은 대부분이 타 학파의 마법사들. 라데우스의 후원을 받아 지금의 지위에 이른 자들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교수들이 후계자도 아닌 이들에게 학파의 비전을 푸는 건 무리가 있었다.

기숙사에 도착한 네르하는 금일 필기한 내용을 복습하기 전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라데우스 가문의 마법을 배우기 위해선 어떻게든 5레벨에 이르러야 하는데…….’

당연히 네르하에겐 대륙 최강의 마법학파이기도 한 라데우스 가문의 비전을 배울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다만 그 자격 조건이 5레벨이라는 점에서 아직 한참이나 먼 훗날의 일이었지만 말이다.

‘응?’

필기 마도구를 막 펼쳐 들려던 순간, 네르하는 갑자기 바깥이 시끄러워진 것을 느꼈다.

초저녁부터 무슨 소란인지 궁금해진 네르하가 방을 나서자마자…….

“하! 알바트란? 어디 듣도 보도 못한 삼류 가문 출신 나부랭이가 리브레히트 가문의 위광에 덤비느냐!”

“너야말로 역사를 제외하면 그다지 먹어 주지도 않는 명판 하나 붙잡고 언제까지 우려먹을 셈이냐?”

“뭐? 말 다 했어?”

“아직 할 말 더 남았다!”

‘개판이군.’

이제 막 첫날인데도 신입생들 간에 싸움이 났다.

아무래도 당사자 중에 한 놈은 이전, 네르하와 시비가 붙었던 알페온이란 놈으로 보이는데…….

문제는 시비가 붙은 게 둘로 그친 게 아니라 그 둘을 중심으로 이미 패거리가 만들어졌다는 게 더욱 큰일이었다.

“하찮은 남부의 원숭이들이!”

“동부의 사기꾼들이 뭐 어쩌고 저째?!”

거의 열 명 가까이 모여 으르렁거리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네르하는 한심하게 지켜보았다.

리브라에 들어올 정도면 적어도 마법적인 재능은 인정받은 셈인데 거기에 가문이란 배경까지 업고 있으니 기본적인 자존감이 하늘을 찔러도 이상하지 않았다.

거기에 지역감정까지 들어간다면?

‘지옥문이 열리겠군.’

네르하는 미련 없이 신형을 돌렸다.

무림에서도 ‘문파의 격’ 이상으로 출신 지방에 따라 차별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강남 무림과 강북 무림의 대립이 그랬고, 사천이나 감숙은 아예 중원으로 쳐주지도 않는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어이, 너희들. 이게 무슨 소란이지?”

네르하가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던 그때,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본 네르하는 방으로 들어가려던 것을 잠시 보류했다.

‘배커로군.’

라데우스 가문의 방계이자 어쩌면 이번 기수에서 ‘지위’ 면에선 네르하를 제외하면 가장 높을지도 모르는 녀석.

당연히 배커 역시 제크론과 함께 십여 명에 달하는 패거리를 이끌고 자리에 나타났다.

‘참 재주도 좋아.’

이제 첫날인데 뭔 수를 썼길래 저렇게 자기편을 만들었는지 그 정치력만큼은 인정할 만하다.

‘저놈들도 라데우스라는 이름을 짊어지고 있으니 알아서 잘 조율하겠지.’

서로 파벌을 만들어 싸운다 해도 결국엔 라데우스라는 품 안에 모인 이들이다.

저런 식으로 자존심 싸움이 되어버린 경우엔 누구 한쪽의 편을 들기보단 서로의 감정이 상하지 않게 중재가 필요했다.

‘그것도 아니면 바스톤, 저놈을 출격시키면 되겠군.’

네르하는 속으로 킬킬 웃었다.

바스톤은 배커의 뒤에서 여전히 거대한 떡대를 자랑하고 있었다.

죄다 꼬꼬마 수준인 저 판에 저런 근육이 나서면 그냥 반칙인 수준.

그렇게 배커와 제크론이 적당히 상황을 수습해 주리라 믿고 문고리를 잡으려던 찰나…….

“흥, 리브레히트 가문이 잘못했군.”

“뭐, 뭐라고!”

‘아니, 잠깐.’

아래에서 들려온 배커의 말에 네르하는 또다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대체 저 밑의 상황 때문에 몇 번이나 이 발걸음이 멈추는지 모르겠다.

“말을 들어 보니 먼저 시비를 건 쪽은 리브레히트 아닌가? 그쪽이 먼저 사과하고 끝내면 깔끔하겠군.”

“사과? 나보고 저 동부 놈에게 사과하라고?”

“잘못을 했으면 사과를 해야지.”

‘아이고, 두야…….’

네르하는 절로 몰려오는 두통에 이마를 짚었다.

물론 산맥 입구에서 겪었던 알페온이란 놈의 성격상 먼저 시비를 걸어도 이상할 게 없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었다.

밑에서 저놈들이 한 말을 계속 들어보니 딱히 누군가가 먼저 시비를 건 것이 아니라 마주치자마자 자연스레 충돌한 단순 쌍방 과실이었다.

‘어쩐지 수업 때부터 분위기가 이상하더니.’

저 알바트란 가문의 코펜이란 녀석은 낮에서부터 배커와 함께 붙어 다니던 놈이었다.

아주 혀에 기름칠을 하고 제대로 아부를 날리던데, 알페온의 변명을 제대로 들어주지도 않고 판결을 내리는 걸 보면 저놈이 배커의 마음에 꽤나 들었나 보다.

“이, 이익!”

라데우스의 인간인 배커가 코펜의 손을 들어주자 대번에 주변의 여론이 한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알페온은 필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아군을 찾았지만 누가 도와주기는커녕 애써 모은 추종자들도 하나둘씩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있었다.

‘이거 안 좋은데.’

리브레히트 가문은 사미르도 대륙에서 손꼽힌다고 평가했을 정도로 유서 깊은 명문가다.

당연히 라데우스의 최유력 조력자 중 하나이며, 그들의 인맥은 라데우스가 동방의 패권을 쥐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고 있었다.

‘저런 식으로 시작부터 적으로 만들어 버리면 나중엔 어떻게 하려고…….’

굳이 가문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앞으로 5년을 함께해야 하며 이제 막 얼굴을 알아가는 단계다.

앞으로 조별 과제나 외부 미션같이 손발을 맞춰야 할 때가 여러 번 찾아올 텐데, 시작부터 저런 식이면 최악의 경우 기수 자체가 공중분해될 수도 있었다.

“배커, 거기까지 하지.”

결국 네르하는 밑의 상황에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네르하?!”

“네르하 라데우스!”

느닷없는 네르하의 등장에 배커와 제크론, 그리고 상황에 엮여 있는 모든 신입생들의 이목이 네르하에게 쏠렸다.

별로 주목받고 싶지 않았던 네르하는 한숨을 내쉬면서 중재를 시도했다.

“내가 보기엔 서로 잘못한 것 같은데 이쯤에서 서로 넘어가는 건 어떠냐?”

“하! 네가 상황을 제대로 보기나 했나? 명명백백하게 저 리브레히트의 삼 공자가 먼저 시비를 걸었다고!”

“시비라? 물론 알페온이 먼저 말문을 열긴 했지만 노골적으로 길을 막고 뻗댄 건 그쪽이었던 것 같은데?”

“뭐, 뭐라?”

시비가 걸린 이유는 정말로 보잘것없었다.

‘길 막지 말고 비켜라’, ‘싫다. 내가 왜’, ‘니들이 막고 있어서 방해되는 거 모르냐?’, ‘모르는데? 그냥 돌아서 가라’.

놈들의 말을 종합해서 도출한 최초의 경유였다.

“게다가 알페온의 말도 제대로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한쪽 편만 들고 있는 모습은 보기 그렇군.”

나름 라데우스의 일원으로 중립을 표방하라는 충고였는데 배커에겐 영 다른 의미로 들린 모양이었다.

“네르하, 지금 뭘 믿고 내게 그딴 말을 지껄이는 거지?”

“뭐?”

“여긴 리브라다. 이곳에선 가문의 위광은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해. 오로지 실력만이 평가받는 장소일 뿐.”

“……아니.”

“그런 면에서 인재를 끌어모으는 것도 엄연히 실력에 속하지. 네가 우리 전부를 감당할 수 있겠나?”

……그게 그런 식으로 쓰는 말이 아닌 것 같은데?

배커의 신박한 개소리에 네르하는 순간, 넋을 놓았다.

일대일로 안 될 거 같으니까 이번엔 숫자로 다굴을 놓겠다라.

딱히 놈들이 무서운 건 아니었지만 폭행으로 인한 벌점은 무섭다. 이미 가산점을 딴 상황에서 배커 따위를 때려눕히느라 얻은 메리트를 잃는 건 좀 그렇고.

하지만 모두가 주목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말로 해결될 단계는 지났다.

“배커.”

“뭐, 뭐!”

“죽고 싶냐?”

오싹!

네르하와 눈을 마주친 배커는 순간, 자신의 등골에 소름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뭐, 뭐야?’

뭐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어째서인지 마치 목이 콱 막힌 듯 말이 새어 나오지 않았다.

한 발짝, 한 발짝. 네르하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지난번의 훈계로는 모자랐나 보지?”

“아, 으아!”

다리가 땅에 박힌 듯 움직이지 않고, 심장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느려지기 시작한다.

배커와 제크론은 순간, 죽음이라는 공포를 느꼈다.

살기(殺氣). 그것도 절대고수가 내뿜는 의형살기는 두 사람으로선 생전 처음 접하는 원초적인 공포일 것이다.

‘뭐, 뭐야. 이놈, 내가 알던 네르하가 맞나?’

‘지, 지난번에 봤을 땐 이렇지 않았는데!’

지난번의 패배를 기습으로 인한 불행 정도로 치부했던 두 사람이었다.

뭐, 그 추측은 사실, 어느 정도 사실이었지만 지금 네르하의 경지는 그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덜덜덜덜!

주변 신입생들은 배커와 제크론이 왜 고양이 앞의 쥐처럼 갑자기 몸을 떠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네르하가 한쪽 팔을 올리며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말로 해서 안 된다면 적당히 타일러 줄 수밖에.”

“거기까지, 하십시오.”

“……음?”

말 그대로 녀석들을 ‘적당히’ 타이르려던 찰나, 네르하와 두 녀석 사이를 가로막은 존재가 있었다.

“바스톤이군. 잘 지냈나?”

네르하는 바스톤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바스톤은 굳은 표정으로 배커의 앞에서 결사의 자세로 주먹을 쥐고 있었다.

‘역시 이놈은 물건이라니까.’

네르하의 살기는 어디까지나 배커와 제크론에게 집중했지만 그 누구도 알페온 때처럼 두 사람을 지키려고 들지 않았다.

하지만 유일하게 바스톤만이 배커의 앞으로 튀어나오며 살기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폭력은 학사 규칙에 어긋납니다. 살기 역시 폭력의 한 종류. 부디 거두어 주시길 청합니다.”

당돌하게 요구를 하는 바스톤의 모습에 네르하는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나도 딱히 해코지할 마음은 없었다. 굳이 그럴 가치가 있는 놈들도 아니고.”

“이, 이이익!”

“하지만 바스톤, 네 말을 한번 들어는 봐야겠군. 너는 알페온과 코펜, 이 두 놈들 중 누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나?”

“…….”

“딱히 뭐라 할 생각은 없으니까 정직하게 대답해 보라고.”

네르하는 진심이었다. 물론 대답 여하에 따라 마음속에서 바스톤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네르하는 바스톤의 말을 끝으로 이 상황을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

잠시 입술을 깨물던 바스톤은 결정을 내렸는지 어렵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딱히…… 누군가가 잘하고, 잘못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렇지?”

바스톤은 배커의 뒤에서 모든 걸 지켜봤을 테니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판단을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자기 주인인 배커의 신뢰도에 먹칠을 하는 게 되겠지만.

“좋아. 배커의 수하인 바스톤이 인정했으니 이번 건은 서로 좋게 좋게 넘어가는 거로 하는 게 어때?”

“…….”

잠시 주변이 조용해진 상황에서 알페온이 말을 더듬거리며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네르하 라데우스의 말을 이, 인정한다.”

알페온의 뺨은 살짝 붉게 물들어 있었다.

자존심 강한 녀석이 먼저 숙이고 들어가는 것이 굴욕이라고 여길진 몰라도 여기서 네르하의 제안이 자신에 대한 구명줄이라는 걸 알페온이 모를 리가 없었다.

만약 모르고 또 천방지축으로 날뛰었다면 이번에야말로 정말 본격적으로 손을 봐줄 생각이었지만.

“……저도 인정합니다.”

분위기가 이렇게 흘러가자 코펜 역시 대세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조용해진 분위기 속에서 네르하가 선언하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 있는 모두가 앞으로 5년이나 마주 볼 사이인데 첫날부터 얼굴을 붉혀서야 쓰나? 배커가 한 말 중에 맞는 게 있다면 이곳은 너희가 왕 노릇 하던 영지가 아니라 리브라라는 점이다.”

네르하는 좌중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가문의 힘은 여기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아. 중요한 건 오로지 실력뿐. 서로 사이좋게 지내라고는 말하지 않겠지만 무언가를 증명하고 싶다면 쪽수로 목소리를 높이지 말고 실력으로 증명해라.”

그렇게 네르하가 말을 마치자마자.

“네르하아아아아!”

“……응?”

갑자기 배커가 괴성을 지르면서 네르하에게 달려들었다.

『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

사비연 퓨전 판타지 소설

(주)조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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