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기숙사에서의 일 (2)>
“네르하아아아아!”
“배커 님!”
바스톤을 거칠게 밀쳐 낸 배커는 그대로 손에 마력을 모으며 네르하에게 달려들었다.
“안 돼! 배커!”
당황한 제크론이 다급히 뛰쳐나와 배커를 말리려고 했다.
단순한 말싸움이나 주먹다짐이라면 모를까 마나를 이용한 순간 배커는 선을 넘게 된다.
게다가 여기서 네르하가 다치거나 했다간 배커는 단순히 벌점으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제크론이 뭘 하기도 전에 이미 배커는 네르하에게 접근해 있었다.
“그래. 이런 식으로 실력으로 증명하면 좋지.”
물론 지금은 선을 좀 많이 넘었지만 말이다.
콱!
네르하는 배커가 손을 뻗어 마력을 폭발시키려는 순간, 그대로 금나수법을 이용해 배커의 손목을 잡아챘다.
“헉!”
“배커, 너는 좀 차분함이라는 걸 알아야 할 필요가 있어.”
배커가 손에 모은 마력을 터트리기도 전에 네르하는 그대로 검지와 중지를 들어 빠르게 몇 군데의 혈도를 쳤다.
툭툭툭툭!
“……아.”
점혈이 끝난 순간, 배커의 표정이 눈에 띄게 흐려졌다.
그리고 뭔가 녀석의 몸통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린 순간, 배커의 신형이 그대로 앞을 향해 고꾸라졌다.
털썩!
“뭐, 뭐야.”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기, 기절한 건가?”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네르하를 향해 달려들던 배커가 갑자기 쓰러지자 주변에 있던 신입생들은 어리둥절하며 서로를 마주 보기 시작했다.
그만큼 지금 눈앞에 일어난 상황은 너무나 황당하고 이상한 일이었다.
그때였다.
“이게 지금 무슨 소란이냐!”
기숙사의 입구 바깥에서 서릿발 같은 호령이 들려왔다.
아직 서로의 이름도 잘 모르는 신입생들이었지만 이 목소리의 주인만큼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사감이다!”
“야, 튀어!”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신입생들이 재빨리 발을 빼려고 하였지만…….
“그만! 도망가는 놈들은 한 놈도 남김없이 기숙사에서 퇴출이다!”
사감의 그 한마디에 모두가 자리에서 우뚝 멈출 수밖에 없었다.
말이 기숙사에서 퇴출이지 설산 한가운데 세워진 이곳 리브라의 기숙사에서 나가면 대체 어디서 지내라는 건가?
저 말은 그냥 리브라에서 쫓아낸다는 말과 진배없었다.
제1 기숙사 사감이자 6레벨 초입에 이른 마법사인 에드발은 어정쩡하게 서 있는 신입생들을 향해 싸늘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첫날부터 아주 개판이군. 이게 뭔 소란이지?”
“사소한 언쟁이 있었을 뿐입니다, 사감님.”
에드발에 말에 대답한 이는 다름 아닌 네르하였다.
“……사소한 언쟁?”
“네. 그 언쟁은 이미 모두 해결되었고, 이곳에 있는 신입생들은 언쟁의 결론에 모두 납득하고 막 해산하려던 참이었습니다.”
“해산하려던 참이었다?”
네르하의 변명 아닌 변명에 에드발은 헛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을 들었다.
“그럼 내 눈앞에 쓰러진 저 녀석은 뭐지?”
그 헛웃음이 분노로 변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에드발은 표정을 구기며 네르하를 노려보았다.
“분명 기숙사에서 폭력 행위는 특별 단속 대상이라고 했을 텐데? 첫날부터 리브라에서 퇴출당하고 싶은 것이냐, 네르하 라데우스?”
에드발은 이미 배커를 쓰러뜨린 범인을 네르하로 단정 짓고 있었다.
범인으로 지목되었음에도(사실, 범인이 맞지만) 네르하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싱긋 웃으며 이렇게 반문했다.
“폭력 행위라뇨.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오호, 꽁무니를 빼시겠다?”
“그 말씀은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전 폭력을 행사한 적이 없으니까요.”
“아, 그래?”
“네. 일이 끝나고 해산하려던 찰나, 배커가 갑자기 기절했습니다. 휴게실이 소란스러워진 건 그 때문이었고요.”
에드발은 네르하에게서 시선을 돌려 주변 신입생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시선을 피해야 할 녀석들이…… 오히려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아한 기색을 내보이고 있다?
‘응? 뭐지?’
찔리는 게 있다면 시선을 마주칠 수 없다. 설사 마주치더라도 금방 탄로 나기 마련이다.
만약 네르하 라데우스가 정말로 폭력을 썼다면 그의 권력에 굴복한 다른 신입생들은 조용히 자신의 시선을 피해야만 정상이었다.
그런데 신입생들은 하나같이 뭔가 헷갈리는 기색으로 자신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뭐야. 정말이야?’
사감인 자신을 앞에 두고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는 자도 있겠지만 모두가 그럴 수는 없다.
에드발은 반신반의하며 걸음을 옮겨 기절한 배커의 모습을 살폈다.
‘확실히 타격에 당한 흔적은 없군.’
피부가 빨갛게 변했거나 멍이 든 흔적은 없다.
사타구니를 가격당해 기절했다고 보기에도 뭐한 게, 배커는 아주 편안한 표정으로 잠든 듯이 기절해 있었다.
‘정말로 혼자 기절한 건가?’
에드발은 배커의 몸 상태를 한참이나 살펴보고 나서야 배커의 몸 안에서 흐르는 기묘한 마나의 움직임을 발견했다.
움찔!
‘이, 이게 대체!’
체내에 마나가 흐르는 몇몇 통로가 인위적으로 막혀 있다.
그것도 아주 교묘한 방식으로 막혀 있어서 직접 마나를 흘려 탐지하지 않는 이상 겉으로는 절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에드발은 경악한 표정으로 네르하를 바라보았다.
‘이, 이놈. 정체가 뭐지?’
이런 식으로 타인의 체내에 마나를 주입해 상대를 제압하는 방법은 아무나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마나의 운용이 달인의 경지에 달해야만 습득할 수 있으며, 라데우스에서도 잠입과 첩보 분야에서 경지에 이른 일부 베테랑들만이 사용한다고 알려진 기술이었다.
그런 에드발의 시선을 마주하며 네르하가 은근한 기색을 담아 물어보았다.
“어떻게, 살펴보신 결과는 어떠신지요?”
“으, 으음!”
확실히 이건 폭력을 행사하였다고 볼 수는 없었다.
적어도 겉으론 아무런 문제도 없었으니까.
다만 이런 식으로 빠져나가는 유형은 에드발이 기숙사 사감을 맡은 이래 처음이었다.
“별문제는…… 없군.”
하지만 그렇다고 아닌 걸 맞는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렇군요. 그럼 이만 해산해도 괜찮을까요? 물론 배커는 의무실로 보내야겠지만요.”
“그, 그래라.”
에드발은 얼떨떨한 기색으로 네르하의 요청을 수락했다.
그렇게 한바탕 소란이 지나갔고.
‘네르하 라데우스라면 분명 라데우스 내부에서도 유명한 낙오자. 분명 그러할 텐데…….’
2층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는 네르하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에드발은 인상을 썼다.
‘저건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괴물이지?’
* * *
휴게실에서의 소동이 끝나고 며칠이 지났다.
첫날 신경전을 벌이며 충돌한 알페온과 코펜은 그 이후로 별다른 사고를 치지 않고 조용히 지내기 시작했다.
다만 좀 변화가 있었다면.
“하하하! 네르하 님, 식사하러 가십니까?”
“……어어.”
“하하하! 식사는 역시 격이 맞는 자들끼리 먹어야 제맛이죠! 같이 동행하겠습니다!”
“…….”
며칠 전 편들어 준 일로 인해 알페온이 네르하에게 친한 척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 친한 척이 아니라 진심으로 친해지고 싶다는 얼굴로 다가와서 어떻게 밀어내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론 수업이 끝나고 식사를 위해 바깥으로 나가자마자 알페온이 쫄래쫄래 따라와 옆에 붙었다.
“네르하 님께서 보인 그 당당함과 강인함! 가문의 위광에 구애받지 않는 자신만의 힘! 제가 지금까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네르하 님의 모습을 보며 절절히 깨달았습니다!”
“…….”
“저 역시 지금까진 리브레히트 가문의 이름에만 의존해 왔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물론! 가문의 이름에 걸맞은 실력을 쌓아왔다 자부하고 있지만 역시 네르하 님만큼은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죠.”
“그, 그만해…….”
속사포처럼 떠드는 알페온의 모습에 네르하는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대체 무슨 감정의 변화가 있었는지 녀석은 완전히 네르하의 추종자가 되어 버렸는데, 정작 당사자로선 180도 돌변한 알페온의 모습에 영 적응이 되지 않을 뿐이었다.
“그래서 말이죠. 학사에선 벌써부터 조별 과제를 낸다는 이야기가 들리고 있습니다만.”
게다가 의외로 쓸모 있는 정보를 들고 올 때가 있어 네르하는 반쯤은 포기한 채 알페온을 곁에 두었다.
“조별 과제?”
“네! 그, 가문 이야기를 계속해서 부끄럽지만…… 저희 가문과 연결되어 있는 교수와 교관님들로부터 얻은 정보이니 확실할 겁니다.”
리브레히트 가문과 연결된 이들의 지위가 낮을 리는 없을 테니 알페온이 들고 온 정보의 신빙성은 아마 100%에 가까울 것이다.
“조별 과제라…….”
“네. 불합리의 극치를 맛볼 수 있는 수업이기도 하죠!”
“……?”
네르하는 알페온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우뚱했다.
과거 무림인 시절, 조별 ‘과제’는 해 보지 못했어도 조별 ‘임무’는 많이 수행해 보았던 네르하였다.
그때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자면 구성원들이 하나로 뭉치지 못하면 확실히 단체의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합리의 극치라는 말을 쓸 정도까진 아니었던 거로 아는데?
“리브라에서의 조별 과제는 조금 특별하죠. 한번 조가 배정되면 그 해가 끝날 때까지 계속 유지되니까요.”
“그래?”
“네. 게다가 배정 자체가 무작위인 만큼 누구와 한 팀이 될지는 당일이 돼야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능력이 심각하게 달리는 조원이 배정되면 정말로 골치가 아파지죠.”
“흐음…….”
확실히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다른 조원들에 대한 부담감이 커지니 불합리라는 말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뭐, 뭐든 겪어 봐야 아는 거겠지.”
“하하, 그 말이 옳습니다.”
‘능력이 모자란다면 키우면 되는 문제고. 의욕이 없다면 두들겨 패면 되겠지. 감히 내 앞에서 농땡이를 부리는 놈은 없을 테니까.’
뚜둑!
조별 과제의 가장 큰 문제점을 어느새 자연스레 해결한 네르하였다.
* * *
그렇게 며칠 지나지 않아.
알페온의 말처럼 리브라의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한 조별 과제가 진행되었다.
‘4인 1조라…….’
총인원 120명. 즉, 30개의 조로 시작되는 조별 과제의 주제는…….
‘‘마법 시약을 만들기 위한 재료 수색’이라?’
확실히 마법사다운 주제이긴 하지만 또한 뭔가 애매한 주제였다.
어떤 시약을 만드는지는 몰라도 재료의 범위가 너무 광범위한 탓이었다.
‘설마 이 팔라레스트 산맥을 샅샅이 뒤져서 재료를 찾아오라는 소린가?’
학사에서는 재료를 찾는 감응력과 관찰력, 그리고 수색 실력을 본다고 하였지만 네르하는 뭔가 공개하지 않은 다른 이유가 더 있을 거란 생각을 하였다.
네르하는 공고문에 게재된 자신의 이름과 조원들을 확인했다.
[14조. 네르하 라데우스, 제레온 파멜, 소니아 이즈넨, 루델 아그라혼.]
‘전부 모르는 이름이군.’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름과 생김새 정도는 안다.
다만 통성명을 하지 못했을 뿐.
‘그나마 아는 놈들은, 전부 흩어졌나?’
배커, 제크론, 바스톤, 루시아, 알페온 등등…… 어느 정도 면식이 있는 녀석들은 전부 서로 다른 조에 배정되었다.
뭐, 누가 배정되었든 한 조가 되었다면 이제 1년을 동고동락할 사이가 된 셈이다.
네르하가 그들과 어떻게 첫인사를 나누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때였다.
“간만입니다, 네르하 도련님.”
“루시아?”
여전히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묶고 다니는 금발의 소녀 루시아가 네르하의 앞에 나타났다.
“오랜만이군. 이렇게 제대로 대화를 나누는 건 한 이 주 만인가?”
“네. 아무래도 서로 일과 때문에 바쁘니까요.”
“그래서 무슨 일이지?”
루시아가 갑자기 찾아온 건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흥미롭다는 네르하의 시선을 마주하며 그녀가 네르하를 찾아온 이유를 밝혔다.
“우리, 동맹을 맺지 않겠습니까?”
『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
사비연 퓨전 판타지 소설
(주)조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