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조별 과제 (1)>
뜬금없는 루시아의 제안에 네르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맹? 그건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입니다. 이번 조별 과제에서 우리 조와 그쪽 조가 동맹을 맺는 겁니다.”
“굳이 그래야 할 이유는?”
“당연히 시약의 재료 때문이죠.”
그 순간, 네르하는 루시아가 완성된 시약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와 동시에 자연스레 그녀가 동맹을 제시한 이유가 떠올랐다.
“한정된 재료가 있는 건가?”
“역시, 저처럼 눈치가 빠르시네요.”
루시아는 배시시 웃었다.
하지만 네르하는 그런 루시아를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긍정은 이번 조별 과제의 난이도가 급상승한다는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시험을 치르는 조의 수는 무려 30개에 달합니다. 게다가 아무리 팔라레스트 산맥이 넓다 해도 신입생 수준에서 갈 수 있는 곳은 한정적이며 희귀 재료의 수량 또한 한정되어 있죠.”
“그래서? 우리끼리 동맹을 맺고 그 희귀 재료를 독점하자는 건가?”
“설마요. 그럴 가능성도 적고, 그래선 안 되죠.”
그런 짓을 했다간 나머지 모든 조의 어그로를 모조리 끌어 버릴 거다.
“그럼?”
“재료를 습득한다 해도 서로 뒤통수를 치지 말자는 거죠.”
그 말에 네르하는 잠시 고개를 돌려 게시된 공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내용을 끝까지 다시 정독한 후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과연…… ‘강탈’을 금지한다는 룰은 없군.”
“네. 맞습니다.”
설사 희귀 재료를 얻는다고 해도 그걸 지킬 능력이 없으면 말짱 도루묵.
‘역시 단순히 찾는 것만으로 끝날 리가 없지. 쉽게 쉽게 가진 않는군.’
고위 전투원을 육성하는 것이 목적이니만큼 리브라는 훈련생들이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수없이 경쟁을 붙일 것이다.
게다가 조별 과제라고는 해도 실전 수업이니 기관에선 어느 정도의 무력 충돌을 용인할 가능성이 컸다.
루시아는 은근한 기대를 담아 네르하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거절하지.”
“…….”
설마 바로 거절할지는 몰랐는지 루시아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네르하는 코웃음을 치며 거절의 이유를 말했다.
“아마 ‘재료의 강탈’ 역시 시험의 한 요소로 설정해 둔 모양인데 이렇게 사전에 작당 모의를 하는 건 반칙이지. 그리고 그런 건 별로 재미가 없다고.”
“강탈을 방지하기 위해 동맹을 맺는 것도 전략의 하나라고 봅니다만.”
“응.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말했잖아? 재미가 없어.”
“…….”
네르하는 입을 꾹 다문 루시아를 웃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리브라가 이런 계획을 짠 이유는 찾기 어려운 재료를 찾아가면서 함정을 파는 상대의 계략을 파악하고, 또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겪길 바랐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렇습니까?”
“다른 여럿이 사전에 작당해서 재료를 독점할 수도 있긴 한데 내 생각엔 리브라가 그런 꼴이 나게 두고 보지는 않을 거라고 봐. 아마 방지 대책 정도는 있겠지.”
“…….”
“그러니 문제가 생기면 그때 생각해 보자고. 이건 온갖 변수를 생각해야 하는 실전이 아니니까. 즐길 수 있을 때 충분히 즐겨 둬야지.”
“즐긴다, 입니까?”
“여유는 중요한 법이야. 여긴 어디까지나 교육기관. 그리고 우린 훈련생 신분이잖아?”
루시아는 기묘한 눈으로 네르하를 바라보았다.
마치 전장에서 수십 년 구르다 은퇴한 노병을 보는 기분이다.
“그럼 실습 때 보자고.”
손을 흔든 네르하는 루시아를 뒤로하며 사라졌다.
날이 저물진 않았지만 여전히 할 일은 많다.
네르하의 시간은 여전히 하루하루가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 * *
그렇게 다음 날.
지도 교수인 바하레스 교수의 인도에 따라 리브라 외곽에 설치된 임시 캠프에서 네르하는 자신과 함께 배정된 조원들을 만나게 되었다.
“네르하 라데우스다.”
“소니아 이즈넨이에요! 반가워요, 여러분!”
“제레온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루, 루델 아그라혼입니다…….”
조원 중 홍일점이자 밝은 성격의 소니아, 검붉은 머리카락이 인상적이면서도 조용한 분위기를 풍기는 제레온. 마지막으로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으로 보이는 루델이 합류했다.
“흠, 안내문을 보면 조장을 먼저 뽑으라고 하는데…….”
네르하는 주변을 둘러보며 눈을 부라렸다.
“내가 조장을 맡으려고 하는데 달리 입후보할 사람 있나?”
“그, 만약 입후보하면 어떻게 되나요?”
루델이 살짝 손을 들어 질문을 했다.
네르하는 상큼하게 웃으며 답해 주었다.
“나와 피의 혈투를 치르게 되겠지.”
“명령만 내려 주세요, 조장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제레온과 루델은 남자 기숙사 휴게실에서 네르하가 배커를 일격에 제압한 사건을 알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배커가 알아서 고꾸라진 것으로 보였지만 자리에 있던 대다수는 네르하가 모종의 수단을 써서 배커를 쓰러뜨렸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소니아 역시 남자 쪽 인맥으로 어느 정도 그 사실을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조장의 자리를 쟁취한(?) 네르하는 조별로 나누어진 팸플릿을 펼쳐 들었다.
‘설마 정말로 팔라레스트 산맥을 뒤적거려야 할 줄이야.’
팸플릿에는 스무 가지에 달하는 마법 시약의 재료가 적혀 있었다.
“기한은 3일. 그 안에 어떤 수업이나 일정이 없는 걸 보면…….”
“온전히 재료를 찾는 데 집중하란 소리군요.”
말끝을 흐린 네르하의 뒷말을 제레온이 받았다.
‘확실히 조장에겐 무엇보다 능력이 중요한 과제야.’
조원을 분산시킬 것인지, 합동해서 행동할 것인지.
조원의 능력과 컨디션을 파악해 조사 시간을 분배하고, 재료의 위치와 희귀도를 분석해 동선의 최적화 역시 고려해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학사 측에서 몇 가지 재료는 발견하기 쉽게 인위적인 장소에 심어 놓았다는 건데요…….”
“반대로 말하면 나머지 몇 가지는 경쟁을 통해 구해야 한다는 소리군.”
“그렇죠. 골치가 아프네요.”
또 특이한 것이 하나 있었으니.
팸플릿에 표기된 재료를 전부 모을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시약 완성에 의한 재료 중에 ‘취사 선택’이 가능한 재료가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아마 여기가 승부처가 아닐까 싶어요.”
소니아 이즈넨이 해당 항목을 손으로 짚으며 의견을 내었다.
“취사 선택이 가능한 재료의 경우 두 가지 가정을 할 수 있어요. 수량이 한정되어 있거나, 아니면 둘 중 한쪽의 입수 난이도가 극악이거나.”
“입수 난이도가 극악일 경우?”
“음, 어디까지나 제 추측이지만, 완성된 시약의 ‘질’에 영향을 주지 않나 싶어요.”
“굳이 질 좋은 시약을 완성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모르죠. 혹시 완성된 시약을 우리에게 지급할지도……. 설사 아니더라도 선택지를 준 의미는 반드시 있을 거로 생각해요.”
네르하는 이것저것 의견을 주고받는 팀원들을 바라보며 남몰래 미소를 지었다.
‘운이 좋군.’
이런 식으로 조별로 임무가 부여되었을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조원의 ‘열의’였다.
가장 최악인 것은 능력과 관계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는 자들.
결과물의 질에 상관없이 무언가를 이루려면 서로 간의 의견을 조합하든 충돌하든 의견의 교류가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다행히 네르하와 함께하는 조원 모두가 이번 조별 과제를 성공적으로 해내기 위해 강하게 열정을 불태우고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쓸 만하겠어.’
네르하는 조원들의 대화를 지켜보면서 녀석들의 능력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단순히 기도만으로 보면 네르하를 제외한 조원들은 리브라에 입소한 신입생 중에서도 전부 하위권에 속했다.
아마도 네르하가 라데우스의 직계인 점과 그것을 참작한 기대감으로 인해 이런 편성이 되지 않았나 추측되지만 진실은 모를 일.
‘앞으로 이 녀석들을 어떻게 굴려서 단련시킬까?’
오싹!
‘뭐, 뭐지?’
한창 열심히 토론을 진행하던 조원들은 어째서인지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 * *
조별 과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20명에 달하는 신입생들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일제히 리브라의 성문을 나섰다.
겉으로 보면 보호자나 지도 교수 없이 학생들만 내보내는 위험천만한 일로 보일 수 있었다.
신입생 중엔 그때를 노려 타 세력이 습격해 오면 안전이 급격히 취약해진다 생각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네르하는 벌써부터 곳곳에 잠입해 있는 실력자들의 존재를 느끼며 실소를 지었다.
‘과잉보호가 따로 없군.’
네르하는 저 멀리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큼지막한 바위 구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겉으로 보기엔 인기척이라고는 발견할 수 없었지만 네르하의 이목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그 바위에서 은신 마법을 펼치고 있는 ‘클로이아’가 네르하를 향해 입을 뻐끔거렸다.
‘화. 이. 팅!’
그런 클로이아의 응원을 마주한 네르하는 활짝 웃으면서 답해 주었다.
‘오. 케. 이!’
‘……헉!’
클로이아는 순간, 네르하와 눈을 마주치자 심장이 멎을 만큼 놀라워했다.
홱!
대번에 바위 뒤에 숨은 클로이아는 오른손으로 벌렁거리는 심장께를 가리며 필사적으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설마하니 네르하가 자신의 은신을, 그것도 이 거리에서 꿰뚫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탓이었다.
‘서, 서, 설마 그걸 본 거야?’
나름 장난삼아 한 응원이었는데 아주 잠깐 마주친 눈동자와 저 입 모양을 보면 빼박이다.
‘어, 어떻게?’
당연한 말이지만 그녀가 여기 있다는 건 그녀 역시 신입생들을 보호하기 위한 보호자 겸 감시자로서 차출되었다는 뜻이었다.
당연히 그들의 이목에 걸리지 않게 적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유사시를 대비하는 일을 맡았는데…….
“뭐야, 저 새끼 저거. 설마 널 알아차린 거야?”
클로이아의 곁에는 파괴학 당담 교수, 레이첼 루비아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레이첼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클로이아를 노려보았다.
“네 은신 마법은 곁에 있는 나도 쉽게 알아차리기 힘든데? 너 설마 나 몰래 저놈한테 텔레파시 보내는 법이라도 알고 있는 거야? 설마 첫날 수업에서도…….”
“그럴 리가 없잖아요!”
클로이아는 억울한 기색을 잔뜩 담아 소리를 빽 내질렀다.
“그런 걸 발명했으면 내가 여기 있겠어요?! 마탑이나 제국 학술회에 자료 발표하고 부귀를 독식하겠지!”
“하긴, 그렇긴 하겠다.”
6레벨의 마법사가 바로 근처에 있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할 텔레파시 마법이라…….
그런 게 존재했으면 대륙의 모든 마법사 학회가 발칵 뒤집어질 것이고, 라데우스 가문은 그 비전을 손에 넣기 위해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엔 저 도련님이 실력으로 네 은신을 알아차렸다는 건데.”
레이첼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게 가능해?”
“나도 몰라요.”
리브라에 입소하기 전에 보았던 네르하의 마법적 발전은 분명 어마어마하게 놀라운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건 처음 마법을 입문하는 견습으로서의 관점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실제 전투력을 평가하는 ‘전사’로서의 역량은 그냥 성장했다고 퉁칠 수준이 아니었다.
‘이런 미친, 대체 그사이에 도련님한테 뭔 일이 있었던 거야?’
클로이아가 욕설이 섞인 칭찬을 하는지도 모른 채 네르하는 조원들을 이끌고 팔라레스트 산맥을 오르기 시작했다.
『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
사비연 퓨전 판타지 소설
(주)조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