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조별 과제 (3)>
설마 이곳에서 루시아를 마주칠 줄은 몰랐는지 네르하와 다른 조원들은 경계와 호기심이 반쯤 걸친 모습으로 루시아를 마주했다.
네르하는 루시아의 현 상태를 보며 피식 웃었다.
“별로 좋은 일을 겪은 것 같진 않군.”
루시아의 옷은 진흙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곳곳에 핏자국으로 추측되는 검붉은 흔적이 있어서 무슨 일을 겪고 왔는지 바로 짐작이 간다.
하지만 의외로 루시아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딱히 위험하진 않았습니다.”
“하긴, 마법을 쓰지 못한다는 규칙이 있으니 널 어찌할 수 있는 학생은 그다지 존재하지 않겠지.”
꿈틀!
뭔가 못 들을 말을 들었는지 루시아의 눈가가 살짝 꿈틀거렸다.
하지만 네르하가 딱히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다른 녀석들의 도움 없이 자신처럼 자력으로 리브라에 도달했으니 루시아는 충분히 이런 말을 들을 자격이 있었다.
“그래서 이곳에 온 목적은? 전에 말했던 동맹 제안인가?”
의외로 루시아에게서 들려온 대답은 부정이었다.
“아뇨. 그 말은 제가 싸우기 전에 들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습니다.”
“그럼? 조원들도 내버려 두고 혼자서 이곳으로 온 이유가 뭐지?”
뭔가를 제시하려고 찾아왔나 싶었지만 루시아는 의외로 네르하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습니다. 저희 조는 가장 중요한 재료를 제외하고 전부 모았으니까요.”
루시아의 말에 네르하의 곁에 있던 조원들이 화들짝 놀랐다.
“저, 전부 모았다고! 어떻게?!”
그 대답은 루시아가 아닌 네르하의 입에서 나왔다.
“역으로 빼앗았겠지. 멍청하게 바위에 몸을 부딪치는 계란들에게.”
“맞습니다만…… 그래도 제가 바위에 비유되는 건 좀 실례인 것 같군요.”
루시아는 살짝 입술을 비죽이며 불만을 토해 냈다. 아무리 꾸미는 데 관심이 없어도 그 역시 소녀였으니…….
네르하도 그 사실을 깨닫곤 살짝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거 실례. 그럼 독이 든 꽃인지도 모르고 모여든 날파리들에게.”
“……좀 전보단 낫습니다만 비유를 못 하시는 건지 저에게 악의가 있으신 건지 모르겠군요.”
“설마. 난 너를 꽤 높이 평가하고 있는데?”
“그럼 전자겠군요. 연습 좀 하십시오.”
루시아의 무례에도 네르하는 피식 웃으며 넘어갔다.
네르하는 재능과 열정이 있는 자에겐 상당히 관대한 편이었다.
“그래. 원점으로 돌아와서, 지나가던 길이면 최종 목적지는 어디지?”
“저곳입니다.”
“…….”
루시아의 손가락이 향한 방향에는 현재 높이보다 수백 미터는 높은 거대한 ‘절벽’이 존재하고 있었다.
소니아가 멍한 표정으로 입을 뻐끔거렸다.
“지금 저길…… 간다고요?”
“마지막 재료인 스노우 폴로피아가 자생하는 곳은 이 근방에선 아마 저곳 너머가 유일할 가능성이 큽니다.”
“무, 물론 그 생각에 동의하긴 하지만.”
말문을 잃은 소니아를 뒤로하고 네르하가 말을 이었다.
“확신은 아니군.”
“그래도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곳은 저곳이죠.”
그나마 완만한 지대인 이곳과는 다르게 저곳은 경사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절벽이었다.
“다른 조원들은 아예 가능성이 없으니 혼자라도 도전할 셈이로군.”
“네. 맞습니다.”
네르하는 루시아가 말한 저 절벽의 등반 가능성을 점쳤다.
거대한 U 자 계곡을 넘어 저 산에 접근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게다가 눈으로 어림잡아 잰 절벽의 높이는 약 800m 정도.
‘하지만 천천히 도전한다면…… 가능은 하겠군.’
어지간한 경공의 고수가 아닌 이상 쉬지 않고 단번에 오르기엔 힘든 높이었지만 그래도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다른 이들이라면 충분한 장비를 갖춰야 하겠지만…… 응?’
네르하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아무리 봐도 루시아는 학사에서 지급한 기본적인 등반 장비밖에 갖추고 있지 않았다.
“이대로 올라갈 건가?”
“네. 그렇습니다만?”
“힘들 텐데?”
네르하의 말에 루시아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저런 절벽 정도야 익숙합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요.”
‘호오?’
나이대를 고려하면 저런 등반 경험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게다가 그녀의 예상되는 강함을 고려하면…….
“사람을 꽤나 혹독하게 굴리는 명문에서 자랐나 보군.”
흠칫!
루시아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왜 그러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루시아의 특이한 반응에 네르하는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아무래도 출신을 숨기고 싶어 하는 것 같군.’
그런 기색을 풍기는 것치고는 너무 대놓고 티를 내는 경우가 많아서 헷갈리지만 말이다.
네르하가 그런 생각을 할 때, 귓가에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우, 저 사람하고 말을 섞기만 하면 뭔가가…….”
“응? 방금 뭐라고 했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작게 중얼거린 말까지 간파당한 루시아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무, 무슨 귀가 저렇게 예민해?’
‘본가’의 어지간한 사람들보다 훨씬 예민한 것 같다.
루시아가 입조심을 되뇌며 기합을 넣고 있을 때.
“같이 가지.”
“……네?”
뜬금없이 네르하가 동행을 요청해 왔다.
“혼자 등반하긴 심심할 거 아닌가?”
“그런 이유로요?”
“사실, 우리도 그 재료만 남았거든. 확신이 없어도 하루 시간이 남았으니 도전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지.”
사실, 나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해야만 한다.
소니아의 조언을 통해 재료 면면의 효험을 살펴본 결과, 그 결과물은 자신들에게 지급될 가능성이 매우 컸으니까.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루시아가 갑자기 처음 듣는 정보를 뱉어 내었다.
“하지만 괜찮겠습니까? 네르하 도련님, 당신 정도라면 충분히 교관들과 교섭해서 재료를 얻어 낼 수 있을 텐데요?”
“……그건 무슨 소리지?”
“응? 모르셨습니까?”
네르하가 오히려 반문하자 말을 꺼낸 루시아가 더욱 당황했다.
루시아는 네르하가 진짜로 모르고 있다는 걸 알아채곤 살짝 황당해했다.
“교관들과 비밀리에 커넥션이 있는 자들은 사실상 최고 중요 재료인 스노우 폴로피아를 적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얻어 낼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귀한 영초라도 이곳은 그 영초의 자생지 중 하나고, 리브라는 충분한 양을 비축해 두고 있으니까요.”
“…….”
그 순간, 네르하의 머릿속에 설렁설렁 움직이던 녀석들이 떠올랐다.
“과연, 그런 것이었나.”
이해했다.
그들은 별다른 고생을 하지 않아도 재료들을 손쉽게 얻어낼 수 있으니 조급해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확실히 내 지위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지. 정치적으로 생각이 뻗어 나가지 않아서 놓치고 있었군.’
굳이 다른 이한테 손을 벌리지 않아도 교수직으로 부임한 클로이아와 교섭을 하면 손쉽게 얻어낼 수 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렇게 얻어서 의미가 있을까?’
네르하는 어쩐지 ‘그런 짓’이 정답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입학 시험부터 외부의 힘을 사용하는 걸 용인하면서도 그걸 확실히 인지하고 구분하고 있는 학사다.’
그런 리브라가 설마 학생과 지도자 간의 내부 비리를 모르고 있을까?
네르하는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판단했다.
“가지.”
“뭐,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루시아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네르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 * *
네르하와 루시아가 합심하여 절벽을 오르기로 결정한 그때.
“현명하네.”
“…….”
저 멀리서 두 사람을 감시하던 레이첼과 클로이아는 제법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칭찬했다.
“가문의 재력과 권력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얻는 것. 그래. 확실히 리브라 입소 시험의 의미를 알아챘다면 당연히 다음 과정도 그렇게 이루어져야지.”
리브라 근속 연수만 어언 10년.
10대 후반에 파괴 마법으로만 5레벨에 이르러 교관, 조교수, 정교수의 단계를 밟아 온 레이첼이었다.
그런 레이첼에게 있어 저 두 사람의 존재는 아주아주 간만에 보는 인재들이었다.
“내가 학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입학 때부터 리브라의 뜻을 파악하고 따라온 놈은 열을 넘지 않았어.”
물론 시간이 지날수록 리브라의 교육과정에서 학사의 진정한 의도를 깨닫는 이는 점차 많아질 것이다.
하지만 그래선 늦는다.
“앞으로 격차는 서서히 벌어질 거야. 그걸 좁히려면 정말 엄청난 노력을 해야겠지. 저 두 연놈의 조원들은 조장을 잘 만나 일생일대의 행운을 얻었군. 역시 조별 과제의 단점은 이거라니까.”
“후후후…….”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는 클로이아를 향해 레이첼이 의외라는 기색으로 혀를 찼다.
“네가 저놈을 주인으로 선택한 이유를 조금은 알겠어. 너도 학창 시절엔 ‘저쪽’에 속했던 녀석이었으니까. 같은 동료를 감지하는 눈이라는 건가?”
그 말에 클로이아가 흠칫거리면서 손을 내저었다.
“주, 주인은 아니거든요? 난 비싼 몸이야, 선배.”
“주인이 아니면 뭔데?”
레이첼의 반문에 클로이아는 한참 동안 헤매며 답을 찾다가 간신히 대신할 만한 답을 입에 올렸다.
“비즈니스 파트너, 라고 불러 주세요.”
“지랄한다.”
레이첼은 코웃음을 쳤다.
* * *
팔라레스트 산맥의 봉우리 중 하나이자 사실상 산맥의 최고봉으로 취급받는 세인트 월.
리브라에 사는 주민들은 이 세인트 월을 ‘뒷산’이란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 세인트 월이 리브라가 위치한 봉우리에서 바로 뒤에 있는 녀석이었기 때문이었다.
“세인트 월의 가장 큰 특징은 나름 완만한 부분이 끝나는 곳에서부터 시작되는 이 절벽입니다. 이것만 없으면 리브라의 이름에서 따온 봉우리인 ‘라이브라’와 거의 비슷한 크기라고 하죠.”
“봉우리의 이름을 너무 대충 지은 것 같은데 내 착각인가.”
“착각 아닙니다. 당시에도 말이 좀 많았다고 하더군요.”
“그렇군. 근데 안 힘드나?”
“그건 제가 할 말입니다만. 안 힘드십니까?”
“전혀.”
네르하와 루시아는 현재, 지금 언급하는 그 세인트 월의 절벽을 오르고 있었다.
경공을 쓰지 않고 등반 장비를 이용해 천천히 오르고 있었는데, 내공과 근육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만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무적권신, 많이 죽었군. 소싯적이었다면 이런 절벽 따위 한걸음에 정상까지 올랐을 텐데.’
네르하는 속으로 한탄하면서도 발에 마나를 모아 착실하게 절벽에 올랐다.
조원들에게 같이 오르자고 권해 봤지만, 그들은 당연히 전부 질색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게 조원들을 두고 등반을 시작한 지금, 네르하는 한 가지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래도 협박을 해서라도 등반을 시켰어야 했는데…….”
루시아 역시 네르하의 말뜻을 이해하곤 동의의 말을 내뱉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설마 절벽 전체에 ‘마법적 처치’를 해 뒀을 줄이야. 이놈의 가문은 확실히 스케일이 커.”
어느 순간부터 벽 끝과 접촉한 손이 착착 감겼고, 발에는 묘한 마력이 밑을 받치고 있었다.
‘체력 소모는 물론 기의 소모까지 거의 없군.’
오히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힘이 솟아오르고 마나가 차오르고 있다.
이것은 ‘모험’을 시도한 젊은 마법사에게 바치는 리브라의 보상.
그야말로 등반 자체가 일종의 기연인 셈이었다.
“이 정도면 본격적으로 속도를 내도 되겠군.”
툭!
네르하는 과감하게 등반용 말뚝을 아래로 버려 버렸다.
“무, 무슨 짓을!”
옆에서 함께 등반하다 화들짝 놀라며 루시아가 눈을 부릅떴지만 바로 이어진 네르하의 모습에 더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네르하는 그대로 발바닥을 절벽에 붙이며 중력을 역행하는 광경을 연출한 것이다.
‘오래간만에 해 보는 건데 잘되는군.’
흡자결(吸滋結).
경신법의 고급 응용 기술 중 하나.
“좋아. 가 볼까?”
네르하는 그대로 위로 뛰쳐나가며 마치 달려 나가듯 절벽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루시아는 지금까지 놀랐던 것 중 가장 크게 놀랐다.
‘저, 저건 하이퍼 마나 워크! 기사들의 비전을 어떻게 저자가!’
마나 워크.
문자 그대로 마나를 사용해 움직이는 방법.
검술, 마나 연공법과 함께 기사 가문의 삼대 비전이라고 불리는 비전 중의 비전이자 ‘마법사’란 직종과는 평생 인연이 없는 것이기도 했다.
루시아는 다급히 아래쪽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인기척은 없다.
잠깐 주변을 살펴본 루시아는 입술을 깨물며 뛰쳐나간 네르하의 자리를 노려보았다.
‘지, 질 순 없어! 아무리 라데우스라도 이런 거에서 마법사에게 지는 건 나와 가문에 대한 모욕이야!’
오기, 그리고 승부욕.
루시아는 네르하가 했던 것처럼 말뚝을 버리고 그대로 벽에 달라붙었다.
“이, 이대로 질까 보냐!”
투다다닥!
루시아는 비명에 가까운 기합을 내지르며 그대로 네르하의 뒤를 따라 절벽을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
사비연 퓨전 판타지 소설
(주)조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