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영약 (2)>
네슬렉 라데우스는 정중하게 두 손을 모아 인사를 건넸다.
“간만에 뵙습니다, 머르딘 공.”
“그래. 작년, 가주의 탄생일 이후로 처음이군.”
라데우스의 전대 장로인 네슬렉이 극도의 공경을 취하는 상대.
가문 내에서, 그리고 대륙 전체에서 봐도 머르딘의 지위는 그만큼 드높았다.
“가끔씩은 학사로 내려오시지 그러십니까?”
“이 늙은이가 그런 곳에 가서 뭐 하게?”
“저도 이제 늙은이입니다만.”
“나보다 열 살은 어린 주제에 무슨.”
머르딘은 손을 휙휙 내저으며 ‘어딜 감히’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뭐, 시답잖은 나이 자랑은 그만하고.”
“……머르딘 공께서 먼저 시작하셨습니다만.”
“아, 좀.”
머르딘은 입술을 비죽이며 네슬렉을 노려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짬밥이라는 게 있는 상대인지라 네슬렉은 어깨를 으쓱하며 항복의 제스처를 취했다.
“그래서, 어르신께서 보신 네르하는 어떠셨습니까?”
“어떻긴 뭘 어때? 여기까지 기어 올라온 녀석은 10여 년 만에 처음이야. 바스텔 이후로 단 한 명도 없었다고.”
바스텔 로저 라데우스.
라데우스 가문의 장남이자 현재, 차기 가주로 가장 유력한 존재.
그리고 머르딘이 봐 왔던 이들 중에선 가장 압도적인 재능을 지닌 존재이기도 했다.
“네르하가 바스텔과 비슷한 급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뭘 그렇게 확대해석할 것까지야.”
머르딘은 피식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뭐, 장래성은 충분하다고 생각은 하네만.”
“……!”
“자네도 봤잖아? 바스텔도 찾아내지 못한 에인션트 폴로피아를 단번에 찾아냈네. 같이 온 ‘공주’ 역시 헤매던 걸 보면 놈의 마력 감응력은 장난이 아니야.”
“그건…….”
“오히려 나는 자네를 좀 탓하고 싶군. 옛날에 저 녀석을 가르쳐 본 적이 있다며?”
네슬렉은 작게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의 네르하는…… 확실히 범재 이하였습니다. 그건 틀림없었습니다.”
“그럼 자네가 잘못 본 거겠지.”
“…….”
네슬렉은 뭐라 항변하고 싶었지만 상대는 라데우스의 최고 외부 고문 중 하나인 삼마자(三魔子)의 일원이자 대륙에서도 이름이 드높은 대마법사이기도 했다.
마법계에서도 최고 연배를 자랑하는 이에게 마법적 안목에 관한 것을 차마 따질 수가 없었다.
“하여튼 앞으로의 리브라는 아주 재밌어지겠어. 케프렌에서 불세출의 천재 하나가 튀어나왔다던데 라데우스에서도 그에 맞설 대항마 하나는 나와 줘야겠지.”
“…….”
네르하에 대한 판단을 위해 찾아왔지만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에 네슬렉은 오히려 혼란에 빠졌다.
“게다가 300년 전에 나타난 그 참사가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싹수 좋은 녀석들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대체 언제 적 이야기를…….”
300년 전, 단신으로 대륙을 불태웠던 한 명의 마인.
마계의 마왕조차 웃돌았던 그 힘은 당대 라데우스와 케프렌을 비롯해 대륙의 모든 가문들이 연합하고 나서야 간신히 제압할 수 있었다.
네슬렉으로서도 어린 시절부터 듣고 자란 ‘전설’로 취급받는 이야기였지만…….
“당연히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어느 정도 진실을 알고 있는 머르딘은 달랐다.
“뭐, 어쨌든 영약이 끝났으니 다음은 무기지?”
전투 마법사에게 마나만큼 중요한 것이 바로 일평생을 함께할 장비의 존재다.
“네. 두 달 뒤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음음, ‘라데우스 무기 수여식’. 아마 그때쯤이면 가주도 참관할 것 같은데 난 참 궁금하단 말이야.”
어느새 저 밑으로 내려간 네르하를 바라보며 머르딘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내지었다.
“새끼 괭이인 줄 알았던 지 자식이 사실, 사자 새끼였음을 그 녀석이 알아챌 수 있을까…… 하는 게.”
* * *
“후우…….”
내려오는 것은 올라가는 것보다는 훨씬 쉬웠다.
여전히 절벽 표면에 작동하고 있는 마나의 흐름을 타면 간단한 일이었으니까.
‘단순히 한번 등반했을 뿐인데도 마나의 질이 엄청나게 좋아졌다.’
내력의 정순함. 이건 어떤 영약을 먹어도 해결되지 않는 일이었다.
오로지 내공심법의 질에 의해서만 판가름 나는 법인데 저 세인트 월의 절벽은 그런 세간의 상식을 파괴하는 효용을 지닌 것이다.
‘기운이 사라졌군.’
네르하와 루시아가 내려오자 귀신같이 절벽을 감싸던 특유의 기운이 사라졌다.
아마 머르딘이 인위적으로 마법진을 중단시킨 것으로 보였다.
네르하는 고개를 돌려 루시아를 바라보았다.
“널 만나서 다행이군. 아니었다면 내일까지 꽤나 헤맸을 수도 있었겠어.”
“그렇게 고마우시면 그 한 뿌리를 저에게 주셔도 됩니다만.”
“어허, 선 넘지 말지?”
네르하의 근엄한 거절에 루시아는 속으로 킬킬 웃었다.
“뭐, 기대도 안 했습니다. 그냥 나중에 맛있는 밥이나 한 끼 사 주십시오.”
“비싼 거로 사 주지.”
“전 많이 먹기도 합니다.”
“그건 걱정 말라고.”
두 사람은 그런 식으로 잡담을 끝내고는 서로의 조원을 찾아 헤어졌다.
구석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네르하의 조원들은 조장이 훌륭하게 마지막 재료를 찾아오자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대로 모든 재료를 모아 학사에 제출하면 모든 게 끝.
고작 이틀 만에 조별 과제를 완벽하게 끝내는 셈이다.
그러나 네르하와 루시아가 온전히 과제를 끝내기에는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었다.
* * *
가벼운 발걸음으로 귀환하던 네르하와 조원들은 리브라의 성벽에 다가갈수록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저, 저거…….”
저 앞에 수십에 달하는 훈련생들이 흉흉한 분위기를 풍기며 몰려 있다.
정확히는 다수가 소수를 포위한 모습.
소수의 숫자는 네 명인데 반해, 다수의 숫자는 무려 열여섯 명에 달했다.
문제는 그 소수 중 한 명에 루시아가 끼어 있다는 점이었다.
네르하는 눈살을 찌푸리며 앞으로 나섰다.
“이게 무슨 짓이지?”
“넌 빠져라, 네르하.”
설상가상으로 무리의 중심에 있는 놈은 배커와 제크론.
즉, 라데우스의 핏줄을 이은 두 놈이 자기 패거리를 모아 외부 가문 출신을 겁박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무슨 짓이냐고 물었는데?”
“스노우 폴로피아.”
“뭐?”
마치 네르하에겐 관심이 없다는 듯 시선을 돌린 배커가 루시아를 노려보았다.
“순순히 내놓으면 유혈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거다.”
“……!”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배커의 발언에 네르하는 표정을 구겼다.
‘학사 안에 저놈들에게 진실을 가르쳐 준 자가 있군.’
사실, 자기들이 얻은 재료가 그다지 효과가 없는 하등품이라는 것.
네르하와 루시아가 절벽을 오른 것. 그리고 ‘진짜’를 손에 넣었다는 것.
명백히 선을 넘는 행위였지만 그걸 탓하기엔 지금 상황이 너무 급박했다.
“네르하, 네 것을 탐낼 생각은 없다. 솔직히 널 건드려서 뒷감당할 자신이 없으니까. 하지만 저 여자는 다르다.”
“양심이 없군.”
저 열여섯 명 중 남자만 무려 열셋이다. 그것도 전부 성인에 가까운 체격이니 겉으로 보면 루시아와 그녀의 조는 완전히 몰린 셈이다.
배커는 신이 난 표정으로 바스톤을 불렀다.
“가라, 바스톤. 저 여자를 쓰러뜨려!”
“……네.”
배커의 뒤에 있던 바스톤은 어두운 표정으로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뿐만 아니라 바스톤과 비슷한 떡대 세 명이 바스톤의 뒤를 따랐다.
“…….”
아무리 그녀라도 마법, 정확히는 마나를 사용하지 않고 성인급 남성 넷을 상대하는 건…….
‘쉽겠지.’
안타깝게도 배커와 제크론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
루시아는 가라앉은 표정으로 무릎을 살짝 구부리며 자세를 잡았다.
“……!”
루시아의 자세, 표정, 기세 등을 모두 확인한 바스톤이 눈을 살짝 동그랗게 떴다.
자세에 떨림이 없었고, 표정에서 감정을 전혀 읽을 수가 없다. 기세 또한 안정적으로 정제되어 있어 마냥 덤벼든다면 낭패를 볼 게 뻔했다.
과거, 소년 용병으로 전장에서 몇 년 정도 굴렀던 바스톤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상대는 절대 연약한 소녀가 아니었다.
오히려…… ‘강자’다.
‘마치 그때의 네르하 도련님을 보는 것 같군.’
바스톤은 천천히 발걸음을 떼며 루시아의 주위를 돌았다.
그런 모습에 바스톤을 지원하기 위해 나온 세 명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야, 바스톤! 지금 계집 하나 상대로 뭐 하는 거냐!”
지나치게 신중한 바스톤의 모습에 배커는 역정을 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먼저 덤비면 진다.’
두툼한 등산 장비에 가려져 있지만 분명 상대의 육체엔 단련에 단련을 거듭한 흔적이 보였다.
그런 바스톤의 신중한 모습에 루시아는 살짝 웃음기를 보이며 말했다.
“저런 자의 밑에 있기엔 아까운 사람이군요.”
“최근, 같은 말을 두 번이나 들을 줄은 몰랐군.”
“헤에? 누가 그랬죠?”
“지금 당신의 뒤에 오는 분에게.”
“……!”
루시아가 슬쩍 고개를 돌려 바스톤의 말을 확인했다.
어느샌가 네르하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루시아의 옆에 다가온 네르하가 바스톤을 보며 입을 열었다.
“바스톤, 이렇게 다시 대화하는 건 첫날 기숙사 이후로 처음인가?”
“예. 안녕하십니까, 네르하 도련님.”
“그래그래.”
바스톤의 정중한 인사를 받은 네르하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뒤 시선을 돌렸다.
“거두절미하고 말하지.”
그 시선의 끝에는 배커와 제크론이 있었다.
“추하게 굴지 마라, 배커.”
“뭐야!”
“아무리 약탈 금지의 조항이 없어도 스스로 자신을 완성해야 하는 마법사가 이미 쟁취한 타인의 것을 갈취하는 것은 최고의 불명예 아닌가? 하물며 다른 누구도 아니고 너 역시 라데우스의 인간인데 말이야.”
“……!”
“물론 그 불명예를 감수할 정도로 ‘우리’가 얻어낸 영초가 값어치가 있다는 건 인정하지. 그러니…….”
까딱까딱!
네르하는 검지를 까딱거리며 들어오라는 도발의 제스처를 보였다.
“우리 조가 합류하면 8 대 16이군. 어디 한판 붙어 볼까?”
“뭐, 뭣이!”
네르하의 선언에 배커는 물론 주변 모두에게 동요가 퍼져나갔다.
“…….”
옆에서 루시아가 황당한 시선을 보내는 걸 무시한 채 네르하는 배커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네, 네놈! 굳이 네놈하고 충돌할 생각은 없었는데!”
이를 악문 배커가 분노를 터트렸지만 네르하는 요지부동이었다.
“말했잖나? 너와 나는 라데우스다. 그에 걸맞은 품격을 보일 필요가 있다는 뜻이지.”
“…….”
“스스로의 힘으로 절벽에 올라라, 배커. 저 절벽 너머에 마지막 재료가 있으니까. 라데우스로서의 모범을 보이란 말이다.”
배커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전투 이전에 네르하가 이렇게까지 ‘명예’를 들먹이는 이상 배커로서는 큰 갈등에 휩싸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뭐, 싸우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하지만!”
네르하의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
“그때보다 훨씬 가혹한 결말을 생각해 두는 게 좋을 거다.”
“…….”
식은땀과 함께 배커의 눈에 짙은 갈등이 일어났다.
* * *
결국 배커와 제크론은 루시아를 압박하는 걸 포기했다.
수적으로는 충분히 유리했지만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아니면 뭔가 깨달은 게 있었는지 그냥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루시아와 네르하만 남은 상황에서 루시아가 새초롬한 표정으로 네르하에게 따졌다.
“도와달라고 한 적 없는데요?”
“그래?”
“저 혼자 처리할 수 있었거든요. 괜한 도움이었습니다.”
“튀는 게 좋았다면 괜한 도움이었겠군. 이거 미안해지는데?”
“…….”
의미심장한 뜻을 담은 네르하의 말에 루시아는 절로 입을 다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개미가 지나가는 것 같은 루시아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고마웠습니다.”
“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
“아, 고맙다고요! 빚은 다음에 갚을 테니 달아두세요!”
루시아는 버럭 성을 내더니 요란한 발걸음으로 리브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쩝, 너무 놀렸나?”
네르하가 루시아를 도운 이유는 별거 없었다.
첫째로는 정말로 배커의 행동거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었고, 두 번째로는 루시아에게 빚을 지워두어서 나쁠 게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배커가 정말로 네르하의 조언을 받아들여 절벽에 오를지는 모르겠지만 뭐, 그 이후로는 이제 네르하가 알 바 아니었다.
『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
사비연 퓨전 판타지 소설
(주)조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