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성장 (1)>
조별 과제가 종료되었다.
리브라에서 파견한 교관들은 착실하게 모든 조의 동태를 지켜보았고, 실시간으로 평가가 이루어진 만큼 학사에 재료를 제출하자마자 곧바로 점수가 매겨졌다.
‘5점이라…….’
네르하의 조는 머르딘의 장담대로 최고점인 5점을 받았다.
그 밑으로 모든 재료를 구했지만 마지막 선택지에서 재료를 구하지 못한 조는 4점.
나머지는 채집 상태에 따라 1에서 3점을 왔다 갔다 했고.
“왜 우리가 0점이냐! 제대로 모든 재료를 다 구했는데!”
“우리도 마찬가지야! 이게 무슨 일이야!”
마지막으로 비리를 저지른 조는 예외 없이 모조리 0점 처리당했다.
“네 말만 믿고 있다가 이런 꼴을 당했어! 이걸 어떻게 책임질 거야?!”
“뭐? 말 다 했냐?”
“네놈들도 좋다고 동의한 주제에!”
0점 처리당한 이들은 학사에서 내민 증거물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고, 자연히 그 원망은 일을 저지른 장본인들에게로 향했다.
“가, 감히! 듣도 보도 못한 삼류 가문 출신이!”
“닥쳐! 네놈 때문에 우리 인생까지 꼬이게 생겼는데!”
이번만큼은 가문의 위세고 나발이고 통하지 않았다.
대번에 학사 앞마당에서 눈 뜨고 차마 보지 못할 정도로 고성방가와 주먹질이 오고 갔다.
네르하는 그 모습을 재밌게 지켜보았다.
‘그나저나 제크론은 있는데 배커가 없다니, 신기할 노릇이군.’
그나마 배커의 조는 바스톤이란 인간 흉기가 있어서 반란(?)의 정도가 덜했다.
무언가 깨달은 것일까. 아니면 그냥 단순히 자리에 나오지 않은 것일까.
‘가능하면 내 조언을 받아들였으면 좋겠는데…….’
분명 배커의 재능은 이곳 리브라에서도 최상급이다.
소위 ‘악마의 재능’이란 말도 존재하듯 성향이 선이든 악이든 그 재능의 잠재성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
하지만 배커의 경우엔 스스로의 노력보단 타인의 힘을 빌려 목표를 성취하려는 경향이 있어서 그게 조금 안타까울 뿐이었다.
‘정신을 차렸으면 거둘 만은 하겠는데 과연 어찌 될런지.’
과연 배커는 자신의 조언을 받아들였는가.
그 결과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될 것이다.
* * *
마도 도시 베리타스, 라데우스 가문의 본거지 셀레스티얼.
그 본거지 셀레스티얼에서도 가장 심처라고 할 수 있는 자그마한 성, 은천궁(殷天宮).
궁이라고 하기엔 조금 소박하지만 이곳은 세상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최강의 보안을 자랑하는 장소였다.
오로지 라데우스의 직계로 인정받은 자만이 출입이 가능하며, 직계가 아닐 경우 설사 대마법사나 검신급 존재라고 해도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곳.
시종조차도 들이지 못해 잡다한 관리 역시 직계들이 해야만 하는 장소이지만 그만큼 세계를 뒤흔들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일들이 결정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네르하가 그 정도였나요?”
“…….”
그런 은천궁의 한 공간에서 아직 풋풋함을 간직하고 있는 한 여인이 입을 열었다.
“삼마자(三魔子)께서 눈여겨보실 만큼 네르하의 재능이 그렇게 뛰어났던가요?”
하지만 그런 풋풋한 겉모습과는 다르게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한없는 차가움을 머금고 있었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녀의 앞에 마주한 이가 몸을 떨며 말했다.
“그렇다면 네르하가 마지막 재료인 스노우 폴로피아를 자력으로 찾아냈다는 건데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
“왜 말이 없죠?”
“죄, 죄송합니다.”
대답하는 상대 역시 라데우스의 직계이며, 바깥의 정보를 총괄하는 외부 지원국의 일원이었다.
은천궁에 들어올 수 있을 정도면 바깥에선 거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다는 증거였지만 눈앞의 여인은 그런 사내조차도 내리깔 수 있는 권력을 지닌 존재였다.
“리브라의 일은 절대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언령의 제약으로 바스텔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온전한 ‘마나 블래스트’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네르하가 순수한 실력으로 그걸 발견했다고요?”
“다른 누군가가 끼어든 정황은 찾지 못했습니다.”
“찾으세요.”
여인의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사내의 귓구멍을 쑤셨다.
“반드시 로젤리아, 그년의 개입이 있었을 겁니다. 그게 아니고서야 머저리에 불과한 네르하가 그 장소를 찾아낼 리가 없죠.”
네르하가 들었다면 억울해서 피를 토했을 이야기였지만 적어도 이들에게 있어 네르하에 대한 평가는 고작 그 정도였다.
“그 증거를 발견하면 이번에야말로 로젤리아, 그년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앞으로 남은 건 하나뿐이죠.”
그 남은 하나가 무엇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예. 반드시 증거를 찾아내겠습니다.”
“아, 그리고.”
여인의 말에서 가볍게 지나가는 한마디가 이어졌다.
“이번에 ‘그들’에게서 협조 요청이 왔더군요. 이번에 있을 리브라의 무기 수여식에서 회수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으니 도와달라고.”
움찔!
그 순간, 사내의 등이 크게 휘청였다.
“그들과 가까이해서는 안 됩니다! 가뜩이나 이번 무기 수여식엔 가주님과 다른 직계분들도 다 참여하실 텐데……!”
“그러니 미리 손을 써 놔야지요. 가주님께서 북방 원정을 가신 지금.”
비록 필요에 의해 이용하는 관계라고는 하나 ‘그들’과 손을 잡는다는 건 라데우스에서는 역모 다음으로 여길 정도의 중죄였다.
만약 발각된다면 설사 여인이라 하더라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리브라에 숨어든 그들이 그곳에서 유일한 직계인 네르하를 정면에서 마주한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요?”
“위험합니다!”
“후후후, 무슨 소리신가요? 전 ‘어디까지나’ 가정을 이야기하는 것뿐이랍니다.”
사내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아무리 여인이 기계를 잘 쓰는 지략가라고는 하나 리브라의 무기 수여식은 가주가 직접 참관하는 자리다.
그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여인이라도 발각당할 확률이 높다.
“실행하세요.”
“아, 알겠습니다.”
남자는 불안감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 * *
일단 영약은 한 달 뒤에 나온다고 하니 그때까진 적당히 소일거리를 하면서 경지를 올리는 데 주력할 생각이었다.
‘잘하면 단 한 번에 절정지경을 뚫을 수 있을지도…….’
같은 영약을 복용한다 해도 어떤 내공심법을 운용하는가, 또 기운을 얼마나 능숙하게 흡수하느냐에 따라 얻을 수 있는 마나의 양은 천지 차이다.
아무리 무인과 마법사가 마나를 사용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해도 일단 마나의 절대량이 많아지면 뭐든 할 수 있는 선택지가 늘어나기 마련.
‘그때까지 가능한 최상의 몸 상태를 만드는 데 주력해야겠군.’
이 육체를 단련한 지 아직 몇 달이 채 되지 않았다.
물론 일반인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성장세를 보이곤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직 무인의 육체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었다.
‘오늘은 머리도 식힐 겸 훈련을 좀 해야겠군.’
일과 시간이 끝난 뒤 네르하의 행선지는 언제나 같았다.
마법 서고, 아니면 훈련장.
미어터지는 마법 서고와는 다르게 훈련장엔 항상 사람이 적었다.
외부에서 초빙된 무술 교관들이 상시 대기 중인 데다 다양하게 몸을 단련할 수 있게 여러 기구를 배치해 놓았는데도 네르하는 지금까지 단련실의 인원이 한 번에 열 명을 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이 정도면 무림에서도 최상급의 무관이라 볼 수 있을 정도인데 조금 안타깝군.’
원한다면 언제든지 교관들과 대련도 자유롭게 할 수 있고, 바깥에선 천금을 줘도 구하기 힘든 비전들도 교관들은 아낌없이 베풀었다.
물론 진짜 밥줄이라 할 수 있는 기술은 숨기겠지만 이 정도면 구파일방 어딜 가더라도 꿀리지 않는 수준이라 할 만했다.
하지만 이곳이 마법사 육성 기관이라는 단 하나의 사실로 인해 위의 모든 장점들은 빛을 바랬다.
‘물론 마법사란 인종이 몸을 단련할 시간에 주문 하나를 더 익히는 것이 미덕이라고는 해도, 전투원이라면 적어도 기본적인 육체 능력은 갖춰야 할 텐데 말이야.’
그래도 단련실을 이용하는 이들 중 다수가 상급생인 것을 보면 리브라도 어느 정도 네르하의 생각처럼 여러 조치를 통해 훈련 생도들의 사고를 유도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어서 오십시오, 네르하 도련님!”
단련실에 있는 십여 명의 교관들은 네르하가 나타나자마자 반색하며 맞이했다.
“오늘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간단하게 몸만 풀고 갈 거야. 적당한 대련 상대가 있다면 더 좋고.”
이 단련실 내부에서 네르하의 인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
이곳의 교관들은 하나같이 거액의 보수를 받고 초빙된 실력자들이었지만 아무래도 리브라 내부에선 제대로 활약하기 힘든 처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라데우스의 직계인 네르하가 거의 매일같이 출근 도장을 찍고 있으니 그들에겐 리브라 내에서 입지를 늘리는 것은 물론 월급 도둑이란 오명을 씻어 낼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하하하, 이거 제가 나서야겠군요.”
“어이, 이번엔 내 차례라고. 넌 사흘 전에 도련님과 붙어 봤잖아!”
교관들은 네르하와 함께하기 위해 앞다투어 순번을 정했다.
이러는 이유는 네르하가 단순히 마법 가문 출신답지 않게 무술에 상당한 흥미가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째서인지 네르하와 겨루는 이들 중엔 깨달음(!)을 얻는 이들이 상당히 존재했던 것이다.
물론 그건 교관들을 포섭하기 위한 네르하의 정교한 유도였지만 아직까지 그걸 깨달은 이는 없었다.
그때, 네르하의 눈에 익숙한 누군가가 포착되었다.
‘응? 저건 바스톤이잖아?’
바스톤은 구석에서 한쪽 팔을 등진 채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었다.
알알이 박힌 근육과 전신에 가득한 상처를 보면 절대 평범하게 단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흐음.’
이곳에 드나든 지 제법 시간이 흘렀지만 바스톤의 모습을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다.
‘아마 배커의 잠수와 연관이 있는 건가?’
이유가 어찌 됐든 흥미가 인 네르하는 잠시 바스톤의 수련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단순한 근력 운동이야 그렇다 쳐도 체술과 무기술을 시전하는 바스톤의 모습을 본 순간, 네르하는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찼다.
“쯧쯧쯧!”
“……네르하 도련님?!”
바스톤은 네르하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크게 놀랐다.
단련에 집중하고 있었고, 네르하 역시 기척을 억제하고 있었다고는 하나 끽해야 십여 미터 안팎이다.
그런데도 상대의 모습을 놓친 것은 입이 몇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아니, 그런 걸 따지기 전에.
“딱 봐도 실전에서 구르면서 곁눈질로 배운 티가 나는구나.”
“……!”
“그런 식으로 백날, 천날 단련하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바스톤의 무술의 문제점을 정의하자면 한마디로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실전적인 건 사실이었지만 아무리 높게 봐줘도 삼류 무사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아마 교관들 중 눈치 빠른 몇몇은 바로 눈치챘을 거다.
“한 사람에게 사사받은 것이 아닌, 이것저것 잡다한 것들을 모조리 끌어모아 놨구나.”
“그, 그걸 어떻게?”
“척 하면 착이지.”
네르하는 이왕 이렇게 된 거, 녀석에게 한 수 가르침을 주기로 결심했다.
“네 문제점이 뭔지 알려 주지. 어디 한번 덤벼 봐라, 바스톤.”
『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
사비연 퓨전 판타지 소설
(주)조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