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루시아의 사정 (1)>
‘……어, 언제 알아챘지?’
루시아는 살짝 당황했다.
잠시 자리를 비켜 준 교관들조차 자신의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네르하는 대번에 알아맞힌 것이다.
“그만 나오지 그래? 언제까지 머리만 내밀고 있을 생각이야?”
“아, 안 그래도 나갈 거거든요!”
루시아는 헛기침을 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나저나 세 번째라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말 그대로지. 너도 무술과 마법을 결합하기 위해 리브라에 온 것 아니었나?”
리브라에서 이론 수업 중에 보이던 루시아의 모습은 상당히 열성적이었다.
분명 마법에 진심으로 달려드는 것이 분명했다.
“흐, 흥! 내가 마법 따위를 배워서 뭐 하게요?”
“…….”
아니, 아무리 그래도 리브라에서 저런 말을 내뱉는 건…….
거기선 마법이 아니라…….
“앗.”
자기도 말실수를 한 것을 알아차렸는지 루시아는 다급하게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네르하는 그런 그녀를 한심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숨길 생각은 있는 거냐?”
“뭐, 뭐, 뭘 숨긴다는 거죠? 마법이야말로 이 세상의 유일한 진리! 무술 따윈 마법에 비하면 쓰레기만도 못한 것인데요!”
“호오?”
네르하의 이마에 살짝 핏줄이 섰다.
그 무술의 대종사를 눈앞에 두고 그딴 말을 지껄인다고?
선 넘네?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뭐, 그렇죠!”
“그럼 굳이 이런 단련실까지 와서 시간을 낭비할 생각은 아니겠지? 마법 술식을 공부하느라 바쁠 테니 말이야.”
“……네?”
“자, 빨리 돌아가라고.”
“자, 잠깐만요!”
루시아는 친절하게 등을 밀어주는 네르하의 모습에 감동……은 개뿔. 거칠게 저항하며 손을 저었다.
“너, 너무 급하게 사람을 쫓아내는 거 아닌가요? 무, 물어볼 게 있는데요!”
“무술을 무시하는 사람에겐 딱히 알려 줄 게 없는데.”
“아,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죄송해요! 엿봐서 죄송하다고요!”
루시아는 자신을 매정하게 밀어내는 이유가 바스톤과의 대련을 엿봐서라고 해석한 모양이었다.
네르하도 더 이상 장난하는 걸 멈추고 그녀를 안으로 들였다.
“그래서 물어볼 게 뭔데?”
잠깐 네르하의 눈치를 본 루시아가 입가를 가리며 살짝 헛기침을 했다.
“흠흠! 어디서 배운 겁니까, 그 움직임?”
“뭘?”
루시아의 손가락이 여전히 널브러진 바스톤에게로 향했다.
“당신이 이 거구를 상대할 때 사용한 체술 말이죠. 겉으로 보면 그냥 되는 대로 받아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하나의 동작들을 모두 조합하면 일관된 움직임이 나오더군요. 그것도 매우 고차원적인 움직임이 말이에요.”
‘호오, 그걸 알아봐?’
네르하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바스톤 역시 싸우는 도중 그걸 알아차렸는지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했다.
루시아는 살짝 흥분했는지 열변을 토했다.
“제가 알기로 라데우스의 혈족들이 그런 체술과 무술을 익히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알고 있어요. 설사 익혔다 해도 그건 다음 마법을 준비하기 위한 호신용 정도이지 그런 높은 수준의 체술을 익히진 않는다고요.”
네르하는 빙그레 웃으면서 준비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라데우스의 혈족들은 모두가 뛰어난 전투 마법사지. 게다가 라데우스 정도의 거대 가문이라면 마법 외에도 다른 비전이 수없이 존재한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
“아뇨.”
루시아는 딱 잘라 부정했다.
“보통, 전투 마법사란 어디까지나 전투에 도움이 되는 마법과 그에 따른 고유 계통을 각성하는 자를 말해요.”
이어지는 그녀의 말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절대로 고차원적인 무술을 익혀 그걸 마법과 융합한 자를 전투 마법사라 말하지 않아요.”
“…….”
확실히 루시아의 말은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기사의 기술을 배척하는 라데우스의 순수마법주의는 상당히 유명하다.
그걸 아는 루시아로서는 가문이 아닌 다른 쪽에서 그런 움직임을 익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리브라에서 고질적인 마법사의 체력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이런저런 수를 쓰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게 육체적인 전투 능력을 향상하기 위한 방향은 아니었다.
루시아가 보기에 네르하는 특이한 변종을 넘어 뭔가 수상함을 감추고 있다고 느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무림으로 치면 소림이나 무당파의 직전 제자가 마공을 익히고 있다는 소리와 비슷하게 들릴 테니까.
“그래서? 남의 가문에 지나치게 관심이 많군. 뭐 어쩌자는 거지?”
네르하의 차가운 눈빛을 직시하자, 그녀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아, 아니! 그냥 궁금해서 그런 건데 그렇게 대응하시면 제가 뭘 할 말이 없…….”
“너도 나름 있는 집 자식일 텐데 남의 가문의 비사를 대놓고 파헤치는 건 실례를 넘어 무례라는 걸 알고 있겠지?”
네르하의 냉정한 추궁에 루시아의 이마에 식은땀이 뻘뻘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결국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그녀의 사죄를 받자마자 네르하가 만면에 환한 미소를 머금으며 이렇게 말했다.
“농담이다.”
“…….”
“왜 그런 눈으로 날 보지?”
“아뇨. 살인 충동이라는 게 시답잖은 일로도 생긴다는 걸 깨달아서.”
“쯧쯧, 수양이 부족하군.”
터질 것처럼 빨개지는 녀석의 얼굴을 보아하니 장난은 여기까지만 해야겠다.
“뭐, 궁금해하는 건 알겠지만 알려 줄 수는 없어. 나름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비장의 수이기도 하거든.”
“아.”
“그래도 같은 길을 걸어 나갈 동지들에겐 나름 공유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루시아와 바스톤의 표정에 살짝 물음표가 떴다.
“공유, 말입니까?”
“그래. 공유.”
마침 잘 되었다.
루시아가 궁금해하던 ‘유파’를 알려 줄 수는 없었지만, 네르하는 나름 그 이상으로 여길 수 있는 비전을 보여 줄 생각이었다.
화륵!
네르하의 손에 자그마한 불꽃의 구체가 맺혔다.
파이어볼이라기엔 살상력도 그리 크지 않을 축구공만 한 크기다.
“……?”
두 명의 시선이 의아함을 담고 구체에 집중되었다.
네르하는 그런 둘의 시선을 받으며 그대로 구체를 회전시켰다.
“……!”
“으음!”
두 사람이 놀란 이유는 단순히 불의 구체가 회전하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불의 구체가 마치 뱀처럼 모양을 바꾸며 네르하의 팔목을 휘감은 것 때문이었다.
‘뭐지? 형태 변환은 확실히 놀라운 기예이지만 단순히 휘감은 것뿐이라면 아무런 쓸모도 없을 텐데?’
루시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네르하의 기행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곧이어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이걸 이대로 발산한다면…….”
네르하는 그 상태에서 자세를 잡고 옆에 있는 샌드백을 향해 가볍게 일권(一拳)을 내질렀다.
퍼어엉!
“헉!”
분명히 단순한 주먹질에 불과했다.
마나라고는 일절 담기지 않은 순수한 일격.
하지만 그들이 놀란 이유는 샌드백의 정중앙에 마치 거대한 포탄이 뚫고 지나간 듯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는 점이었다.
“어, 어떻게? 마나가 모이는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는데?”
개중에 좀 더 안목이 뛰어난 루시아는 숫제 기절할 지경이었다.
설사 마나를 모은 일격이라도 저렇게 깔끔하게 꿰뚫으려면 무예에 대한 상당한 조예가 필요했다.
네르하는 피식 웃으면서 자신의 팔목을 가리켰다.
“왜 없지? 여기 있잖냐.”
“그건.”
네르하가 처음 모은 파이어볼의 구체. 아니, 파이어볼의 팔찌.
“그걸 휘감고 방금 전의 위력을 내보였다고요?”
파이어볼의 정상적인 파괴력이라면 저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네르하가 처음 불러온 파이어볼은 일반적인 크기보다 훨씬 작다는 점과, 무엇보다 불길이 연소되지 않고 여전히 네르하의 손목에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한 번씩 공격을 내지를 때마다 불길이 약해지지. 그래도 이런 위력을 못 해도 다섯 번 정도는 내지를 수 있어.”
“다, 다섯 번!”
“어때? 그렇게 생각하면 꽤 쓸 만하지?”
“그, 그냥 쓸 만한 정도가 아니잖아요!”
루시아는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그녀가 주목한 건 단순히 파괴력이나 집중도가 아닌, 저 수법의 가능성 자체였다.
“어떻게 하신 거죠?”
“음, 조금은 복잡한데.”
네르하는 불꽃을 꺼뜨린 후 살짝 뺨을 긁었다.
“이 파이어볼을 변형시킨 건 마법 이론이 아니라 내가 기공, 즉 체내에서 마나를 다루는 방법을 응용한 것이다.”
파이어볼은 그 자체로 완성된 마법. 단순히 마법 이론만으로 이런 식의 변형을 가하려면 못해도 6레벨 이상의 지식이 필요했다.
하지만 고차원적인 무학의 이치를 깨달은 네르하 같은 케이스는 굳이 마법의 도움 없이도 이런 식의 구현이 가능했다.
또한 그것을 어떻게 구현하는지 정확한 이론의 정립 역시도, 마법 이론보다 간단하게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내가 이 마법에 처음 섞은 건 나선경(螺旋境)이다.”
나선경의 요체는 힘의 집중이며 그것만으로는 이것을 완성할 수 없다. 네르하가 거기에 더해 외부에 발산된 불길을 제어하기 위해 추가한 방법은 다름 아닌.
“그리고 이기어검의 묘리를 조금 섞었지. 음, 이기어검이란 뜻을 대충 풀이하자면…….”
이기어검의 뜻을 이 세계식으로 어떻게 번역해 봤는데 다행히 루시아는 그 뜻을 알아들은 듯했다.
“스, 스피릿 소드라고요?”
“아, 대체하는 단어가 있었나? 영혼의 검이라, 의념과 공명하는 것이니 딱히 틀린 표현은 아니군.”
“헛소리! 무, 무슨 그런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루시아의 눈에 깊은 불신이 어렸다.
스피릿 소드라는 건 검술 명가인 케프렌에서도 그 시전자가 백 명을 넘지 못하는 절대적인 경지.
그것도 은퇴한 전대의 인물들을 모두 합쳐서 말하는 것이니 네르하의 말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는 대번에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네르하는 그런 그녀에게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믿기 싫으면 말고.”
“…….”
“뭐, 내가 개발한 수법이지만 나름 자부심이 있는 수법이지. 무엇보다 위력은 뛰어나면서도 배우기 쉽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랄까?”
“배, 배우기 쉽다?”
“어디까지나 마법과 무술, 두 길을 모두 파고든 녀석에게 한해서다. 이 수법에 통달할 수 있다면 나중에 어검(馭劍)을 다루는 데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지.”
물론 이 요령만으로 어검을 깨우치기엔 무리가 많았다.
그리고 어검은 수많은 상승 무리 중의 하나일 뿐이니 이것만 파고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 내가 스피릿 소드를…….”
“꿀꺽!”
그렇다고 해도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검이란 무림이나 이곳이나 낭만적인 무언가가 있는 건 분명했다.
‘눈이 몽롱하게 풀린 걸 보니 잘 먹혔군.’
루시아는 물론이고 바스톤까지 뭔가를 상상하는지 눈과 입이 헤벌쭉 풀려 있다.
“정신 차려라.”
“크, 크흠!”
“허, 헙!”
네르하의 말에 루시아와 바스톤은 정신을 차리고는 헛기침을 했다.
거의 낚이기 직전인 루시아가 은근하게 물어왔다.
“그럼, 그 수법을 저에게도 가르쳐 주실 수 있다는 겁니까?”
“안될 건 없지. 무재(武才)가 있는 너라면 금방 배울 수 있을 거다. 게다가 내가 알고 있는, 그리고 개발 중인 것들은 이거 하나가 아니니까.”
“그, 그렇다면…….”
“하지만!”
막 물고기가 미끼를 물기 직전, 네르하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이거 하나 배웠다고 해서 끝이 아니지. 이 길은 한번 들면 절대 다른 길로 나갈 수 없는 고행의 길이다.”
네르하가 엄중하게 말했다.
“그런 길을 잠깐 맛만 보고 돌아갈 녀석에게 전수할 생각은 없다. 또한 먹고 튀는 것 역시 용납하지 못해.”
“그 말씀은?”
“당연히 그만한 성의를 보이란 소리지.”
‘성의’란 말에 루시아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제, 제가 가져온 재물이 별로 없는데요.”
“……장난하냐.”
네르하는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루시아와 눈을 마주했다.
“네가 이 길을 걸으려는 이유.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이유를 대라. 지금은 그걸로 참아 주지.”
“이유.”
루시아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아까도 말한 것이었지만, 그녀의 기원은 무술, 정확히는 검술이다.
그런데도 마법을 진심으로 파고들고 있다.
그리고 종종 그녀가 마법과 검술을 접목하려는 시도를 발견하곤 했다.
물론 네르하와는 달리 두 분야 모두 후기지수 수준이라 큰 소득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녀가 이것에 필사적으로 달려든다는 느낌 정도는 확실히 있었다.
“설마 그런 걸 물어 올 줄은 몰랐는데요.”
“내겐 나름 중요한 문제거든.”
추측하건대, 루시아는 아마 자신의 가문과 거의 의절이나 마찬가지일 거다.
루시아의 움직임은 분명 명가, 혹은 명문이라 불리는 곳에서 오랜 세월 수련한 티가 났고, 그런 곳을 기원으로 두고 있음에도 마법을 수련한다는 건 뭔가 문제가 있기에 일어난 일일 것이다.
루시아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딱히 숨길 이유는 없으니…… 말해 드리죠.”
“좋아.”
살짝 심호흡을 들이쉰 그녀에게서 이윽고 비장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 무슨 일이 있어도 한 남자를 꺾어야만 해요.”
‘꺾고 싶다’가 아닌, ‘꺾어야만 한다’.
무언가 과업을 짊어진 자의 눈이 네르하를 직시했다.
“검술과 마법의 융합으로 전 그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
사비연 퓨전 판타지 소설
(주)조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