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루시아의 사정 (2)>
네르하는 그 말을 듣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말은, 너희 가문 쪽에서 그걸 시도한 자가 있다는 소리인가?”
“네, 딱 한 분이지만, 검과 마법의 융합을 시도하신 기사분이 계셨어요.”
루시아는 그자에 대한 정확한 정체는 알리지 않았지만, 대략적인 경지가 어떠한지에 대해선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검술의 경지는 귀(鬼)급에, 마법은 4레벨이라?”
특이하게도 이 세계의 검술에 대한 경지는 한자 발음이 유사하게 섞여 있었다.
이전에는 익스퍼트급이니 마스터급이니 하는 게 있었다지만 수백 년 전, 최고의 검술 명가인 케프렌 가문이 검술의 경지를 아홉 개의 단계로 나누었고 그게 이 시대까지 이어져 왔다.
검귀(劍鬼)는 그중 5계위에 속하며, 강호의 경지로 따졌을 때 네르하의 추측으로는 절정지경에 속하는 듯했다.
“그분은 검술에 모든 것을 걸기보단 마법과의 융합을 시도하셨고, 그 때문에 검술의 성취는 더딘 편이었죠.”
계위에서도 상중하의 급수를 또 나눈다는데, 그자의 정확한 실력은 귀중(鬼中)이라 했다.
네르하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찬밥 신세였겠군. 나이에 비해 기대하는 성취가 더딘 데다, 소위 명가라고 부르는 자들이 그런 별종을 용납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
그것만으로도 바깥에선 나름 실력자로 알아줄 테지만 루시아의 가문이 대가문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루시아의 얼굴에 작은 그늘이 졌다.
“슬프지만 맞아요. 그야말로 외로운 싸움이었죠. 가문 내에선 완연한 무시로 방침을 정했고요.”
거의 30년간을 검술과 마법의 융합에 투자해 얻어 낸 결과는 처참했다.
아마 한길로만 팠다면 오래전에 그 윗단계인 왕(王)급에 도달하기에 충분한 재능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자의 성취 자체가 아니겠지.’
네르하는 살짝 흥미를 가지고 물었다.
“그래서 네가 가능성을 봤다면 그 기사의 무력이 드러난 사건이 존재할 텐데?”
루시아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제 가문 내에서는 일 년에 한 번 자신의 성취를 자랑하는 경연 대회를 열어요. 그런데 거기서 젊은 나이에 검왕의 경지에 오른 분이 나타났어요.”
젊다고는 해도 30대 중반 정도라는데, 초절정의 경지로 추정되는 검왕급을 30대 중반에 달성했다면 충분히 기재(奇才)로 칭송받아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 검왕급 기사는 경연의 상대로 그분을 지목했고…….”
“지목받은 그자가 검왕급 기사를 박살 냈다는 소리군.”
“네. 아주 압도적으로요.”
그녀의 말은 네르하의 흥미를 더욱 부채질했다.
‘절정 중간급의 무인이 초절정의 초입을 압도적으로 박살 냈다라.’
기습이나 상대가 지친 것이 아니라 만전의 상태에서 정면 대결로 꺾었다.
그야말로 하늘이 뒤집어져도 일어나지 않을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흥미롭군. 그래서 그 후로 어떻게 되었지?”
어째서인지 루시아의 표정이 살짝 우울하게 변했다.
“딱히,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응? 어째서지?”
“두 사람의 나이 차는 열다섯 살 이상이었고, 대부분의 평가는 그 기사가 한껏 방심하다가 기묘한 일격에 얻어맞고 패배한 것으로 치부되었거든요.”
“그놈들의 안목이 쓰레기인가, 아니면 인정하기 싫어서 은폐하려는 쪽인가?”
“그래도 명색이 제 가문의 어른들이신데 후자에 가깝다고 주장하고 싶군요.”
“뭐, 아마 그렇겠지. 설마 눈깔이 옹이구멍인 놈들만 있는 가문이라면 너 같은 녀석이 나오진 않을 테니.”
“…….”
그 말에 루시아는 꽤나 기묘한 눈으로 네르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표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래서? 너희 가문에선 딱히 치부로 취급되기만 할 뿐, 익히는 짓이 금지된 건 아닐 텐데 왜 그자에게 배우지 않고 이곳, 리브라로 온 거지?”
“한계가 있으니까요.”
루시아는 딱 잘라 이렇게 말했다.
“그분께서는 자신이 익힌 마법의 수준은 하찮기 그지없다고 하셨어요. 자신이 예상한 수치의 위력이 나오려면 최소 5레벨에 들어야 하는데, 독학과 자신의 굳은 머리로는 한계가 있다고 하셨죠.”
“그렇군.”
이곳, 리브라에서 졸업반 수준이 바로 5레벨이다.
아무리 최고 수준의 육성 기관이라 해도 리브라는 아카데미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수십 년을 수련했는데 고작 몇 년 내외 교육을 받은 마법사보다 못했다면 그런 자괴감 섞인 말이 나오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언젠가 한번 만나보고 싶은걸?”
네르하의 말에 대번에 루시아가 당황해하며 손을 저었다.
“어? 라, 라데우스의 직계분이 만날 정도로 그렇게 대단한 분은 아니신…….”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
루시아는 침묵했다.
“최소 두 단계 위의 실력자를 일방적으로 박살 낸 자다. 머리가 굳었다고 하지만 단순히 마법과 검술을 같이 배우는 것만으로는 절대로 그런 결과를 낼 수 없어.”
“그, 그건.”
“내가 이런 수법을 발명한 것처럼 그자 역시 그야말로 끝없는 궁구와 노력을 기울였을 거다.”
노력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길을 포기하지 않고 걷는 것이야말로 그자가 진정으로 대단하다고 여기는 점이었다.
“게다가 겉으로 보이는 경지만 일천하게 보일 뿐, 그자의 내면은 이미 완성 단계에 이르렀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 않다면 결코 절대적인 경지의 차이를 넘어설 수 없으니까.”
“……!”
‘무엇보다 정말로 형편없으면 네가 이렇게 리브라로 오지 않았겠지.’
네르하의 말이 뭔가 그녀의 마음속의 무언가를 건드렸을까?
루시아는 멍한 눈동자로 한동안 말없이 우두커니 자리를 지키기만 했다.
그렇게 한참 뒤에야, 그녀는 네르하를 직시하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외숙부께서 다른 누군가에게 인정받을 날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그게 하필 라데우스 가문의 인간에게일 줄은.”
“외숙부였나?”
“네.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기도 하죠.”
그녀는 한동안 희미한 미소로 네르하를 바라보았다.
“조금은 감동했어요. 이게 인연이라는 걸까요?”
은근히 경계하는 기색이 있었던 이전과는 다르게 그녀의 표정에는 자그마한 호의가 깃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본의 아니게 그녀에게 점수를 딴 듯싶었다.
* * *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
“네가 감동하든 말든 그건 별로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무드 브레이커 자식.”
“뭐라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루시아는 네르하의 삐딱한 시선을 회피했다. ‘좀 좋게 봐 주려고 하면!’이라고 꿍얼거린 것 같았지만 무시하고.
“중요한 건 결국 네가 목표로 하고 있는 남자가 누구냐는 거지.”
그 말에 대번에 루시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대답을 회피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살짝 한숨을 내쉬며 대략적인 신상만을 공개했다.
“제 가문이 낳은 최고의 천재예요. 그리고 다음 대 소가주로 유력한 이기도 하죠.”
“호오?”
루시아는 그 외의 정보는 철저하게 함구했다.
그럴 만도 했다. 그자의 대략적인 정체를 아는 순간 곧바로 루시아의 신상 역시 윤곽이 드러날 테니까.
“알 법하군. ‘최고’라는 소리는 너조차 범접할 수 없을 정도라는 소리고, 순수한 검술 경쟁에선 안 될 거 같으니까 가능성이 있는 다른 길을 찾다가 이곳에 이른 거군.”
“부정하진 않겠어요. 하지만 그의 재능은…… 아니, 재능이라고 설명하기도 힘들 정도죠.”
“호오?”
“그자는 그냥 괴물이에요.”
자조적인 그녀의 모습에 더욱 흥미가 돋는다.
네르하가 확인한 루시아의 재능은 그야말로 최상급.
아직 또래에선 다른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저렇게 포기한 것마냥 말한다는 건, 상대가 정말 대종사(大宗師)의 재능을 타고난 이라는 뜻.
“그래서 다 좋은데 기존의 길을 벗어나면서까지 그자를 꺾어야 할 이유가 있나?”
“그자는, 악마니까요.”
“괴물인데 또 악마라고?”
“가문 내에선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전 봤어요. 아니,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자가 저에게 보여 주었죠.”
“무엇을?”
“그자가 품은 끝없는 악의와 증오, 그리고 분노를요.”
“…….”
추상적인 말이지만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다.
살기나 기운 등을 외부로 표출할 때, 가끔씩 그것을 쌓아 온 존재의 본질이 나타나곤 하니까.
다만 그것을 의도적으로 내보낼 수 있다면 재능에 상관없이 상대는 애송이가 절대 아닐 것이다.
“전 그자를 끌어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제 가문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길지도 몰라요.”
루시아는 네르하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제게 그 기술을 가르쳐주세요.”
“흐음.”
여기서 좀 더 파 보면 루시아의 정체를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그랬다간 어느 순간 갑자기 확 사라져 버릴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이대로 루시아와 계속 연관된다면 생각보다 꽤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것만 같다.
‘귀찮은 일?’
피식!
네르하는 웃었다.
‘그래. 귀찮은 건 어디까지나 귀찮은 정도일 뿐이지.’
절대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은 아닌 것이다.
결정을 한 네르하가 입을 열었다.
“딱히 상관은 없겠지.”
“그렇다면!”
“단, 세 가지 조건이 있다.”
화색이 돌던 루시아의 표정이 다시금 시무룩해졌다.
“뭔데요?”
“첫째로, 앞으로 네 정체를 딱히 캐묻진 않겠어. 대신.”
손가락이 하나 올라갔다.
“리브라를 졸업하는 순간까지 절대로 내 뒤통수를 치지 말 것. 그게 설사 네 가문의 안위와 얽힌 일이라 해도.”
“……!”
마지막에 붙인 사족 덕분에 루시아는 딱히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기 시작했다.
네르하는 답변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두 번째 역시 이곳, 리브라 안에서는 무조건적으로 내 판단과 지시에 따를 것.”
두 번째 손가락이 올라갔다.
“마지막으로,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
사실 마지막 부분이 핵심이긴 했다.
“적어도 이 세 가지는 확답을 받아야 널 도와줄 수 있다.”
“……도와준다?”
네르하는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정도의 말만으로도 충분히 의지는 전해졌을 터.
“…….”
루시아는 한동안 네르하의 말을 곱씹었다.
하지만 의외로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좋습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이곳, 리브라에 있는 동안에는 가문의 이익과 존립에 관계없이 당신의 선택을 따르겠습니다.”
나름 그녀로서도 큰 결정을 한 셈이었다.
“좋아. 하지만 각오해야 할 거야.”
“무엇을 말입니까?”
“이 세 가지 조건 중에서 가장 어려운 건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니까.”
네르하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맴돌았다.
“아마 곧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거다.”
오싹!
“가, 갑자기 방금 말을 취소하고 싶어졌는데요.”
“허허, 강해지고 싶지 않은 거냐? 한 사람을 꺾고 싶다며?”
살짝 뒷걸음을 치는 루시아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내가 도와주지. 넌 강해질 거야. 네가 원래 도달했을 위치보다 더욱 높은 곳으로 이끌어 주지.”
“하, 하하…….”
바람 빠진 웃음을 짓는 그녀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대신 앞으로 날 위해 고생 좀 많이 해야 할 거다.
네르하는 그 말은 입안으로 삼켰다.
『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
사비연 퓨전 판타지 소설
(주)조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