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네르하 사단 (2)>
알페온은 제법 근성이 있었다.
물론 첫날 훈련을 고작 두 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지는 추태를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다음 날 훈련에 나왔다.
‘저게 정말 순수하게 강해지고자 하는 욕망이라면 정말 칭찬해 줄 텐데 말이야.’
훈련 내내 알페온의 시선이 루시아에게 고정되는 걸 보면 자연히 혀를 차게 된다.
‘그래도 버틸 수 있는 동기가 있는 건 좋지.’
알페온은 교관들의 열정적인 케어 아래 열심히 덤벨을 들고 발악하고 있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현재 알페온의 수준으로는 양의심공을 익힐 수 없다.
게다가 루시아나 바스톤처럼 아무런 무술적 기반이 없는 만큼 리브라를 졸업할 때쯤에야 네르하가 생각하는 전투 마법사의 기초가 잡힐 것이다.
‘단순히 단련만 계속한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드문드문 감당할 수 있는 실전이 조합되면 성장은 더욱 빨라질 거야.’
문제는 그 실전을 네르하가 임의로 컨트롤 할 수 있느냐는 것.
‘이 부분은 좀 생각을 해 봐야겠군.’
“백만 스물 하나아아아! 백만 스물 두우우우울!”
‘앞에 붙이는 저 의미 없는 백만 단위는 대체 뭘까?’
알페온의 말로는 어떻게든 루시아에게 근성을 보이려는 시도라는데 네르하의 눈엔 그냥 광대처럼 보일 뿐이지 효과가 있을런지는 글쎄?
“후후, 힘내세요, 알페온 경.”
“헉! 루시아 양! 가,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런 짓거리가 어느 정도는 통한다는 게 헛웃음이 나온다.
“뭐 어때요? 노력하는 모습이 귀엽게 보이는데요?”
루시아 본인이 이렇게 말하는데 네르하가 뭐라 할 말이 없다.
덜컹!
네르하는 스쿼트 50회를 채우고 헉헉거리는 알페온에게 다가가 어깨를 다독였다.
“그래도 예전처럼 지위로 누르려고 하진 않네. 발전했구나, 알페온.”
“저, 저도 정신을 차렸습니다. 이전의 제가 아니라고요.”
알페온은 땀에 범벅이 된 수건을 갈아 치우곤 힘없이 말을 이었다.
며칠 부대끼며 지내다 보니 네르하를 대하는 알페온의 말투가 상당히 자연스러워졌다.
“여기서 여러 놈들을 보며 깨닫게 되었죠. 정말 좋아하는 이가 있다면 지위가 아닌 나 자신을 어필해야 한다는 걸.”
“호오?”
“뭐, 온갖 잘난 놈들이 모인 곳이다 보니 가문의 후광을 업고 다른 여생도들에게 수작을 부리는 녀석들이 몇 보이더군요.”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네르하는 살짝 흥미를 가지고는 은근히 물었다.
“뭘 어떻게 되긴요. 전부 까였죠. 사실상 모두가 팔려 온 처지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상대도 이름값이 있는 자들뿐이니까요.”
특히 그냥 마법사도 아니고 전투 마법사가 되기 위해 리브라의 문을 두드린 여성들은 라데우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파견된 삼남, 사남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기본적으로 마법에 진심으로 미친 자들이며, 그런 만큼 당연히 연애에 관심이 있을 리가 없다.
알페온도 다른 녀석들이 철벽에 부딪힌 것처럼 나가떨어지는 걸 보고 뒤늦게 알아차렸다.
“여기서 가문으로 뭘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건 형님뿐일걸요?”
“음, 그게 기뻐해야 할 소식인지 아닌지 헷갈리는군.”
딱히 그럴 생각도 없고, 네르하의 정신 연령은 50대가 넘어간다.
클로이아 수준의 연배라면 몰라도 이제 막 성인의 문턱을 밟은 녀석들과 연애를 한다는 건 네르하에겐 그다지 잘 상상이 되질 않는 일이었다.
그때, 알페온이 뜬금없는 말을 내뱉었다.
“아, 그리고 어쩌면 얼마 후면 여기에 다른 녀석들도 많이 찾아올 가능성이 큽니다. 미리미리 교관들과 친해져야 하나라도 더 봐주겠죠.”
“응? 그건 무슨 소리냐?”
네르하의 반문에 알페온은 표정을 살짝 구겼다.
“형님, 진짜 라데우스 가문 맞습니까? 아니, 이 정도까지 오면 그냥 외부 정보엔 아무런 관심이 없는 수준인데요?”
“내가 좀 무신경하긴 하지. 그래서 뭔데?”
원래 네르하의 위치라면 약간만 발품을 팔아도 일반적인 학생 이상의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네르하는 강해지는 것 외에 다른 것에 신경을 쓸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무엇보다 이런 식으로 때가 되면 알아서 정보를 물어 오는 알페온 같은 녀석이 있지 않은가?
“말해라, 정보원.”
“…….”
씨익 웃으며 어깨에 손을 얹는 네르하를 본 알페온은 뭔가 불손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얼마 후면 라데우스 가문의 무기 수여식이 열리지 않습니까?”
“아, 무기 수여식?”
아무리 외부 정보에 무감각하더라도 굵직굵직한 이벤트 정보는 기본적으로 알고 있다.
무기 수여식은 이곳, 리브라만이 아닌 마법사 인생에서 거의 평생을 함께할 ‘메인 아티팩트’. 즉, 병장기를 얻는 이벤트였다.
굳이 아티팩트 수여식이 아니라 무기 수여식이라고 이름 붙인 이유는 리브라가 전투 마법사를 육성하는 기관이기에 그런 것이었다.
“그게 왜?”
“형님, 진짜로 훈련 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군요.”
“빨리 말해.”
“일단 말씀드리기 전에 무기 수여식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아십니까?”
“몰라.”
깔끔한 부정에 알페온의 인상에 주름이 한 줄 추가되었다.
하지만 알페온은 성실하게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알페온의 설명을 듣기 위해 바스톤과 ‘루시아’가 잠시 수련을 멈추고 이쪽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끄응! 일단 무기 수여식은 이곳, 리브라에 오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입니다. 굳이 전투 마법사가 되어 라데우스 가문에 목줄…… 크흠! 구속받는다고 하더라도요.”
귀족가의 자제가 리브라에 오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하위 가문이 라데우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제공하는 인질. 혹은 정말로 전투 마법사를 꿈꾸고 있거나 개인적인 성취를 위해 스스로 문을 두드리는 경우.
굳이 뇌물같이 줄을 대기 위한 간단한 작업이 있는데, 굳이 직접 리브라에 들여보내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무기 수여식 때문이란다.
“라데우스 가문은 천여 년이 넘는 역사를 이어오는 동안 수많은 아티팩트를 수집해 왔죠. 그들의 창고에 박혀 있는 아티팩트 숫자는 못 해도 만 단위가 넘을 겁니다.”
“오호.”
“그리고 라데우스 가문은 자신의 그늘에 들어온 이들에겐 절대로 인색하지 않죠. 리브라를 보면 알겠지만 오히려 어느 가문보다도 후하게 대접하는 편이에요.”
“그렇군.”
‘아니, 근데 내가 왜 이걸 라데우스 직계에게 설명하고 있는 거지?’
알페온은 인상을 찡그리며 잠시 몰려온 인지 부조화를 몰아냈다.
“어쨌든, 이 무기 수여식에서 얻을 수 있는 메인 아티팩트는 본인의 운과 역량이 아주 중요합니다.”
“운과 역량이라고?”
“세간에 알려진 아티팩트의 급수는 총 10등급으로 나뉩니다. 그리고 이곳, 리브라에서 벌어지는 무기 수여식에서는 최소 5등급 이상, 운에 따라 최고 등급인 1등급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요.”
사실상 0등급인 신화시대의 유물까지는 아니더라도 1등급이면 능히 세상에 흘러나올 경우 당장 국가 간에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물건이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무림십대기병…… 정도라는 느낌이군.’
알페온의 말이 이어졌다.
“그 최소치인 5등급이라고 해도 바깥에선 특 A급. 사실상 유물급의 시작이죠. 초일류 트레져 헌터들이 평생을 바쳐도 세 개 이상 발굴하는 게 힘들 정도예요.”
보통, 명성이 높은 마탑에서 장로급 이상이 주관해 만드는 아티팩트가 7에서 8등급 정도로 취급받고, 그것의 가격은 성 하나 값이라고 한다.
“그것도 돈을 주고 살 수 있을 때의 경우고, 보통은 연 단위로 기다려야 어떻게 협상을 시도할 수 있죠. 하지만 라데우스는 그런 유물급 아티팩트들을 리브라에 입소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제공합니다.”
사실상 가문의 무력을 책임져 줄 얼굴들이니 라데우스 정도 되는 체급이라면 어찌 보면 이해할 수 있는 투자였다.
네르하는 살짝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좋아. 우리 가문에 대한 찬양은 그 정도면 되었고, 내가 원하는 걸 이제 말하도록 해.”
알페온은 살짝 목청을 가다듬더니 체력이 약간 돌아왔는지 살짝 활기를 띤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무기 수여식에서 얻을 수 있는 아티팩트는 완전히 랜덤입니다.”
“랜덤이라고?”
“세부 조건이 있는 것 같지만 외부인으로선 그걸 알 수 없으니 랜덤이라 말하는 겁니다. 다만 급수에 따른 차등 관계는 확실히 있죠.”
네르하는 알페온이 뒤에 할 말을 예상했다.
“강한 놈이 좋은 물건을 먹는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렇죠. 무엇보다 무기 수여식은 ‘실제 전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더더욱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요.”
네르하는 혀를 찼다. 그제야 이제 곧 이곳에 사람이 몰려온다는 말의 뜻을 이해했다.
“쯧! 한마디로 짧은 시간 안에 역량을 끌어올리기 위해 뭔 짓이든 한다는 소리군.”
“그렇다기보단…… 이번 기수에서 가장 성적이 좋은 이들이 마법서 서고가 아니라 이런 곳에 박혀 있으니 분명 뭔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녀석들이 많다는 거죠.”
“그게 그거지.”
평소에 공부 하나 안 하다가 시험 기간 다가오자 벼락치기를 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알페온은 바깥에서 이 정보를 알고 오는 건 라데우스 가문 외엔 아무도 없다며 항변했지만 네르하가 보기엔 어차피 변명에 불과했다.
‘흠,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얻어야겠군.’
그걸 물어볼 상대라면, 이미 정해져 있었다.
* * *
“맞아요. 무기 수여식은 리브라의 가장 큰 행사 중 하나라고 해도 무방하죠. 졸업식과 더불어 라데우스의 가주께서 직접 찾아오시는 단둘뿐인 날이니까요.”
수여식에 대한 나머지 정보는 몰래 만난 클로이아가 설명을 해 주었다.
“그리고 강한 자가 좋은 아티팩트를 얻는다는 것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에요. 이 이상 내용 유출은 비밀이라 말할 순 없지만요.”
네르하가 물었다.
“그럼 클로이아, 넌 어떤 아티팩트를 얻었지?”
“이거요.”
클로이아는 팔을 들어 자그마한 팔찌를 보여 주었다.
평소 입고 있던 정장에 가려 외부에 노출이 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급수로 따지면 2급과 3급의 중간 등급이죠. 레전더리 클래스예요.”
“좋은 거야?”
“당시 기수 중에선 두 번째로 좋은 거였어요. 이걸 얻고 한 달 뒤에 5레벨에 올랐으니까요.”
저렇게 말하니까 딱히 대꾸할 말이 없다.
“결국 마법사에게 메인 아티팩트란 검사가 명검을 얻는 것 이상의 의미예요. 보통, 기수의 80% 이상이 5급을 얻는다지만 그것만으로도 마의 구간이라는 5레벨을 젊은 나이에 돌파할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되니까요.”
확실히 좋은 교육, 좋은 영약과 더불어 좋은 무기는 리브라에서 5레벨을 대량으로 배출할 수 있는 원동력일 것이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자.
네르하는 걱정되는 것이 있어 클로이아에게 물었다.
“흠, 만약 원하는 무기를 얻지 못하면 어떻게 되지?”
“어지간해선 자신의 성향과 최대한 비슷한 아티팩트를 얻어요. 하지만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클로이아는 잠시 생각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규칙상 라데우스 가문의 장인들이 직접 주문 제작을 해 줘요. 다만 이럴 경우 급수가 많이 떨어지죠. 잘해 봐야 6등급, 보통은 7등급?”
“내 손에 맞지 않으면 아무리 등급이 높아도 무용지물이야.”
예를 들어 일반적인 마법사들이 애용하는 스태프 계열일 경우, 아무리 급수가 높아도 네르하에겐 있으나 마나다.
“글러브 같은 아티팩트가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야.”
“뭐, 그걸 생각하기 전에 일단은 좋은 성적부터 내는 것이 우선 아닐까요?”
클로이아의 눈이 살짝 가라앉았다.
“특히 당신에겐 이번 수여식은 정말 큰 기회가 될 테니까요.”
『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
사비연 퓨전 판타지 소설
(주)조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