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마나 블래스트 (2)>
단순히 공중에 떠 있는 것만이 아니었다.
네르하의 정수리에서 오색의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그대로 세 개의 연꽃이 피어나 전신을 휘감기 시작했다.
“저건…… 로터스 꽃? 남쪽 대륙에서나 볼 수 있는 희귀한 꽃인데 저렇게 형상화되다니?”
한 교수가 그 모습을 보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교수들 모두가 한마음으로 느끼고 있는 감정이 있었다.
“거 무지하게…… 화려하네?”
적어도 일반적인 마법사가 보일 수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다른 교수 역시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어떤 마나 연공법을 익혀야 저런 광경이 나오는 거죠?”
누군가의 말에 기록을 담당한 교수가 답했다.
“폐기된 자료이긴 하지만 지난 10여 년간 라데우스 직계들의 영약 복용 기록이 있어요. 하지만 그 누구도 저런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습니다.”
교수들의 시선이 은근슬쩍 부학장 네슬렉에게로 향했다.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나 리브라에 있지만 그 역시 라데우스의 직계. 네슬렉이라면 뭔가 아는 것이 있을 터였다.
“으음!”
하지만 네슬렉 역시 이런 경우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네슬렉은 살짝 화제를 돌렸다.
“10년이면 지금 경쟁 중인 후계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겠군.”
“네. 장녀인 마하부터 사남인 바멜 라데우스까지. 소가주 도전 권한이 없는 다른 직계들까지 합하면 모두 서른 정도입니다.”
라데우스의 직계들은 모두 같은 마나 연공법을 익힌다.
그 후에 어떤 영약을 먹든 어떤 마법 계통을 익히든 그건 나중의 문제고…… 적어도 연공법 자체는 직계 모두가 같은 걸 익힌다는 것이 네슬렉이 아는 상식이었다.
‘그럼 저건 뭐지?’
라데우스 가문의 비전 연공법은 익히기 시작하면 은은한 은빛을 띤다.
그것이 숙달될수록 은빛은 점점 진해지고, 나중에는 ‘스타 플래티넘’이라 불리는 라데우스 가문 고유의 찬란한 백금색 마나를 지니게 된다.
‘설마 가문의 연공법을 버리고 다른 걸 익혔을 리는 없고.’
그건 사실상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인 짓이다. 라데우스의 연공법 이상의 것은 이 대륙이 존재하지 않으니까.
“이번에 만든 마나 블래스트의 성분표를 다시 한번 분석해 보게. 아무래도 이번에 만든 영약이 가문의 연공법과 합쳐지면 뭔가 특수한 현상을 일으키는 것 같군.”
결국 네슬렉이 내린 결론은 이런 쪽일 수밖에 없었다.
“아, 알겠습니다.”
연단을 담당하는 교수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들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재료의 질에 대한 차이는 있어도 다른 성분이 들어갔을 리는 없을 텐데?’
당연한 말이지만 가장 중요한 비밀인 영약의 연단을 담당하는 이들 역시 라데우스 가문의 혈족들이었다.
가문의 비전을 이어 수십 년을 연단에만 공을 들인 만큼 설사 배합에 실수가 있을지언정 재료를 잘못 넣는 건 절대 있을 수가 없었다.
“아, 미안하군. 자네들을 의심하는 건 아니네. 자네들도 보고 있지 않나?”
네슬렉은 그제야 자신의 배려가 부족함을 눈치챘다.
“네르하가 저런 강렬한 기세를 보이는 건 오히려 기쁜 오산이 아니겠는가? 그 원인이 영약에 있다면 그건 과오가 아니라 자네들의 공이겠지.”
“그, 그렇습니다.”
그제야 그들의 표정이 조금은 펴졌다.
“기록 담당관들은 다른 모든 경우를 뒤져 네르하 같은 케이스가 있는지 찾아보게. 이건 마법이 한 단계 더 발전할 가능성을 품고 있으니.”
“예. 부학장님!”
기록 담당관들의 표정이 흥분으로 번들거렸다.
그들 역시 과거 네르하의 악명(?)을 알고 있었다.
그런 네르하가 갑자기 기묘하고 어마어마한 모습을 보이니 마법사로서 흥미가 일 수밖에 없었다.
‘머르딘 공의 말처럼 정말로 내가 녀석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었나?’
은은한 오색 광채의 질은 아무리 낮게 봐줘도 5레벨의 마법사가 내뿜는 기세를 넘어섰다.
‘바멜의 함정을 정면으로 파훼했다더니.’
그 소문은 정말이었는가?
네슬렉은 살짝 침음을 흘렸다.
* * *
그렇게 네르하의 운공에 많은 이들의 시선이 모인 가운데.
네르하는 천천히 정신을 무의식의 바다에서 건져 내었다.
‘음, 이 정도면 되겠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무의식을 조절해 운기에 전력을 다하지 않았으니 나름 성공이라 할 수 있었다.
‘마나 블래스트는 확실히 중원에서도 보기 드문 최상급의 영약이 맞군.’
특히 영약 자체에 벌모세수(伐毛洗髓)를 해 주는 기능이 있어 중원의 어떤 영약보다도 체내의 기초공사를 확실하게 다져 주는 효과가 있었다.
‘잠재력의 발현을 최대한 줄이고 육체의 내실을 다지는 데에만 집중했으니 그리 크게 주목받진 않았을 거다.’
다만 네르하가 한 가지 착각한 것이 있었다.
외부의 평가가 좋지 않고, 오성이 달려 성취가 떨어졌을 뿐 ‘네르하’의 육체는 엄연히 직계에 걸맞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원래 주인이 떠난 육체는 ‘신무조’의 영혼과 만나 개화했고, 그것이 마나 블래스트를 통해 폭발적으로 터져나갔다.
만약 네르하가 운기 중에 외부에 삼화취정(三花聚頂)의 경지를 보였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렇게 좋아하진 않았을 것이다.
“자네가 마지막일세, 네르하 라데우스.”
“시간이 얼마나 지났습니까?”
“3일이 지났지. 대부분의 신입생들은 2일 차에 전부 이곳에서 퇴소했네.”
“그렇군요.”
네르하는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나가보게. 자네 덕분에 투입된 교수들 대부분이 아직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으니.”
“예이…….”
네르하는 늘어진 목소리로 네슬렉이 연 출구를 향해 나아갔다.
운기의 영향으로 몸엔 활력이 넘쳤지만 정신은 휴식을 요구하고 있었다.
“흐으음.”
그렇게 네르하가 자리에서 빠져나가고.
네슬렉은 네르하가 운기를 끝낸 장소를 살폈다.
이미 일이 다 끝났으니 다른 교수들을 보내도 되었지만 워낙 궁금증이 도져 다시 찾아왔다.
“뭔가, 이 악취는?”
네슬렉은 인상을 찡그렸다.
제어실에선 느낄 수 없었던 역하고 매캐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하지만 그 불쾌감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이거, 설마…….”
네슬렉의 머릿속에 한 가지 단어가 불현듯 떠올렸다.
“하이퍼 리저버네이션(Hyper Rejuvenation)?”
기사들이 지고한 경지를 넘을 때 보인다는 특유의 현상.
전신의 모든 노폐물이 빠져나오고 피부와 골격이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는 제왕의 경지.
‘마나 블래스트를 한 번에 절반 이상 소화할 수 있다면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알려져 있긴 한데?’
개인의 힘으로 소화할 수 있는 양은 기껏해야 20% 정도.
나머지 80%는 리브라를 졸업할 때까지 천천히 녹이는 것이 정상이었다.
게다가 네르하가 복용한 마나 블래스트는 그중에서도 최상급이지 않았던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만약 네르하에게 그런 짓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그 재능은 능히 가문의 역사를 통틀어서도 순위권에 들 정도일 것이다.
“정말로 네르하가 바스텔을 뛰어넘는 인재란 말인가?”
바스텔 로저 라데우스.
라데우스 가문의 장남이자 사실상의 소가주.
더 높은 경지를 원하는 그의 구도자적인 성격 때문에 아직 라데우스 가문의 후계 경쟁에 잡음이 벌어지고 있지만 그가 제대로 마음을 먹을 경우 후계 경쟁이 곧바로 끝난다는 것은 가문의 모든 원로들이 인정하고 있었다.
‘네르하와 네이하라…….’
네르하의 동생, 네이하 라데우스의 재능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바스텔과 같은 나이대에 4레벨을 뚫어 가주의 관심과 이쁨을 독차지하고 있다는 소문은 네슬렉 역시 익히 들어 알고 있으니까.
그런 그 아이를 가주로 만들기 위해 셋째 부인 로젤리아가 온갖 수를 쓰고 있다는 것 역시 가문 내에선 유명한 일이었다.
‘네르하는 네이하를 위한 스페어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설마 그 반대였다는 건가?’
사실, 네르하를 낳았을 때만 해도 가문 내에서 로젤리아의 입지는 그야말로 풍전등화나 다름없었다.
가문에서 로젤리아를 바라보던 시선은 가주가 취미로 얻은 애첩이나 다름없었고, 그녀 못지않게 권력욕이 심한 둘째 부인 유리아 라데우스의 견제로 인해 언제 처가로 쫓겨나도 이상할 게 없는 처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네르하의 재능이 외부에 알려진다면 암살당해도 이상할 게 없었겠지.’
아무리 존속살인이 가문 최고의 중죄라지만, 그 죄를 물으려면 어디까지나 증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유리아는 능히 그 증거를 인멸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여인이었다.
‘리브라에 들어가기 전까지 네르하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그 재능과 오성을 숨긴 건가?’
지금, 네르하가 보여 주는 모습과 과거의 상황을 대입해 유추한다면 결론은 이것밖에 나오지 않았다.
“후, 후후후!”
“부학장님,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네슬렉이 나오지 않고 계속 어물쩡거리자 의아함을 느낀 교수들이 그를 뒤따라왔다.
“흐, 크흐흐, 크하하하! 재밌군. 아주 재밌겠어!”
하지만 네슬렉은 그런 교수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광소를 터트렸다.
“바람이 불겠구나. 아주 거친 바람이!”
그 바람이 경직된 후계 구도에 활력을 불어넣을 순풍일지, 아니면 모든 질서를 파괴할 피바람일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무것도 아니다.”
가볍게 손을 털어낸 네슬렉은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오며 과거를 회상했다.
‘이번 수여식은 아주 재밌어지겠군.’
그는 과거, 후계 전쟁에서 자신보다 훨씬 어렸던 현 가주, 카이젤에게 패배했던 적이 있었다.
나름 그때의 상황에 후회는 없었지만 네슬렉은 과거, 패기와 혼돈이 넘쳤던 라데우스의 후계 전쟁을 상기하며 네르하의 약진을 기원했다.
‘확실히 지금은 너무 경직되어서 재미가 없지. 야심이 충분한 놈들이 수면 밑에서만 움직이며 주변 눈치나 보고 말이야.’
리브라에 들어오기 전에 폐관이란 명목하에 자신의 역량을 드러낸 것은 판을 뒤흔들겠다는 자신의 선언이었을까?
‘그런 의도를 가졌든 가지지 않았든 앞으로 녀석의 존재가 판을 뒤흔들 거라는 건 확실하군.’
네슬렉은 웃으면서 말끝을 흐렸다.
“이번에 바깥에서 쥐새끼 몇이 기어들어 온 것 같은데, 놈들을 이용해서 판을 키워 볼까?”
곧 다가올 수여식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틈타 제법 공을 들인 듯했지만, 결국 네슬렉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약간의 피와 혼란 정도는 용납해 주겠지요, 가주? 흘흘흘!’
* * *
마나 블래스트를 복용하고 며칠이 지난 뒤.
네르하는 저 멀리서 리브라를 향해 다가오는 거대한 일련의 무리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왔군.”
아직 좁쌀만 하게 보일 정도로 먼 거리에 있었지만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기세를 풍기고 있는 자들.
“정말로 시작되는군요.”
“…….”
성벽 위에서 네르하와 함께 있던 바스톤과 루시아 역시 긴장된 표정으로 이곳으로 오는 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들은 이 세계의 한 축을 담당하는 라데우스 가문.
그중에서도 진정으로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저자가 가주로군. ‘네르하’의 아버지.’
수많은 호위에 둘러싸여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중년의 사내.
라데우스 가문 27대 가주, 카이젤 아우구스트 라데우스.
훗날, 가문의 손과 발이 될 인재들을 독려하고자 그 거인이 직접 이곳에 행차하고 있었다.
『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
사비연 퓨전 판타지 소설
(주)조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