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라데우스 무기 수여식 (3)>
지정된 열 명의 신입생들이 마법진 위에 올랐다.
대부분이 긴장으로 경직된 모습을 보이던 때, 단 두 명만이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며 인스턴스 던전 안으로 이동했다.
그중 한 명, 배커의 모습을 알아본 몇몇 이들이 눈을 빛냈다.
“첫 시작부터 방계의 아이가 나오다니 이것 참, 흥미롭군요.”
“마나 패턴을 보면 라디어 계파로군요. 이름이 배커였던가요?”
당연한 말이지만 배커의 등장은 이 자리에 참여한 원로들의 관심을 제법 끌었다.
본래 직계가 리브라에 들어가는 건 이삼 년에 한 번 정도고, 보통은 방계의 인물이 각 기수의 에이스를 차지하곤 했다.
“과연 몇 단계까지 통과할 수 있을지…….”
“4단계만 넘어도 훌륭하다고 볼 수 있죠.”
그렇게 대부분의 이목이 배커에게 끌렸을 때.
정작 가장 중요한 가주의 눈은 다른 이를 보고 있었다.
“공주가 첫 번째로 나왔을 줄은 몰랐군. 일부러인가?”
가주의 혼잣말을 들은 루트비히가 대답했다.
“첫 번째 순서에 더해 나름 인정받는 가문의 방계와 섞는다면 아무래도 주목도가 덜하겠지요.”
루트비히는 나름대로 그녀의 존재를 숨기려는 꾀를 낸 것이었지만 카이젤의 눈에는 별로 효과가 없어 보였다.
“사자의 새끼는 아무리 숨기려 해도 사자인 게 들통날 수밖에 없거늘.”
“그것도 분야 나름입니다.”
루트비히는 자신 있게 말을 이었다.
“이곳은 마법의 세계. 아무래도 검을 수련한 공주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이곳에서 두각을 보이는 건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도 이런 초창기에는 말이죠.”
“흠, 과연 그렇게 될지.”
카이젤은 나름 회의적인 시선으로 루시아를 바라보았다.
‘마나의 흐름이 안정적인 걸 보면 잘 연마했군. 계속 가문에 있었다면 제법 그럴듯한 검수가 되었을 텐데.’
‘그’와의 의리로 그녀를 받아주고 이렇게 무기 수여식까지 참가시켜 주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리브라에 찾아온 건 자기 잠재력을 깎아 먹는 짓이나 다름없었다.
‘뭐, 곧 알게 되겠지. 네르하와 어울리고 있다는 보고는 들었는데 과연 어떤 모습을 보일지 조금은 기대되는군.’
카이젤의 눈이 대기석에 있는 네르하에게로 향했다.
수하의 보고로는 그리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고 한다.
가문의 최고 전력인 삼마자, 머르딘과 조우하고 최상급의 마나 블래스트를 복용했다는 것은 들었지만 그건 변하고 난 뒤의 일이지 변하게 된 계기 자체가 아니었다.
‘굳이 계기를 찾을 필요는 없겠지.’
네르하가 예상을 깨고 성장했다면 무엇보다 좋지만.
만약 아니라면 기대를 접으면 그만인 일이다.
어차피 가문의 뒤를 이을 이들은 많다.
설사 네르하가 마족에게 영혼을 팔아 흑마법사가 되었다거나, 혹은 마족이나 역으로 네르하의 육체를 빼앗았다는 가정을 해도.
‘라데우스’라는 가문은 그런 것에 쓰러질 정도로 절대 허약하지 않았다.
* * *
루시아는 사방이 빛으로 가득찬 거대한 공동의 내부에서 눈을 떴다.
‘역시 라데우스 가문은 신기한 걸 많이 가지고 있구나.’
이곳은 라데우스 가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인스턴스 던전, ‘루드라의 시련’.
정보원의 말에 따르면, 과거 라데우스의 가주이자 마탑주를 겸비했던 괴짜인 카르안 라데우스가, 신수(神獸) 루드라와 9개체의 영수들을 물리친 걸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 한다.
각 단계마다 과거 루드라의 수하인 영수들이 튀어나오며, 처음엔 단순한 하급 몬스터 수준이었다가 단계를 거칠수록 실제 강함이 진짜 영수의 수준으로 올라간다고 하는데…….
지난 30년을 통틀어 마지막 10단계인 신수 루드라를 꺾은 이는 단 한 명도 없었고, 그나마 12년 전 라데우스의 희망 바스텔 로저 라데우스가 루드라에게 도달한 것이 최고 기록이었다고 한다.
‘분명 작년 기수의 최고 기록은 5단계.’
수여식에서 최상위권을 차지한 이들은 대부분이 라데우스의 직계들로, 그들의 기록은 6에서 8단계를 왔다 갔다 했다.
그 8단계도 삼남 아르바 세타 라데우스와 당대 서리 일족의 천재인 클로이아 블루벨벳이 세은 기록으로, 그 외의 직계나 방계는 8단계에 이르지도 못했다고 한다.
‘깨 주지, 그 기록.’
루시아는 호승심을 느끼며 앞으로 나아갔다.
비록 리브라에 들어와 검술 훈련은 소홀히 했다지만 그 손해를 메울 정도로 혹독한 육체 단련과 마법 수련, 그리고 융합 수련을 거듭했다.
적어도 지금의 자신은 허겁지겁 가문을 뛰쳐나왔을 때의 자신보단 약하지 않았다.
* * *
‘흠, 제법 하는데?’
네르하는 멋지게 첫 번째 영수를 쓰러뜨린 루시아를 보고 감탄했다.
곰과 같은 덩치의 맹수를 맞이하고도 침착하게 보법을 밟아 파이어볼을 캐스팅해 쓰러뜨렸다.
‘1단계는 덩치만 클 뿐이지 동작도 느리고 영수의 권능 같은 것도 사용하지 않는군. 하긴 저건 그냥 겉껍질만 비슷하게 구현한 마법생명체일 테니.’
네르하는 다른 화면도 바라보며 전황을 살폈다.
‘확실히 첫 번째에 탈락한 녀석은 없군.’
수여식에서 단 1승만 올려도 제대로 된 무기를 얻을 수 있었다.
첫 번째로 선출된 녀석들 전부가 나름 배짱과 실력을 고루 갖춘 걸 보면, 손님들에게 흉을 보이지 않게 일부러 그런 녀석들을 위주로 뽑았을 것이다.
아무래도 처음부터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이면 분위기가 영 달아오르지 않겠지.
그때, 네르하의 귀에 아는 이름이 흘러들어 왔다.
“호오, 역시 괜찮은 실력이군요. 배커 라데우스. 역시 이번 기수의 필두라 불릴 만합니다.”
“길레드 원로가 무척 좋아하겠군요. 아들이 저렇게 훌륭하게 장성했으니.”
그 말마따나 루시아 바로 다음으로 배커가 첫 번째 영수를 가볍게 쓰러뜨리고 당당하게 영수의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녀석이 지닌 지팡이엔 은은한 뇌기가 서려 있었는데, 정황상 전격 마법으로 영수를 쓰러뜨린 듯했다.
‘표정이 그리 밝진 않군. 아무래도 내 조언을 따르진 않은 것 같은데?’
그래도 곳곳에 고민하고 또 나름대로의 고민을 겪은 흔적은 보인다.
아마 두문분출한 이유가 개인적인 수련 때문이었나?
‘조금, 아니, 많이 아쉽지만 그래도 자만심을 버리고 정진하게 된 것은 나쁘지 않아.’
배커는 무감정한 표정으로 다음 단계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치직! 치지직!
‘음, 화면이 끊겼군.’
1단계가 끝나고 2단계부터는 수여식 도전자들에겐 비공개로 전환되었다.
1단계야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게 주최 측에서 배려한 것이지만, 2단계부터는 얄짤 없는 듯했다.
구경거리가 사라진 네르하는 조금 심심해졌지만 그래도 명상으로 시간을 때우고자 눈을 감았다.
웅! 웅! 웅!
네르하가 익힌 중원의 마나 연공법, 천원무극신공의 기운이 천천히 내부에서 소주천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네르하의 감각이 극한으로 날카로워지며 주변의 모든 기운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응?’
민감해진 감각이 어떤 ‘기운’을 발견한 순간, 네르하는 일순 눈을 깜빡였다.
‘……어?’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네르하가 아주 잠깐이나마 감지했던 그 기운은 절대로 이곳에서 느껴져서는 안 되는 기운이었던 것이다.
‘마기?’
홱!
네르하의 시선이 그대로 마기가 느껴졌던 곳으로 향했다.
‘……!’
그곳은 바로 본가에서 파견 나온 라데우스의 마법사들이 있는 장소.
그것도 이번 수여식이 벌어지는 인스턴스 던전을 관리하고 있는 자들이 있는 곳이었다.
‘이런 미친.’
아주 찰나의 순간 감지한 것이라 저들 중 누가 범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네르하가 잘못 감지한 건 절대로 아니었다.
‘곤란하군.’
이제 와서 수여식을 중단할 수는 없었다.
이미 대중들 사이에 섞여 있는 이상, 강제로 중단하려 했다간 놈인지 놈들인지 모를 것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네르하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혼자 해결할 수는 없다.’
지금 상황은 어디까지나 돌발 상황.
개인의 무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네르하는 재빨리 관람석을 훑어 자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존재를 찾았다.
그 조건은 세 가지.
‘첫째, 절대로 적이 아닐 것. 둘째, 곧바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자일 것. 셋째, 설사 일이 잘못되어도 최소한의 피해로 덮을 수 있는 권력자일 것.’
그 조건에 부합하는 후보는 두 명.
하지만 네르하는 그 두 명 중 가장 확실한 이에게 전음을 보냈다.
―가주님.
라데우스 가문의 가주, 카이젤 아우구스트 라데우스의 시선이 천천히 네르하에게로 향했다.
―던전의 관리자 중에 흑마법사가 있습니다.
아주 잠깐의 침묵 후에, 답변이 왔다.
―근거는?
카이젤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 마나를 사용해 의사를 전달해 왔다.
―마기를 느꼈습니다.
―너의 착각으로 끝날 말이 아니다. 그 말에 책임질 수 있겠느냐?
이미 가주에게 전음을 보낸 이상, 여기서 책임질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물론입니다.
―만약 거짓이면 너뿐만 아니라 네 어미와 동생에게까지 큰 피해가 갈 것이다. 너는 리브라에서 쫓겨나는 것은 물론, 후계자 권리를 박탈당할 것이다. 다시 한번 묻겠다. 마기를 느꼈다고 했느냐?
카이젤은 로젤리아와 네이하까지 언급해 가며 네르하를 추궁했다.
하지만 네르하는 일말의 동요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
거대한 사건이 벌어질 수 있는 상황임에도 카이젤은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이 살짝 웃었다.
―좋다.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아주 잠깐 마기를 느꼈을 뿐,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아직 어느 것도 확정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그들의 목적을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그다음에야 대응 방안을 세울 수가 있습니다.
―그 대응 방안을 내게 묻는 것이냐?
그 말에 이번엔 네르하가 웃었다.
―그렇다면 굳이 가주님께 먼저 말씀드릴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호오?’
네르하의 맹랑한 말에 카이젤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그에 뒤이어 네르하가 거래를 제안해 왔다.
―제 차례를 가장 나중으로 미뤄 주십시오. 그 안에 놈들의 실체를 알아 오겠습니다.
아마 한 팀당 이루어지는 시험 기간은 약 30분.
산술적으로는 다섯 시간. 중간중간 휴식 시간을 포함해도 한나절은 족히 걸릴 터.
―그 안에 네 손으로 이 일을 해결하겠다?
―저 혼자 해결할 일이면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겠죠. 어디까지나 피해를 줄이거나 아예 없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카이젤은 모든 상황을 찍어 누를 힘이 있지만 그렇다고 섣불리 움직이면 상대 역시 타초경사처럼 튀어 오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떤 피해가 발생할지 예상이 되지 않았다.
카이젤 역시 그 점을 확실히 인지했는지 네르하의 발언에 긍정했다.
―좋다. 학장에게 말해 네 차례를 맨 뒤로 미루지. 네가 자리를 비워도 문제없게 조치해 주겠다. 그러면 되겠느냐?
―충분합니다.
카이젤이나 근처의 누군가가 자리를 비웠다간 그들은 곧바로 반응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 비하면 찌끄레기나 다름없는 네르하가 자리를 비우면 그냥 의아해할 뿐 경계하진 않을 것이다.
네르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신형을 돌려 대기실에서 벗어났다.
‘내 요람에 장난질을 치는 놈이 있다면…… 그게 누가 되었든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네르하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
사비연 퓨전 판타지 소설
(주)조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