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판데모니움 (2)>
“후우…….”
배커는 긴 싸움의 끝을 맺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6단계.
이게 어느 정도의 성적인지 정확히 판단되진 않지만 관객석의 원로들이 괜찮은 반응을 보이는 걸 보면 적어도 나쁜 성적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7단계를 앞두고 탈진해 기권을 선언한 배커는 지금껏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고 자부했다.
이전, 외부 실습에서 네르하에게 팩트라는 이름의 모욕을 당한 배커는 자신이 고생해서 만든 인맥조차 내팽개치고 수련에 정진했다.
오로지 그 말을 그놈에게 되돌려 주기 위해.
상처를 입은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그때부터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괜찮은 성과를 내었다고 생각했다.
―고생이 많았다, 배커 라데우스.
인스턴스 던전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오자 어느새 배커의 눈앞에는 보물전의 특급 관리자이자 수호자인 인공 정령, ‘페레스’가 나타나 있었다.
눈꽃 사슴의 형태를 하고 있는 페레스는 배커를 향해 부드러운 어조로 격려의 말을 건넸다.
―6단계라……. 역대 라데우스의 직계들에게도 밀리지 않는 출중한 재능이다. 지난 기수 중에선 6단계를 뚫은 이가 없었으니 네 성과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페레스로서는 나름 최대한의 극찬이었다.
자연스레 배커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방심하지 말고, 나태해지지 말고 앞으로도 정진하거라.
지이잉!
배커의 눈앞에 찬란한 빛이 모이더니 이윽고 한 자루의 아티팩트가 소환되었다.
‘창 형태의 아티팩트?’
어째서 창의 형태인지는 몰라도 딱 봐도 심상치 않은 영기가 감돌고 있다.
그나마 창끝이 두 갈래로 갈라져 완전히 근접 병기로 쓰이는 용도는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무기 수여식은 인공 정령 페레스가 도전자의 자질과 성장 가능성을 철저하고 확실하게 분석하여 그에 가장 어울리는 결과물을 수여해 준다.
지금은 이해하지 못해도 계속해서 쓰다 보면 어째서 이런 무기가 자신에게 맞는지 이해하게 된다고 한다.
배커는 나름대로 납득하며 창을 부여잡았다.
‘어떠냐, 네르하. 네놈은 내가 쟁취한 이 결과물을 넘어설 수 있을까?’
대기실로 돌아온 배커는 의기양양하게 네르하를 찾았다.
그런데.
“뭐야? 이 새끼, 어디 갔어?”
대기실로 돌아온 자신에게 모두가 선망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 와중, 배커는 그 시선 중에 네르하가 없다는 사실에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자세히 살펴보니 시선이 없는 게 아니라 아예 존재 자체가 없었다.
“네르하, 그놈, 네가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딘가로 사라졌다.”
“뭐라고!”
영혼의 단짝이자 친구인 제크론이 축하와 함께 골치가 아프다는 어조로 내막을 전해 주었다.
제크론은 배커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문제는 교관들 중 누구도 막지 않았다는 점이야. 뭔가 내막이 있는 거 같은데?”
내막이고 나발이고 네르하가 자신의 활약을 개무시했다는 사실에 배커는 분노했다.
“이 새끼, 감히 날 내버려 두고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지?”
“…….”
배커의 말에 제크론은 살짝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어조에 따라 마치 소박을 맞힌 연인에게 하는 대사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녀석이 어디로 갔는지 알고 싶으냐?”
“그거야 당연한 건데 대체 어떤 새…… 헉!”
배커는 평소처럼 건들거리는 말투로 뒤를 돌아보다가 한순간 심장이 멎는 충격을 받았다.
대기실의 입구에 어느새 라데우스의 가주인 카이젤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 가, 가주님을 뵙습니다!”
쿵!
본능적으로 배커는 대번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았다.
그리고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경솔한 자신의 입을 저주했다.
카이젤의 모습을 본 다른 이들 역시 배커의 뒤를 따라 화급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다른 이들은 찔리는 게 없던지라 배커처럼 괜스레 머리를 박진 않았다.
“흐음…….”
카이젤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배커의 뒤통수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제법 괜찮더구나.”
“여, 영광입니다!”
가주의 칭찬에 배커는 눈을 부릅뜨며 이마를 쿵쿵 박았다.
“길레드가 회의 때마다 은근슬쩍 네 이름을 언급하던데 녀석의 자랑질이 아주 근거 없는 허풍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길레드는 배커의 친부를 말함이었다.
배커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말을 고르던 사이, 카이젤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네르하를 찾고 있느냐?”
“아, 아닙니다. 그저 네르하 도련님이 자리에 계시지 않아 궁금했을 뿐입니다.”
아무리 말실수를 했어도 가주 앞에서 방계가 직계에게 막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때, 카이젤이 소리가 아닌 마나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해 왔다.
―북쪽에 있는 던전 제어실로 가 보거라.
‘……!’
―바이던트. 그걸 얻은 지금의 너라면 네르하에게 제법 도움이 되겠지.
이 창의 이름이 바이던트인가?
그리고 도움이 된다는 건 무슨 말씀이시지?
배커는 이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눈치를 봤다.
하지만 이미 카이젤은 자기 볼일을 끝냈다는 듯 신형을 돌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공주는 아직도 도전 중인가? 그 아이가 어디까지 갈지 궁금하군.”
“…….”
카이젤이 뭐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배커는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가주가 가 보라고 한 이상 설사 네르하에게 용건이 있든 없든 무슨 일이 있어도 가야만 했다.
라데우스라는 성을 쓰는 자에게 카이젤의 말은 신(神)의 명령이나 다름없는 것.
꾸욱!
배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동반자가 된 마창(魔槍) 바이던트를 움켜쥐었다.
* * *
마족.
후천적으로 마공을 수련해 마인(魔人)이 되는 천마신교의 교도들과는 다르게 출신부터가 마기를 타고나는 이차원의 존재들을 총칭하는 단어.
네르하는 적들의 목적이 마족, 그것도 마왕급 마족을 깨운다는 것에 위기나 두려움보단 먼저 흥미를 가졌다.
‘그 마왕급 마족이란 놈은 천마보다 강한가?’
마족과 마왕의 정확한 전투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크게 감이 오지 않았다.
대륙에 마족이 자취를 감춘 지도 이미 수백 년이 지났다.
약 300년 전, 어느 초마인(超魔人)이 나타나 대륙을 초토화시켰다는 기록이 있었지만 오히려 그 초마인이 어지간한 마왕 이상으로 훨씬 강력한 별종이었고, 일반적인 마족은 그보다 훨씬 약하다는 역사의 기록이 있었다.
즉, 마족의 일반적인 강함이 어느 정도인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란 소리다.
‘기회가 된다면 한번 겨뤄 보고 싶긴 하군.’
네르하는 가슴속에서 올라오는 호승심을 간신히 가라앉혔다.
아무리 그래도 호승심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것은 사도나 마도가 할 법한 일이지, 정파의 무인이 할 짓은 아니었다.
네르하가 빌에게 물었다.
“우선, 그 망각의 서라는 물건은 수여식에 나올 법한 물건인가?”
“가능성이 0은 아닙니다. 하지만 안심하셔도 됩니다. 봉인된 지 거의 천 년에 가까운 물건이라 솔직히 그 마족의 자아가 아직도 남아 있을지도 의문이고요.”
네르하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예 인격이 지워졌다면 모를까 자아 정도로 안심할 순 없지. 신입생 중에 끄나풀이 섞여 있으려나?”
신입생 중에 마기를 감지하진 못했지만, 혹시 모른다. 이 세계는 무림의 상식으로는 재단할 수 없는 기술력이 존재하는 세계니까.
하지만 네르하의 혼잣말을 들은 빌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번 수여식에서 생도가 얻을 가능성은 0은 아니더라도 거의 0에 수렴합니다.”
“이유는?”
”망각의 서는 급수로는 2급 레전더리로 분류된 물건입니다. 그걸 얻으려면 못해도 이번 수여식에서 최소 8단계까지는 뚫어야 하는데, 그럴 역량이 있는 생도는 한 기수에 한명 있을까 말까 하죠. 게다가 그 생도가 수준급의 흑마법을 익히고 있어야 만이 망각의 서의 선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즉, 8단계까지 뚫은 생도가 최소 4레벨 이상의 흑마법사나 네크로맨서가 아닌 이상 그럴 가능성은 없단 뜻이다.
“나름 일리가 있군.”
“생도가 얻을 가능성은 없더라도 그들은 이번 수여식에 개입하여 망각의 서를 보물전에서 탈취해 낼 생각일 겁니다. 막아야 합니다.”
막는 거야 막는 거지만 어떻게 막아야 할지는 고민을 좀 해 봐야 했다.
“만약 놈들이 망각의 서라는 물건을 탈취한다면 정확히 어떤 방법을 쓸 거라 보나?”
일단 보물전이 정확히 어떤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니 그걸 아는 전문가의 조언이 필요했다.
전문가, 빌이 말했다.
“그들은 직접 인스턴스 던전을 클리어해 수여식을 치를 생각일 겁니다.”
“그놈들이 직접?”
“네. 놈들에겐 던전의 생성 및 제어 권한이 있습니다. 그 권한으로 10단계 신수 루드라까지 쉽게 클리어한다면 보물전의 수호자인 인공 정령 페레스라 해도 규칙상 보상을 내어 줄 수밖에 없습니다.”
“놈들의 숫자가 총 다섯이니 그 보상에 망각의 서가 포함될 가능성이 매우 높겠군.”
“그들 모두가 고레벨의 흑마법사이니까요.”
뭐, 그중 한 놈은 네르하의 기습에 당해 죽어 버렸지만 그래도 아직 네 놈이나 남았다.
빌은 우울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놈들이 저와 스승님을 죽이고 모든 관리자의 권한을 얻어 갔다면 놈들은 아주 당당히 던전을 클리어하고 망각의 서를 탈취해 갔을 겁니다.”
이번 수여식에 도전하는 이들은 모두 화면에 송출되긴 하지만 관리자 권한이 있다면 그런 것쯤은 아주 간단히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가 있었다.
‘분명 놈들은 관리자 권한을 일부 가진 만큼 퇴로를 상정해두고 침입해 올 거다.’
설사 관리자 권한으로 아티펙트를 얻어 낸다 하더라도, 라데우스 본가의 보물전 관리자들은 바보가 아니다.
봉인지정 물품인 망각의 서가 빠져나간다면 대번에 알아차릴 것이고, 그대로 리브라에 연락해 진상을 파악할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군. 놈들의 목표가 리브라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서.’
그렇다면 네르하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하나.
“빌, 너는 아직 관리자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했지.”
“그, 그렇습니다.”
“두 가지를 묻지.”
네르하는 현재 상황에서 최소한의 승리조건을 입에 읊었다.
“첫째, 놈들이 던전을 생성하면 이곳에서 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지. 둘째, 내가 그놈들이 만든 던전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조치할 수 있는지.”
빌은 잠깐 고민하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둘 다 가능합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 없이 바로 상층부에 보고해 조치를 취하는 것이…….”
“그럼 놈들은 바로 존재를 숨기고 내빼 버리겠지.”
생도가 아니라면 분명 대중 안에 그들과 연결고리가 있는 연락책이 있다. 섣불리 움직임을 보이면 곧바로 꼬리를 자르거나 감춰 버릴 거다.
“놈들이 망각의 서를 얻기 전에, 던전 안에서 놈들을 죽인다.”
“하지만 그들의 실력은 최소 5레벨 이상입니다. 아무리 네르하 도련님이라 해도…….”
일격에 세머스를 암살한 네르하의 실력은 경악스러울 정도였지만 그래도 그건 정면 대결이 아닌 기습.
던전에 들어간다면 뭐가 됐든 기습은 통하지 않게 될 것이다.
하지만 네르하는 씨익 웃으며 그 걱정을 일축했다.
“그건 걱정하지 마라. 나도 나름 생각해 둔 게 있거든.”
세머스란 놈을 기습하면서 확신했다.
분명 놈들은 상당한 수준의 기운을 쌓은 실력자이지만, 마법과 마법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공략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그나저나 감히 라데우스를 상대로 수작질을 벌이는 이 자식들이 아무런 이름 없는 잡배는 아닐 텐데.”
네르하가 빌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놈들의 이름이 뭔지 아나?”
“아, 네. 대충은 짐작하고 있습니다.”
빌은 이를 갈며 이번 사태의 배후를 입에 담았다.
“판데모니움. 대륙 최악의 범죄자들이자 흑마법사들의 연맹입니다.”
『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
사비연 퓨전 판타지 소설
(주)조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