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판데모니움 (4)>
“흑흑흑, 내가 해냈어. 해냈다고!”
“아… 하필이면 이런 걸…….”
수여식의 대기실에는 환희와 실망, 그리고 기대와 초조함 등 온갖 감정이 몰아닥치고 있었다.
“어디 갔다 오신 거예요?”
대기실에 들어서자 루시아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네르하를 맞이했다.
“잠시 일이 있어서. 그나저나 너다운 무기를 찾은 것 같군. 제법 괜찮아 보이는데?”
“아? 그, 그렇죠? 진짜 라데우스는 어딘가와는 다르게 통이 크다니까요! 헤헤, 에헤헤헤……!”
루시아는 고풍스러운 고검(古劍)으로 보이는 자신의 무기를 끌어안고는 헤프게 웃었다.
‘정말 멋지군. 배커의 무기 이상이야.’
배커의 창도 정말 보기 드문 명품이라고 봤는데 루시아의 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겉모습은 별다른 장식이 없는 수수한 것이었지만 그 내용물은 그야말로 신검(神劍)이라는 이름이 어울릴 정도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루시아의 검 정도는 아니어도 대부분이 무시 못 할 힘을 지닌 아티팩트를 손에 쥐고 있었다.
‘흠, 이러면 제법 기대가 되는데? 수여식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다는 게 아쉬운 일이군.’
수여식도 이제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내 차례는…… 이제 다음이군.’
대부분의 인원이 수여식을 마치고 이제 네르하를 포함해 열 명의 인원만이 남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몇 단계까지 뚫었지?”
잠깐의 여유가 있던 네르하는 자신의 궁금증을 풀기 위해 다시금 루시아에게 질문했다.
그 물음에 루시아는 잠시 표정을 굳히더니 이윽고 분하다는 기색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간신히 8단계까지 뚫었어요. 9단계에선 무슨 전설상의 정령왕이 나타난 줄 알았는데, 결국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지는 게 고작이었죠.”
8단계 정도라면 일반적인 몬스터의 범주를 넘어서는 난이도일 것이다.
정말 정신줄을 놓아 버리면 아차 하는 순간에 살해당하는 게 당연할 정도의 위험.
설사 꺾지 못한다 해도 일정 시간 이상 버티는 데 성공한다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는데.
‘흥미롭군. 이 녀석이 버티거나 피하지도 못했다라.’
점점 이번 일과는 별개로 따로 도전해 보고 싶은 무인의 욕망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네르하는 간신히 그 욕망을 잠재웠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수양이 얕진 않았다.
그때, 바깥에서 마지막 참가자들의 명단이 들려왔다.
―다음 호명하는 이들은 대기실에서 나와 준비해 주십시오. 네르하 라데우스, 벨레드 지젤, 바스톤 페레이라, 알페온 리브레히트, 로스 케빌…….
마지막엔 네르하와 안면이 있는 이들이 두 명이나 추가되어 있었다.
알페온이 네르하에게 다가왔다.
“형님! 드디어 저희 차례로군요. 기다리느라 진이 다 빠졌습니다!”
“……정말 그래 보이는군.”
네르하는 알페온의 초췌한 모습을 보며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반나절 이상 혼자 전전긍긍하다가 제풀에 체력을 깎아 먹은 티가 다 보인다.
“뭐, 힘내라.”
그래도 진지함을 보이는 모습이 보기 좋아 네르하는 알페온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 * *
‘큰일이다!’
라데우스 가문의 둘째 부인, 유리아 라데우스는 지금 자살 충돌에 가까운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가주인 카이젤이 중역들만 모인 자리에서 ‘네르하를 노리기 위해 이곳에 잠입한 판데모니움의 버러지들이 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로 다음에.
“그 버러지들에게 길을 열어 준 이들이 아무래도 내 주변에 있는 것 같더군.”
카이젤의 그 말이 튀어나오면서 주변 분위기는 그야말로 냉각수를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반대로 리브라를 책임지는 루트비히와 네슬렉은 그놈들을 잡아 죽여 무고함을 증명하겠다고 미쳐 날뛰었다.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 이미 대책은 다 세워 두었으니까.”
루트비히와 네슬렉이 움직이는 것 이상으로 가주의 한마디는 유리아의 숨구멍을 꽉 조여 버렸다.
‘아, 안 돼. 만에 하나 그놈들이 붙잡히는 일이 생긴다면……!’
사실, 가주가 알아채는 것 정도까진 각오한 일이었다.
하지만…….
‘정보가 새어 나갔나? 어째서 이렇게 일찍 눈치채셨지?’
카이젤이 누군가의 개입을 눈치채는 건 어디까지나 일이 한창 진행되거나 마무리되었을 때나 되어서다.
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기도 전에 발각되는 건 계획에 없는 일이었다.
‘마, 막아야 해. 놈들을 빼내든가, 아니면 죽이든가!’
하지만 이번 일에 투입된 놈들의 수준이 몰래 치우기엔 수준이 제법 된다는 게 문제였다.
유리아는 놈들이 네르하를 죽이거나 수여식을 망치면 복수라는 명목으로 놈들을 빠르게 치워 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움직이다간 대번에 가주의 눈에 포착될 수밖에 없다.
‘어, 어떻게든 연락할 방법을…….’
유리아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유리아,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는군.”
“네, 네?!”
“어디 몸이 편치 않은가?”
카이젤의 은근한 말에 그녀는 화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 예! 오랜만에 고산지대인 이곳에 오니 조금 몸이 불편해진 모양입니다.”
“그런가?”
유리아의 변명에 주변의 시선이 대번에 황당하게 바뀌었다.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셋째 부인인 로젤리아라면 모를까 유리아는 카이젤의 3년 후배로, 오래전에 리브라를 졸업한 고위 마법사다.
하지만 카이젤은 은은하게 웃으면서 유리아의 등을 어루만졌다.
“몸이 좋지 않다면 이만 숙소에 들어가 쉬게나.”
“아, 아닙니다. 가주님을 수행하는 몸으로서 어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하하, 역시 그대는 책임감이 강해.”
겉으로 보기엔 다정한 부부의 대화로 보일 수 있겠지만 옆에 있던 루트비히는 둘 사이에 흐르는 묘한 위화감을 눈치채었다.
‘아무래도 2부인이 뭔가 손을 쓰려다 걸린 모양이군.’
루트비히는 다정해 보이는 가주에게서 은밀하게 표출되는 분노의 편린을 느꼈다.
그리고 이번 일에 대한 대략적인 흐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네르하, 그 아이를 견제하려다가 선을 넘었구나!’
가주의 반대편에 앉아 있던 로젤리아 역시 매우 미묘한 표정으로 유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런 주변의 시선에 유리아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을 정도로 창피함을 느꼈다.
카이젤은 그런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주변을 향해 손뼉을 쳤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주인공의 차례로군. 다들, 그 녀석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 찾아온 것일 텐데 어디 한번 네르하가 어디까지 갈지 지켜봅시다.”
주변에 있던 원로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가주의 말과는 다르게 원로들이 네르하에게 거는 기대감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흠…… ‘그걸’ 봤는데 네르하가 과연 성에 찰지…….’
‘별로 기대가 되진 않는데…….’
“네르하가 그 인재를 넘어설 수 있을는지 모르겠군요.”
움찔!
한 원로가 생각으로만 하고 있었던 말을 입 밖으로 꺼내자 다른 이들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하지만 한번 입에 올리자마자 그 이름은 봇물 터지듯 나오기 시작했다.
“그 루시아라는 여아를 말하는군요.”
“뭐, 다른 이가 있겠습니까? 바스텔 이후 9단계까지 간 이들은 직계 중에서도 없지 않았습니까?”
“그 검술과 마법의 절묘한 조화! 그건 결코 바깥에서 활동하는 어설픈 마검사들은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고절한 수법이었습니다.”
“스플릿하트라…… 들어 본 적이 없는 가문인데 분가(分家) 중에 그런 이름이 있었던가요?”
배커가 6단계에 도달하며 얻어낸 경탄은 같은 차례였던 루시아가 8단계를 돌파하자 그대로 잊혀지고 말았다.
그리고 다른 모든 도전자 중에서도 루시아를 넘어서는 인재가 나오지 않자 대번에 다른 모든 이들의 이목은 그대로 루시아에게 향하고 말았다.
‘반드시 우리 계파의 품에 넣어야 한다!’
사실, 루시아의 존재는 어지간한 원로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극비 중의 극비였다.
가주와 그 측근 일부. 그리고 학장과 부학장을 포함해 어쩔 수 없이 그녀와 접하게 되는 중역 교수진 일부에게만 그 존재가 공개되었다.
그렇기에 사정을 아는 몇몇 이들은 못 먹을 떡인 루시아를 탐내는 이들을 매우 즐거운 표정으로 바라봐 주었다.
‘뭐, 그렇다곤 해도 네르하에게 딱히 기대가 드는 건 아니니.’
‘흠, 공주가 언제 그런 수법을 익혔지?’
사실, 네르하를 주목하자는 카이젤 역시도 이전, 루시아가 보여 줬던 마법과 검술의 융합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건 전투 마법사의 새로운 가능성 중 하나. 지고한 경지에 오른 기사가 마법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이상 나타날 수 없는 방법이라 여겼는데, 케프렌에 우리가 파악하지 못한 괴짜가 한 명 더 존재했나?’
카이젤은 복잡해지는 생각을 정리하며 조용히 턱을 괴었다.
그렇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네르하의 차례가 시작되었다.
* * *
“무사히 들어왔군.”
판데모니움 소속, 암흑 교단 1급 사제 ‘주단’은 계획대로 무사히 인스턴스 던전에 잠입할 수 있었다.
“크크큭, 너무 쉽군요. 얼마 후면 네르하 라데우스가 보일 텐데 우릴 보면 그놈은 대체 무슨 표정을 지을지…….”
주단의 뒤를 이어 가스터와 근육질의 거한 쟈칼 역시 던전에 도착했다.
노인, 가스터가 말했다.
“흐흐흐, 이제 곧 바깥에서 칼스가 전원을 차단하고 혼란을 일으킬 겁니다. 그들에겐 단순한 해프닝이겠지만 시간을 끄는 데는 충분하겠죠.”
“카이젤의 눈앞에서 자식을 찢어 죽이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는데…… 큭큭.”
쟈칼과 가스터가 낄낄거리며 웃는 사이, 인스턴스 던전의 입구에 마법으로 설정된 숫자가 점차 변하는 것이 보였다.
“굴락이 미적거리던 세머스의 엉덩이를 걷어찬 모양이군요.”
처음엔 1로 고정되어 있던 숫자가 어느새 100으로 변했다.
이 숫자가 갖는 의미는 가상 세계에서 받는 고통의 퍼센트를 수치화한 것.
1은 1%. 즉, 어떤 공격을 받아도 현실 세계에서 입는 대미지의 1%만 입는다는 소리이며, 그것이 100으로 변했다는 건.
이제 이곳에서의 죽음이 현실 세계에서의 죽음과 같은 의미가 되었단 소리였다.
“계획대로…….”
“계획대로 되었군. 아주 완벽해.”
“……응?”
주단은 눈을 부릅뜨며 뒤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은갈색의 머리카락을 한 젊은 청년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청년을 알아본 주단이 눈을 부릅떴다.
“너는 네르하 라데우스?”
“어떻게 벌써 이곳에?”
지금 주단과 부하들이 있는 장소는 인스턴스 던전의 3단계.
원래의 네르하라면 이곳까지 뚫는 데 제법 시간이 소요될 것이 분명했는데…….
“당연히 걸리적거리는 건 전부 치우고 왔지. 뭘 새삼스럽게.”
네르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차갑게 주단을 노려보았다.
“네놈이구나. 리브라에 숨어든 대왕 쥐 새끼가.”
오싹!
그 순간, 주단은 자신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감히 이곳 리브라에 들어와 깽판을 쳤으니, 그에 걸맞은 대가를 치를 각오는 되어 있겠지?”
네르하의 주먹이, 은은한 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
사비연 퓨전 판타지 소설
(주)조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