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주단 (2)>
네르하의 말엔 단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주단은 판데모니움 산하 암흑 교단에서 라데우스의 마법사들을 잡기 위해 특별히 육성한 마법사 킬러 중 하나.
정면으로 붙는다면 1에서 2위계 정도는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는 상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주단이 개화한 고유 계통 ‘인큐버스의 날개’였다.
제대로 사용한다면 네르하에게 당했던 쟈칼보다도 빠르고 정확하게 적의 목을 수확할 수 있었고, 그러면서도 기사들의 검격 이상의 리치로 중거리에서 적을 두드리는 것도 가능했다.
날개 자체의 방어력 역시 어지간한 마법의 세례도 막아낼 수 있을 정도로 단단했으니 그야말로 주단은 마법사 킬러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은 강자라 할 수 있었다.
뭐, 네르하 역시 주단의 그런 강점을 높게 평가하고는 있었지만, 그와는 별개로.
“제대로 된 무인을 만나면 순식간에 박살 나겠군.”
“……!”
“공격은 빠르고 정확하지만 투로(鬪路)가 단순하고 심리전에 그다지 강한 유형은 아니군. 네 공격을 차분하게 걷어 낼 수 있는 수준이라면 네 강점은 대번에 단점이 될 거다.”
네르하의 냉혹한 평가에 주단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이건 단순히 네르하의 평가 자체에 분노한 것이 아니었다.
“감히, 감히 5레벨에도 이르지 못한 애송이 따위가 그딴 말을 지껄여!?”
“오, 이미 경험을 한 적이 있었나 보지?”
냉정할 것만 같았던 주단이 불같이 분노하자 네르하는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주단이 마음속에 입은 상처를 사정없이 쑤셔 파기 시작했다.
“그래, 케프렌이 세웠던 기준 중에 검귀(劍鬼)급 정도? 그 정도만 되어도 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깨질 거다. 내 이름을 걸고 장담하지.”
“닥쳐!”
홱!
마치 정곡이 찔린 사람처럼 주단은 이성을 잃고 네르하에게 달려들었다.
아까 전의 쟈칼과 완전히 오버랩되는 모습이었다.
“주, 주단 님!”
“가스터, 네놈은 아까 내가 말했던 거나 똑바로 해라!”
주단은 가스터를 향해 이렇게 일갈하곤 다시금 네르하를 덮쳤다.
‘장관이군. 냉정을 찾으라고 조언을 한 놈이 정작 분노에 잠식되었으니……. 에잉!’
요즘 것들은(?) 하나같이 정신 수양이 매우 부족하다.
목숨을 내버리는 태도와는 별개로 나름 실력에 자신이 있고 자기 영역에서 승승장구한 삶을 살았을 테니 그렇겠지만 말이다.
‘중원에서도 그렇고, 이곳에서도 그렇고. 그런 놈들은 어딘가에서 객사하기 마련이지.’
펄럭!
활짝 펴진 주단의 날개가 분열되더니 무려 여섯 쌍이나 되는 날개로 분리되었다.
“오?”
“죽어라!”
무려 열두 개의 날개가 각기 다른 궤적을 그리며 네르하를 덮쳤다.
“이건 좀 볼만하군.”
“그 빌어먹을 허세가 어디까지 갈지 두고 보자!”
“그래. 두고 보거라.”
검은 날개가 지척까지 다가오기 직전, 네르하는 가볍게 땅을 박차며 스텝을 밟았다.
그러고는 그대로 놈의 공격 사정거리로 스스로 뛰어들었다.
“자, 이게 격의 차이다.”
천신문 보법.
십이천간보(十二天間步).
스스슥!
네르하의 모습이 순식간에 다섯 개로 분리되었다.
그 분리된 네르하의 몸이 검은 날개 사이를 질주하며 그대로 놈의 본체를 향해 직진해 들어갔다.
“……!”
“다, 다중 환영 마법? 어떻게 저런 애송이가 저런 고위급 마법을!”
마법사인 가스터는 네르하의 술수를 보고 이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면으로 상대하고 있는 주단은 이것이 마법이 아님을 알았다.
“마, 마법이 아니야! 이, 이건……!”
“단순한 발재간이지. 간만에 쓰니까 장딴지가 쑤셔 오는군.”
“……!”
천신문의 조사께서 소림의 연대구품(蓮臺九品)을 보고 경쟁심을 불태우며 창안했다는 천신문의 절기.
‘쟤네는 아홉 분신인데, 우리는 열두 분신은 되어 줘야지!’라는 골때리는 이유로 만들어진 십이천간보는 천마의 천마군림보와 정면으로 마주하고도 밀리지 않는 무림 제일의 신법이었다.
당황한 주단이 네르하를 향해 몸을 날렸다.
“같이 죽자, 네르하 라데우스!”
“헛소리도 절경이군. 애초에 같이 죽을 마음도 없었으면서.”
녀석들의 목적은 자신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본 목적은 따로 있으며, 그걸 이루지 못한 이상 굳이 자신과 자폭할 이유가 없다.
화륵!
네르하의 주먹에 나선의 불길이 휘감겼다.
이전, 바스톤과 루시아에게 선보였던 마법과 무술이 융합된 일격.
블레이즈 피스트.
화권(火拳)이나 불주먹이라 부르는 것보다는 그래도 마법의 느낌이 어느 정도 나게 고심한 네르하의 작명이었다.
콰과과광!
“크아아아악!”
“헉! 주, 주단 님?”
네르하의 일격이 터져 나갔다.
그 순간, 주단은 자신의 심장 부근이 뒤틀리는 어마어마한 고통을 느꼈다.
‘뭐, 뭐냐, 이 괴물은!’
마지막 순간에 날개를 접어 간신히 방어하긴 했지만 나선의 힘으로 집중된 일격은 날개가 감당할 수 있는 충격의 최대치를 뚫고 주단의 육체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었다.
“커억! 컥!”
“괘, 괜찮으십니까?”
가스터가 견제조차 포기한 채 화급히 달려와 주단을 부축했다.
가슴을 부여잡은 주단의 이마에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렸다.
‘부, 분명 5레벨에도 이르지 못한 게 분명하거늘…….’
단순히 파괴력만 보면 자신과 같은 6레벨…… 아니, 그 이상이다!
하지만 절대적인 레벨 차이를 뛰어넘어 자신에게 치명타를 가한 네르하는…….
“쩝, 고작 저 정도 방어도 뚫지 못하다니. 아직 개선점이 많군.”
마치 별것 아니라는 듯 입을 다시며 고개를 내젓고 있다.
마치 마법사 킬러인 자신이 올바르게 걸어야 했던 길을 보여 주는 표본과도 같은 모습.
당연한 말이지만 주단에겐 절대 이해하지도, 또 받아들여야 해서도 안 될 일이었다.
“이, 이노오오옴!”
“차라리 순수한 계열 마법사와 붙었다면 좀 더 성가셨을지도 모르겠군. 바깥 분들도 슬슬 지루해하실 테니 이제 끝내자고.”
“……!”
그 순간, 주단은 자신들에게 닥친 현실을 자각했다.
또한 이제 승산이 완전히 없어졌다는 것 역시 깨달았다.
‘저놈은…… 지금 죽이지 못하면 나중엔 감당하지 못할 괴물이 될 것이다. 교단과 조직을 위해서라면 지금 어떻게든 죽여야겠지만, 임무를 방기한 채 그럴 수 있겠는가?’
계속 싸운다면 어떻게든 죽일 수는 있다.
아무리 의외성으로 격차를 메꾼다 해도 레벨의 차이는 절대적이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네르하를 죽이기까지 시간이 꽤나 걸릴 것 같다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두 번 다시 라데우스의 보물전에 접근할 기회는 없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해야…….’
그 순간, 주단의 뇌리에 기막힌 해결 방법이 번뜩이며 지나갔다.
“가스터.”
“네. 주단 님.”
“목숨을 버려라. 시체가 되어서라도 네르하 라데우스를 물고 늘어져라.”
“……!”
“그분의 부활과 네르하 라데우스의 제거를 동시에 해결할 방법이 있다.”
가스터는 그 방법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그저 수십 년 동안 주단을 섬겨 온 종복의 입장에서 그가 어떻게든 살아남거나 임무에 성공하기를 빌 뿐이었다.
“알겠습니다. 부디 대업을 완수하시길.”
“부탁하마.”
주단은 그 말을 남기고는 날개를 펼쳐 인스턴스 던전의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흠, 정말로 동료를 버리고 도망갈 줄이야. 좀 성가셔졌군.”
네르하의 혼잣말을 들은 가스터가 비장한 표정으로 자신의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네르하 라데우스, 넌 여길 지나가지 못한다.”
가스터의 결사적인 태도를 본 네르하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것 참, 노인을 공경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공격하는 짓은 별로 하기 싫은데 말이지.”
말은 그렇게 해도 네르하는 상대를 빨리 치워 버리고 도망간 놈을 쫓겠다는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 * *
“허어, 지금 대체 무슨 일이.”
“…….”
“내가 지금, 무엇을 본 건지…….”
바깥에서 네르하와 다른 이들의 대결을 지켜보던 이들은 현재 벌어진 상황에 뭐라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말문이 막혔다.
‘놀랍군.’
한순간 네르하의 주먹에서 터져 나온 나선의 불꽃.
저게 순수한 마법이 아니라는 걸 어느 정도 안목이 있는 이들은 대번에 깨달았을 것이다.
‘저 기술은 공주의 기술과 같은 결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렇다는 건 네르하와 공주가 합심하여 새로운 ‘유파’를 창안해 냈다는 것인가?
믿기지는 않지만 눈앞에서 나타난 걸 부정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고 보니 수준은 낮지만 비슷한 기술을 쓰는 놈이 또 하나 있었지. 이름이 바스톤이라 했던가?’
장내의 시선이 전부 네르하에게 쏠려 있어서 눈치챈 자는 극소수에 가까웠지만 카이젤의 예리한 시야는 바스톤의 존재까지도 시야에 넣고 있었다.
‘완성도로 따지면 네르하의 것이 가장 훌륭하군. 그렇다는 건 저 기술 체계의 주체는 네르하인가? 이거 정말 생각하면 할수록…….’
“가주님.”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던 카이젤은 부하의 조심스러운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생각이 끊긴 그는 살짝 짜증이 섞인 시선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그곳에는 백령대의 수하 몇 명이 세 명의 사내들을 바닥에 무릎 꿇린 채 대기하고 있었다.
“잡아 왔습니다.”
“그렇군.”
그들 중 가장 앞에 있는 중년의 남성. 수하가 그 남성의 이름을 언급했다.
“보물전의 2급 관리자, 뮤턴입니다.”
그는 세머스와 함께 라데우스에 잠입한 판데모니움의 첩자였다.
“가주님! 무슨 일이신지는 몰라도 전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습니다! 억울합니다, 가주님!”
하지만 뮤턴은 일단 필사적으로 카이젤을 향해 자신의 무고를 주장했다.
그 말에 카이젤은 피식 웃으면서 이렇게 답했다.
“그렇겠지. 잘못을 저지르기 전에 잡혀 왔으니까.”
하지만 카이젤에게 있어 뮤턴이 잘못을 저질렀든 저지르지 않았든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흥미롭구나.”
카이젤이 뮤턴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스산하게 웃었다.
라데우스라는 이름 아래 그의 권위는 절대적.
설사 뮤턴이 무고하더라도 카이젤의 판결은 어느 방향으로 내려지든 무조건 옳을 뿐이었다.
“네 입에서 누구의 이름이 나올지 기대하마.”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뒤에 있던 유리아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 * *
그렇게 주단이 도망치고.
네르하의 시선은 대머리 노인, 가스터에게로 향했다.
‘방심을 틈타 한 방 먹였지만 본래 제대로 상대하면 지금의 나로선 단시간에 제압하긴 힘든 상대다.’
다행히 상대는 몇 번이나 일격에 얻어맞아 이쪽을 상당히 고평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가스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르하 라데우스, 넌 이 사태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궁금하지 않느냐?”
“응?”
네르하는 가스터의 속셈을 알아차리곤 피식 웃었다.
“시간을 끌 속셈인가?”
“나는 시간을 얻고, 네놈은 배후를 알고 서로가 좋지. 아까 네 말대로라면 지금 이 광경을 바깥에 있는 라데우스 혈족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소리 아니더냐?”
“…….”
그 말대로였다.
저놈의 입에서 누가 튀어나오든 상대는 엄청난 타격을 입을 것이 분명할 것이다.
실제로 저 바깥에서 유리아 라데우스의 얼굴은 더 이상 하얗게 변할 수 없을 정도로 창백하게 질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네르하는 단호했다.
“아니, 듣지 않겠다.”
“어, 어째서냐?!”
당황해하는 가스터를 향해 네르하가 이죽거렸다.
“첫째로, 네놈의 입에서 진실이 튀어나올 가능성은 낮지. 게다가 이런 건 시간을 끌면 끌수록 말려들기 좋은 수법이야.”
“내, 내 마법사의 명예와 목숨을 걸고 진실임을 맹세하겠다!”
“아, 설사 그래도 문제야.”
“뭐, 뭐라고?”
네르하는 머리카락을 쓸며 슬쩍 비웃음을 흘렸다.
“어차피 내게 이런 건 위기 따위에도 들지 못하거든. 고작 네놈들 따위로 가족들과 얼굴을 붉혀서야 되겠어?”
가스터의 표정이 멍해졌다.
『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
사비연 퓨전 판타지 소설
(주)조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