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마무리 (1)>
‘진짜 어떻게 된 거지?’
배커는 이해할 수 없었다.
네르하와 세 명의 흑마법사들이 처음 대치하던 순간은 자세히 보지 못했다.
당연히 이곳을 침입한 저 노인과 필사적으로 싸워야 했기에.
하지만 그 이후, 네르하가 가스터라는 노인과 대결을 하던 모습을 보았을 땐 정말로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과거의 네르하와 지금의 네르하가 동일 인물이라는 점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대체 저놈에게 뭔 일이 일어났길래 사람이 완전히 뒤바뀔 수 있는 거냐?’
배커는 네르하와 어릴 적부터 알던 사이였다.
같이 부대끼고 성장해 나가진 않았지만 네르하가 어떤 인간인지 확정을 짓기엔 충분할 정도로 교류를 했다.
그 교류라는 것이 바멜의 명령으로 인한 괴롭힘이라는 게 문제였었지만.
‘가문의 누군가로부터 직접 전수를 받았나?’
네르하는 분명 5레벨을 넘지 못했다.
반면, 네르하와 마주한 흑마법사 가스터는 확실하게 5레벨에 도달한 수준급 흑마법사.
그런데도 네르하는 시종일관 가스터를 몰아붙이며 기어코 목을 따 버렸다.
‘저 전투 센스는 엄청난 경험을 쌓았거나 누군가가 철저하게 지도했거나 둘 중 하나야.’
아무리 배커가 경험이 없다 해도 안목마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배커는 네르하의 움직임에서 형언할 수 없는 모순을 느꼈다.
그렇게 배커가 네르하와 주단의 대치를 보고 있을 때였다.
“수고했습니다, 배커 라데우스.”
“……당신들은?”
제어실로 들이닥친 일련의 무리.
새하얀 로브를 걸치고 있는 그들의 정체를 배커가 모를 리가 없었다.
“가주님의 명으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훌륭한 실력이더군요.”
“……보고 있었다고?”
배커가 황당한 시선을 던지자 가장 앞에 있던 백령대의 마법사가 어깨를 으쓱했다.
“만약 당신의 목숨이 위험해지면 개입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더군요.”
백령대의 마법사들은 착실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치명상을 입고 냉동 인간이 된 빌의 스승을 치료하고, 일부 빼앗긴 제어실의 권한을 다시금 정상으로 되돌리기 시작했다.
그 작업이 워낙 빠르고 정확하게 진행되어 배커조차 저들이 지금까지 왜 이렇게 미적거렸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이제 네르하의 싸움만 끝나면 일이 마무리되겠군요.”
“선배님은 네르하가 이길 수 있을 거라 보십니까?”
배커는 백령대…… 아니, 가문의 선배에게 질문을 날렸다.
“그건 어려운 문제로군요.”
배커의 질문을 받은 그 선배는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마족 이자카르, 아무리 이성을 잃었다지만 그런 괴물의 힘을 얻은 6레벨의 흑마법사가 어디까지 강해질지는 능히 짐작이 갑니다.”
적어도 리브라의 일개 생도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는 절대로 아니었다.
교수급이 나서도 힘들 정도였고, 확실하게 제압하려면 학장급이 나서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가주님께서는 네르하에게 뭔가 기대를 걸고 계시더군요.”
흠칫!
가주의 기대라는 말에 배커의 안색에 동요가 생겨났다.
“일이 어떻게 흘러가든 가주님의 명령은 절대적이니 지켜볼 수밖에요.”
그렇게 말을 하는 백령대의 마법사의 표정에서도 반전을 바라는 일말의 기대감이 맺혀 있었다.
* * *
고오오오!
네르하는 이곳에 오기 전, 천천히 마나 블래스트의 나머지 절반을 녹여 버렸다.
덕분에 마나의 절대량 면에서는 흑마법사들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았고, 그 점을 십분 활용하여 가스터와의 정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확실히 격이 달랐다.
“크으으윽! 라데우스…… 저주받을 이름이여!”
츠츠츠츠!
주단은 대놓고 망각의 서에서 마기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해 뒤에 있는 신수 루드라의 정보체를 자신의 숙주로 삼으려는 듯 루드라의 거체가 주단에게 흡수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점차 주단의 육체가 뒤틀리고 거대해지는 괴기한 모습이 연출되었다.
‘완전히 자포자기했군. 날 죽이기 위해 본질이 뒤틀리는 것도 상관하지 않겠다 이건가?’
이대로 둔다면 녀석의 인격은 압도적인 마기에 의해 덧씌워지고, 이젠 주단인지 이자카르인지 모를 제3의 존재로 거듭날 것이다.
만약 주단이 저 힘을 제어하든 다른 자아가 깨어나든 간에 뭐가 됐든 제정신으로 돌아오면 일이 크게 성가셔질 것이다.
‘승부를 낸다면 놈이 변신 중인 지금이 기회겠지.’
네르하가 막 손을 쓰려고 할 때, 뒤에서 익숙하고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도 공격하지 않고 뭐 하고 있어요? 더 이상 시간을 끌면 늦을 거 같은데?”
“오?”
네르하는 뒤를 돌아보며 반갑게 웃었다.
“클로이아? 네가 어떻게 여기에 온 거야?”
뒤에서 나타난 클로이아는 자신의 서릿빛 머리카락을 살짝 비비 꼬며 답했다.
“당연히 지원 목적으로 왔죠. 아무리 당신이라도 저걸 온전히 감당하기엔 역부족일 거라 하셨거든요.”
“누가?”
“누구긴 누구겠어요. 절 여기에 보낸 가주님이시지.”
피식!
“네 지원은 든든하지만 그래도 끝까지 믿어 주지 못한다는 건 좀 슬프네.”
“……‘저걸’ 혼자 잡으실 수 있겠어요?”
클로이아의 시선 끝에는 여전히 각성 중인 주단의 모습이 보였다.
“으음, 좀 고전은 할 것 같지만 어떻게든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정말로?”
클로이아는 눈을 깜빡거렸다.
딱 봐도 저 거칠고 흉악하게 쏟아지는 기운은 그녀 자신도 감당하기 힘든 종류의 것이었다.
‘못해도 7레벨 이상은 되는 것 같은데?’
그것도 엄청나게 약화되었다는 걸 고려하면 원래는 진짜 말도 안 되는 존재였을 것이다.
하지만 네르하의 의견엔 변함이 없었다.
“레벨이니 뭐니 해도 전투 역량이라는 건 가지고 있는 기운만으로 결정되는 건 아니거든.”
“그건 그렇지만…….”
그녀는 ‘그것도 정도껏이지’라는 뒷말을 간신히 삼켰다.
“뭐, 차라리 잘됐어. 저 정도 놈이면 이번 수여식에서 화려한 방점을 찍을 수 있겠지.”
클로이아는 그 말에 수긍하며 되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시려구요?”
“얼음으로 놈의 몸을 묶어 줘. 그럼 어떻게든 놈의 핵에 비수를 꽂아 넣을 테니까. 그리고 가능하면 조금 기다렸다가 치자고.”
“어째서요?”
“저놈의 덩치가 좀 커진 다음에 싸워야 편하니까.”
주단은 루드라의 육체를 흡수하며 시시각각 거대해지고 있었다.
“두 발로 걷는 인간이 네 발로 걷는 짐승이 되었으니 제대로 된 움직임을 보일 수 있을 것 같아? 저놈은 아주 큰 실수를 한 거야.”
“그래 보이긴 하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결과를 보여야 할 수 있는 말이겠죠?”
“그러니 보조 잘하라고. 슬슬 움직인다.”
네르하는 천원무극신공을 끌어올리며 용의 형상에 가까워진 주단을 향해 몸을 날렸다.
크아아아악!
새하얀 용에서 타락한 검은 용이 되어 버린 주단.
이성을 거의 상실한 주단이라도 정면에서 느껴지는 선명한 적의에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홰액!
주단은 본능적으로 이젠 앞발이 되어 버린 팔을 휘둘렀다.
분명 빠르고 묵직한 일격이었지만 별다른 투로도 없이 궤도가 훤히 보이는 일격에 네르하가 맞을 리가 없었다.
“분명 대가리 쪽에 본체가 있었지?”
네르하의 눈은 주단의 원래 육체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놓치지 않았다.
일순간, 네르하의 발에 선명한 금빛의 기운이 맺혔다.
항마(降魔)의 기운이 극한으로 맺힌 천원무극신공의 발현이었다.
네르하는 그대로 주단의 목덜미를 내려찍었다.
퍼억!
캬악!
거기에 윈드 커터의 날카로움까지 더해지자 용의 목 부분에 대번에 거대한 자상이 생겨났다.
‘단단하군!’
그래도 일격에 절반 정도는 가를 줄 알았는데 단순한 정보체에 마기가 깃들어 실체를 가지니 확실히 방어력이 강대해졌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주단은 자신에게 이런 고통을 안긴 네르하를 향해 아가리를 쩍 벌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막대한 마기의 해일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브레스!’
네르하는 그대로 허공답보를 펼쳐 재빨리 브레스의 궤도에서 벗어났다.
콰과과과광!
“꺄아아아악!”
아무리 거대한 공간이라도 어디까지나 밀폐된 내부. 브레스가 토해지자마자 공간 전체에 막대한 지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네르하는 비명을 내지르는 클로이아에게 비웃음을 날려 주었다.
“뭐야? 설마 직격당한 것도 아닌데 쫀 건 아니겠지?”
“시끄러워요!”
자신의 추태를 자각한 클로이아는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곤 본격적으로 힘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진짜 쪽팔려서!”
쩌저저적!
6레벨, 아니, 거의 7레벨에 달하는 거대한 마나가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나는 모든 서리의 위에서 군림하는 군주가 되리니!”
서리 일족의 비전 마법이자 클로이아의 고유 계통인 ‘서리 여왕’의 본격적인 발현이었다.
‘……!’
쿵! 쿵!
클로이아가 본격적으로 마나를 끌어 올리자 그 위험성을 느낀 주단이 용의 육체를 움직여 클로이아를 덮치려고 했다.
하지만 주단이 도착하기 전에 그녀의 마법이 먼저 완성되었다.
휘리리릭!
“아이스 스피어!”
클로이아는 단순한 3레벨에 불과한 아이스 스피어를 영창했다.
하지만 그녀가 굳이 이런 마법을 사용한 이유가 있었다.
클로이아의 부름에 나타난 창의 숫자는, 최소 수백 이상.
움찔!
눈앞을 가득 메운 아이스 스피어의 숫자에 주단의 몸이 본능적으로 멈칫거렸다.
‘빈틈!’
클로이아가 가볍게 손짓하자 날카로운 한기를 머금은 얼음의 창들이 일제히 주단의 육체를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푹! 푹! 푹! 푹!!
크아아아악!
드래곤의 입장에선 저 창이 단순한 이쑤시개로 보일지 몰라도 그것에 수백 개나 찔리면 당연히 아플 수밖에 없다.
클로이아의 노림수는 이게 끝이 아니었다.
“자연으로 돌아가라!”
엡솔루트 제로!
쩌적! 쩌저적!
주단의 몸에 박힌 얼음의 창은 그대로 막대한 냉기를 내뿜으며 주단의 육체를 급격하게 얼려 버리기 시작했다.
크아아아!
고통이 이성을 되찾아 준 것일까.
주단은 용의 형상으로 변한 뒤 처음으로 인간의 언어를 내뱉었다.
“웃기지…… 마라! 이대로…… 죽을 수는!”
콰직! 콰직!
주단이 몸부림치며 얼음을 깨 버리려고 했지만 깨진 얼음은 더한 냉기에 다시금 얼려지며 주단의 육체를 속박하기 시작했다.
‘강력하군!’
확실히 대마법이란 것이 바로 이런 것일까.
이전, 자신의 몸을 속박한 냉기와는 차원이 다른 위력이었다.
주단의 육체를 속박해 나가던 클로이아가 다급히 네르하에게 외쳤다.
“이거, 오래 유지 못 해요! 빨리 끝내!”
“……좀 멋있었을 텐데 분위기 다 깨네.”
네르하는 살짝 심호흡을 하며 주먹을 쥐었다.
주먹에 금빛이 맺히며 내면의 기운이 유형화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금빛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공동 내부를 환하게 밝히듯이 네르하의 팔에서 나타난 금빛이 거대한 창날의 형태로 날카롭게 벼려지기 시작했다.
강기(强氣).
중원에선 천지간에 가장 강력한 기운이라 불리는 초절정의 증거.
여기에 마법의 힘, 블레이즈 피스트의 불꽃이 강기를 휘감아 마를 몰아내는 완벽한 일격이 완성되었다.
“하압!”
네르하는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주단의 머리를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일말의 이성이 남아 있던 주단은 네르하의 모습을 보고 다시금 아가리를 쩍 벌리며 브레스를 준비하고 있었다.
여기서 피한 다음 찔러 넣는 방법도 있었지만 네르하는 씨익 웃으며 그대로 브레스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그래. 어디 한번 끝까지 가 보자!”
금철유성(金鐵流星)!
강기를 두른 전신을 대상을 향해 내리꽂는 아주 간단한 원리를 가진 천신문의 절기가 브레스를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금빛이 어둠을 가르며 네르하의 수도가 검은 용의 머리를 두 조각으로 쪼개 버렸다.
『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
사비연 퓨전 판타지 소설
(주)조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