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뒷풀이>
리브라의 상위 기수.
개중 2학년의 경우 유리아와 그 파벌이 특히 심혈을 기울여 투자한 이들이 많이 몰려 있는 기수이기도 했다.
“너무 아까운 거 아니야? 그 전력을 끌어 썼다가 아르바 오라비 쪽이나 루드빅 오라비 쪽 애들에게 밀려 버리면 어쩌려고?”
세티안의 반론에 바멜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네르하를 밀어 버리고 이번 1학년들을 끌어모으면 된다. 네르하가 실각하면 배커와 제크론이 쉽게 수습할 수 있겠지.”
“흐응…….”
세티안은 나름 가능성을 느끼고는 콧김을 뿜었다.
“배커, 그 멍청한 놈이 멋대로 리브레히트 가문의 삼남을 적대한 탓에 일이 꼬였지만…… 내가 직접 나서면 마음을 풀겠지.”
알페온의 가치는 오히려 리브라 바깥에서 훨씬 높게 평가되고 있었다.
그 리브레히트의 삼남이 이미 네르하에게 푹 빠진(?) 것을 모르고 있던 바멜은 얼마 후에 실시될 리브라의 외부 실습을 생각하며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때였다.
덜컹!
“어머님!”
“오셨습니까?”
그들이 자리한 곳으로 카이젤의 2부인 유리아 라데우스가 시녀들을 거느리며 나타났다.
바멜과 세티안은 유리아를 환영했다.
그런데.
‘표정이…… 그리 좋아 보이시진 않는데?’
오히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보면 그녀의 건강이 염려될 정도였다.
“바멜, 세티안…….”
이윽고 약간의 공포심이 깃든 유리아의 목소리가 두 사람에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 *
무기 수여식이 끝난 뒤.
판데모니움으로 인해 혼란에 빠진 리브라는 빠르게 평화를 되찾았다.
사실, 리브라 자체가 다른 세력이 숨어들 틈이 거의 없는 환경이었고, 이번에 제거된 이들 외엔 실질적으로 판데모니움의 잔당들은 아예 발견되지 않은 탓도 있었다.
“그래도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은 건 여전하군요.”
여전히 단련실에서 육체를 혹사시키고 있던 루시아가 작금의 분위기를 되짚었다.
“이번 사건으로 갈려 나간 이들이 리브라 전체의 30%나 된다니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그만큼이나?”
네르하의 천진난만한 물음에 루시아는 인상을 찌푸렸다.
“오히려 적은 겁니다. 상층부와 관리자급 전체가 갈려도 이상하지 않을 사건이었으니까요.”
이미 라데우스 본가에서 자체적으로 판데모니움에 대한 제재가 일어날 것이라는 말을 듣긴 했다.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겠군.”
하지만 루시아는 네르하의 말에 부정적이었다.
“라데우스와 판데모니움의 체급 차이를 고려하면 전쟁이란 말엔 어폐가 있죠.”
라데우스 가문은 수백 곳의 도시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열두 개의 마탑과 5만 명의 마법사들을 휘하로 둔 초거대 집단이다.
라데우스라는 품 안에서 생활하는 인구의 수만 천만이 넘는 만큼 사실상 군사 국가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판데모니움이 세력 면에선 대륙에서 순위권에 꼽히는 곳이긴 하지만…… 그래도 라데우스가 전력을 다하면 벌레처럼 짓밟힐 곳이죠. 생각보다 큰 사건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하긴, 그 정도 차이가 있으니 그 아줌마가 놈들을 끌어들일 생각을 했겠지.’
카이젤은 한동안 이번 일의 주동자나 다른 이들이 네르하를 건드리지 못할 거라고 말했다.
‘한동안 평온한 일상을 누릴 수 있을 테니 조용히 역량을 갈고닦는 데 집중하라고 했지.’
그 말마따나 라데우스의 직계들은 이후 별다른 사건 없이 조용히 리브라에서 떠났다.
의외로 네르하를 눈여겨본 이들이 찾아올 만도 했는데 원로나 장로 중 그 누구도 네르하와 접촉해 온 이들이 없었다.
그야말로 완전한 단절과 무관심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게 가주가 말했던 그 평온함인가?’
뭐가 됐든 나쁘진 않은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바스톤.”
“네. 네르하 도련님.”
조용히 레그 프레스를 하던 바스톤은 네르하의 부름에 살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마치 올 것이 왔다는 태도였다.
네르하는 녀석에게 다가가며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전, 너와 내가 어물쩡 넘어갔었던 게 있었지.”
“……그렇군요.”
“내가 가르쳐 준 기술들은 이번 수여식에서 도움이 되었었나?”
바스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도련님께서 사사하신 기술 덕분에 부족한 실력이나마 5단계에 도전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많은 관심을 받았고요.”
네르하와 함께 입장한 탓에 바스톤의 활약이 좀 묻힌 감은 있었다.
하지만 라데우스 본가의 다른 이들은 바스톤의 활약 역시 무시 못 할 정도임을 충분히 눈치챌 안목이 있었다.
“5단계라, 아직 형태도 잡히지 않은 상태인데도 꽤 선전했군.”
“그 이후로 배커 도련님의 계파에서 제게 따로 사람을 보냈을 정도였습니다.”
“뭐라 하던가?”
“딴생각하지 말라더군요.”
바스톤은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1억 8천만 정도나 되는 빚이 있으니 쉽게 다른 쪽으로 넘어가는 것도 어렵겠군.”
“…….”
침묵하는 바스톤을 향해 네르하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원금으로 따지면 고작 4천만을 조금 넘는 정도던데? 대체 계약을 어떻게 해야 그런 사기를 당할 수 있는 거지?”
4천만이 결코 적은 숫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1억 8천만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바스톤은 눈을 부릅뜨며 네르하를 노려보았다.
이건 계약의 언령으로 인해 페레이라 가문 전체에 발설 금지의 제약이 걸려 있는 것이었다.
“당연히 다 아는 수가 있지. 애당초 1억 8천만이라는 건 루시아 말대로 일개 가문이 빚으로 지기엔 너무 막대한 금액이었어.”
있는 집 자식으로 추정되는 루시아가 경악할 정도의 액수였으니 말해 무엇할까?
수여식이 벌어지기 이전, 네르하는 이러한 추측을 로젤리아에게 전했고, 유능한 로젤리아는 빠르게 페레이라 가문과 배커가 속해 있는 파벌을 파헤쳤다.
그리고 그 끝에 라데우스의 원로 중 하나인 길레드 라데우스가 얽혀 있는 것을 알아내었다.
네르하의 입에 사악한 미소가 맺혔다.
“대륙 평균 이율을 한참이나 초과한 수준이니 이게 터지면 라데우스 내부에서도 문제가 일어나겠지. 굳이 우리 쪽에서 터트리지 않아도 돼. 그냥 대부인 쪽 세력에 은근슬쩍 넘겨주면 그쪽에서 알아서 할 테니까.”
“……바, 방금 미소는 좀 악당 같았어요.”
루시아가 질색한 표정으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하지만 그랬다간 페레이라 가문이 진 빚을 완전히 청산할 수 없지.”
네르하는 준비해 온 서류를 주섬주섬 꺼냈다.
“받아라, 바스톤.”
“……이건?”
“너희 가문 가주의 서약서다. 내 허락만 떨어지면 언제든지 실행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
그 서류에는 페레이라 가문이 지고 있는 빚의 총액과, 길레드 라데우스가 언령을 이용해 페레이라 가문을 압박한 불법 계약의 전모, 그리고 그 증거들.
마지막으로 로젤리아 라데우스가 직접 페레이라 가문의 후원자가 되는 것은 물론, 후원자가 되어도 페레이라 가문의 연구 성취를 건들지 않겠다는 내용이 담긴 서약서였다.
“전에 말했었지. 네가 나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면 네 가문의 문제들을 모두 해결해 준다고.”
“…….”
“네 마음이 언제든 내게 돌아선다면 이걸 가지고 날 찾아와라. 언제든지 환영하지.”
바스톤이 저 서류를 가지고 따로 수작을 부리든, 아니면 침묵하든 그건 이제 네르하가 알 바가 아니었다.
녀석이 자신의 기대를 배신한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사람을 보는 눈이 잘못되었을 뿐이다.
서류에 얼굴을 박을 듯이 굴던 바스톤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째서 제게 이렇게까지 해 주시는 겁니까?”
“그 이유는 전에 이미 말해 줬을 텐데?”
네르하는 바스톤을 직시했다.
“나는 라데우스의 정점이 될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안심하고 등을 맡길 녀석들이 필요하다. 그 두 번째로 낙점한 게 바로 네 녀석이다.”
“…….”
“뭐, 이 녀석도 나름 세 번째로 생각하고 있긴 한데 아무래도 끝까지 잡아 둘 수는 없는 몸인 것 같아서 말이야.”
네르하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던 루시아의 뺨을 콕콕 찔렀다.
“쳇.”
루시아는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딱히 반론이나 항의를 하진 않았다.
서류와 네르하는 번갈아 보던 바스톤이 이윽고 마음을 굳힌 듯 이렇게 말했다.
“잠시 시간을 주셨으면 합니다.”
“어느 정도면 되지?”
“배커 님과의 인연을 매듭지을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말은 바스톤의 마음이 이제 거의 네르하에게 돌아섰다는 것을 의미했다.
“좋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말라고.”
“네. 너무 오래 끌지는 않을 겁니다.”
바스톤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무기 수여식이 끝나고.
판데모니움의 일이 있었지만 리브라 신입생들의 분위기는 상당히 밝았다.
당연히 원래라면 구경도 하기 힘든 아티팩트를 평생의 동반자로 얻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하하하! 형님! 이 스태프를 좀 보십쇼! 레어 메탈 중에서도 가장 희귀한 편에 속한다는 자코니움이 통째로 박혀 있습니다!”
“그래그래.”
알페온의 경우엔 고작 3단계를 통과했음에도 다른 이들보다 더욱 좋은 아티팩트를 얻었는지 수여식이 끝나고도 며칠 동안 내내 입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루시아가 ‘저러다가 번개까지 자르겠군요’라는 의미 모를 말을 내뱉을 정도로 알페온의 자랑은 상당히 심했다.
“그럼 오늘도 열심히 운동해 보죠!”
그래도 그런 자랑질을 넘어가 주는 건, 수여식이 끝났음에도 알페온이 단련에 대한 의지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기특하군.’
수여식을 앞두고 상당히 붐볐던 단련실은 거짓말처럼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즉, 인간을 찾기 힘들 정도로 휑하게 변했다는 소리다.
“어떻습니까, 루시아 양! 제 벤치프레스가 어느덧 80kg을 돌파했습니다!”
“괄목할 만한 성장이군요. 앞으로도 노력하세요.”
200kg도 한 손으로 가볍게 드는 루시아 앞에서 하는 자랑이라기엔 매우 초라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30kg를 간신히 들던 알페온이 이 정도로 성장한 건 정말로 괄목이라는 단어를 써도 괜찮을 정도였다.
‘저놈은 나중에 가면 꽤 볼만하겠어.’
네르하는 열심히 기구를 들고 끙끙대는 알페온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형님, 그러고 보니 곧 외부 실습에 대한 공고가 올라올 것 같은데 준비는 어떻게 돼가십니까?”
“딱히 준비랄 게 뭐가 있나? 하면 그냥 하는 거지.”
“실전에 나가는 만큼, 야영에 대한 연습이나 준비물들을 사전에 숙지하시면 편하실 겁니다.”
‘……그걸 굳이 숙지해야 하나?’
정마대전 시절 노숙과 선잠이 일상이었던 네르하는 한순간 알페온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나름 진지하게 해 준 충고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뭐, 그러도록 하지.”
“설레는군요. 좀 두렵기도 하고요. 첫 외부 미션에서는 심한 경우 사망률이 10%에 이른다던데, 제가 그중 한 명이 되지 않을까 요즘 잠을 설치고 있습니다.”
“10%라.”
네르하는 뭔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네르하의 입장에서 10%라는 수치는 정말로 적은 수치였다.
단순한 강호행도 아니고 무력을 휘두를 수밖에 없는 분쟁 지역에 실전으로 투입되는 것인데, 10%라는 수치 안쪽을 유지한다는 건 리브라와 라데우스 가문이 얼마나 이들을 신경 쓰고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
사비연 퓨전 판타지 소설
(주)조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