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크림슨 (3)>
“자, 다음은 너다.”
네르하의 선언이 있자마자 장년인의 뒤에 있던 자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그만! 뒤로 물러나!”
“쿠, 쿨리크 님.”
“명령이다!”
그제야 부하들이 뒤로 물러났다.
“제법 인망이 있군.”
이런 뒷골목에서 부하들이 솔선수범하며 우두머리를 지키려는 모습은 절대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당신, 정말로 마법사 맞소? 저들의 호위가 아니라?”
네르하는 대답 대신 자신의 손 위로 간단한 불꽃을 피우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쿨리크라 불린 장년인은 그제야 네르하가 마법사라는 것을 믿었다.
“실례했소. 상당한 실력자셨군.”
“계속했어도 꽤나 재밌었을 텐데 조금 아쉽게 되었군.”
상대가 경계를 완전히 풀고 나서야 네르하 역시 자세를 풀었다.
“군(軍) 관련 경력자인가?”
꿈틀!
아주 잠깐 쿨리크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왜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그냥. 부하들을 배치한 포진이 단순히 전략 조금 배웠다고 나올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서.”
게다가 저런 인망은 공포와 철권으로 통치하는 뒷골목 출신이 습득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관심도 많구려. 신경 꺼 주시오.”
“뭐, 그러지.”
네르하는 선선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본론으로 돌아와서. 난 너희들의 손님으로 찾아왔다.”
“어제 막 이 도시에 도착했을 텐데 어떻게 우리의 존재를 알고 계셨소?”
“몰랐는데?”
“……으응?”
순간, 무슨 개소리냐는 듯 쿨리크의 표정이 황당하게 뒤바뀌었다.
네르하는 추가적인 설명 대신 뒤에 있는 페텔과 헤젤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이, 선배들!”
“…….”
“…….”
네르하가 한순간 보인 괴물 같은 무력에 겁을 먹었는지 두 사람은 살짝 두려움이 섞인 눈으로 네르하의 부름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말했던 ‘수업’을 이어서 하도록 할게.”
“그, 그래.”
“보통, 이런 빈민가는 암흑가에서 밀려난 놈들이 대거 뒤섞여 있다고는 말했지?”
“마, 말했다.”
“그리고 그런 놈들이 살아남으려면 뭐라도 해야 한다고도 말했고.”
뜬금없이 시작된 뒷골목 강의에 쿨리크는 ‘이 새끼는 대체 뭐지?’라는 시선으로 네르하를 흘겨보았다.
“방금 말한 ‘뭐라도’라는 것엔 정말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있어. 그게 뭔지 알아?”
“……?”
네르하의 물음에 페텔과 헤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서로를 마주 보았다.
“바로 정보야.”
“허어?”
네르하의 말 다음에 이어진 신음 소리는 두 사람이 아닌, 바로 앞에서 일행을 이끌던 쿨리크에게서 흘러나왔다.
‘개방, 하오문. 가장 밑바닥에 존재하는 그들이 살아남아 무림에 이름을 떨칠 수 있었던 가장 큰 무기.’
이 도시의 암흑가가 단일 세력으로 통합된 것이 아닌 이상, 정보를 사고팔고 조율하면서 생존 중인 집단은 반드시 존재한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그런 집단은 빈민가 속에서 자신들을 숨기고 있다.
“음지라 해도 이런 도시에서 암흑가라면 음지 속의 양지라 할 수 있지. 정보를 취급하는 놈들이 그런 곳으로 나가면 대번에 잡아먹힐 게 뻔하니 이런 곳에 숨어 있을 수밖에.”
“대단하구려.”
쿨리크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제법 귀티 나는 귀족가의 도련님 같은데, 생긴 것과는 별개로 뒷골목의 생리를 아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알겠어? 내가 왜 선배들이 ‘더럽다’고 평가한 이곳에 왔는지.”
“…….”
의외로 페텔과 헤젤은 부끄러움을 느끼기보단 이번엔 뭔가 깊게 생각에 골몰한 모습이었다.
처음부터 정보상이 있다고 얘기하는 것보단 이런 식으로 실제적인 경험과 함께 길게 풀어서 생각할 거리를 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을 넓히는 데 더 도움이 될 것이다.
한차례 가르침을 내린 네르하가 다시 쿨리크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손님 받을 거야, 말 거야?”
“……따라오시오.”
더 이상의 충돌은 무의미하다고 여겼는지, 쿨리크는 얌전히 네르하와 일행들을 안내했다.
“이곳입니다.”
빈민가에서도 가장 안쪽.
가장 더럽고, 가장 복잡한 극빈층들이 사는 지역에서 네르하와 일행들은 온 집 안을 새빨갛게 칠한 한 낡은 오두막에 다다랐다.
“이곳이 바로 저희 조직 ‘크림슨’의 수장께서 위치하신 곳입니다.”
쿨리크의 말투는 어느새 하오체에서 존대로 바뀌어 있었다.
“조직 이름이 빨갛다고 집도 빨갛게 칠해 놨을 줄은 몰랐네. 이렇게 광고하고 다녀도 돼?”
“이곳까지 찾아올 뒷골목 조직들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습니다. 설사 찾아온다고 해도…….”
네르하는 쿨리크가 오두막 근방을 훑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이해했다.
곳곳에서 느껴지는 인기척. 개중에는 기초적인 마나를 각성한 자들도 더러 느껴진다.
네르하처럼 특이한 유형이 아닌 이상, 어지간해선 이 방벽을 넘어설 수는 없겠지.
뭐, 그거야 이제 네르하가 알 바는 아니다.
“들어오세요.”
안쪽에서 들려온 청아한 여인의 목소리에 네르하는 상황을 잊고 제법 놀랐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자 이런 골목과는 어울리지 않은 상당한 미인의 모습이 나타나 더욱 놀랐다.
“라데우스의 귀빈들을 뵙습니다.”
붉은 머리의 여인이 조심스레 네르하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라데우스’라는 말이 튀어나온 순간, 네르하의 표정은 어느새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 * *
붉은 머리에 붉은 눈동자.
이 대륙에는 온갖 다양한 머리와 눈 색깔을 진 이들이 있었지만 의외로 붉은색을 가진 존재는 매우 희귀한 축에 속했다.
네르하의 혈통인 은갈색의 라데우스처럼 말이다.
“아름답군.”
“칭찬 감사합니다.”
뜬금없는 외모 칭찬에도 여인은 능숙하게 대응했다.
“절대로 이 골목에선 있을 수 없는 외모야.”
아녜스와 같은 유형이라고 봐도 좋았다.
아무리 쿨리크 같은 남자가 곁에 있다고는 해도 연약한 몸으로는 절대로 그렌 타운 같은 도시에서 세력을 일굴 수 없었다.
“신기하군.”
“그렇습니까?”
“뱀파이어를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니까.”
“……!”
마기와는 다른 종류인 음마력이라고 하는 힘을 다루는 종족.
마족과는 사촌지간이지만 정식으로 대륙의 종족으로 인정받았다고 알려진 뱀파이어.
생전 처음 느껴 보는 힘이었지만 네르하는 눈앞의 여인의 정체가 뱀파이어라는 것을 대번에 꿰뚫어 보았다.
나름 여유롭게 일행을 맞이하던 여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떻게 알아보셨죠?”
“감.”
네르하는 오두막 안쪽에 마련되어 있는 자리에 앉으며 이렇게 말했다.
“네년이로군, 시장에게 우리의 정보를 판 장본인이.”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죠?”
“원래라면 라데우스의 행사를 방해한 죄로 이곳을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모조리 태워 버리는 게 순리겠지.”
“…….”
“나는 그래도 협상이란 걸 할 줄 아는 사람이라서 말이야.”
표정이 일그러진 여인이 조심스레 네르하의 맞은편에 앉았다.
누가 보면 집주인이 뒤바뀐 줄 알 정도였다.
“대충 상황은 알겠군. 너는 우리가 너와 네 조직의 정체를 모를 거라 확신하고 정보를 판 거야. 그 정보를 ‘어떻게’ 얻었는지는 차치하더라도 말이야.”
네르하의 말에 여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서 지금 좀 솔직히 당황스럽습니다.”
“나름 이중 삼중으로 보안을 가했겠지. 저 녀석까지 모르고 있었을 정도였으니 뭐, 나름 조심성은 인정하지.”
네르하는 여인의 뒤에 서 있는 쿨리크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진 것을 보곤 실소를 지었다.
녀석은 나름 월척이랍시고 데려온 듯한데 그야말로 초대형 폭탄을 집 안으로 끌고 들어온 셈이 아니던가?
“자, 그래서 정보력이 대단한 우리 뒷골목 두목 양반.”
“……세이라라고 합니다.”
“그래. 세이라 양.”
나긋하고 예의 바르게 상대를 대하고 있지만 지금껏 네르하를 접해 왔던 페텔과 헤젤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네르하의 심기가 매우 좋지 않다는 것을.
“들키지 않을 줄 알았던 것이 들키고, 이렇게 우리의 정체까지 미리 밝혀 가며 협상의 자리를 만들었으니, 뭔가 확실한 패는 있겠지?”
네르하의 목소리가 더욱 더 가라앉았다.
“이 조직이 살아남을 수 있는 그런 패 말이야.”
“네. 물론입니다.”
뱀파이어라는 특수성을 제외하더라도 세이라는 이 그렌 타운이란 무법 지대에서 살아남아 세력을 일군 여걸이었다.
당연히 아무런 대책 없이 네르하에게 라데우스라는 이름을 꺼낸 것이 아니었다.
“먼저, 사죄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해 봐.”
“저희 크림슨이 시장에게 정보를 판 것은 절대로 저희의 자의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조직 자체가 시장의 세력권 안에 있다. 그렇게 주장하고 싶은 건가?”
“네. 바로 그렇습니다.”
애초에 이 조직이 시장의 사조직, 혹은 그에 준하는 영향 아래 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물론 그런데도 이렇게 네르하를 맞이한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또한 저희가 아니었더라도 여러분이 라데우스라는 정보는 시장의 귀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저희는 어디까지나 전달자였을 뿐이니까요.”
“누구지?”
그 말뜻을 이해 못 할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순순히 네르하와 아크의 정체를 알아챈 자에 대한 정보를 내놓았다.
“그렌 타운에서 조용히 은거 중인 마법사입니다. 다만 완전히 시장의 편은 아니고 과거 시장에게 금전적으로 신세 진 것이 있어서 가끔씩 자문 역할을 맡는 정도입니다.”
“…….”
네르하의 표정이 살짝 심각해졌다.
‘무시하지 못할 실력자일 가능성이 높겠군.’
적어도 이번 임무 중에 사적인 감정으로 부딪쳐서는 안 될 상대임은 분명했다.
네르하의 표정이 살짝 부드럽게 변했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정보를 내놓는 건 상전을 갈아탈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이겠지?”
“아닙니다.”
“아니라고?”
“새로운 거래처를 확보하려는 적극적인 움직임이라고 알아주시면 좋겠습니다.”
“하.”
네르하는 살짝 헛웃음을 지었다.
감히 빈민가의 코딱지만 한 조직 따위가 라데우스를 상대로 거래질이라.
‘배짱이 두둑한 게 아주 마음에 들어.’
네르하는 신무조 시절부터 저렇게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인종을 좋아했다.
물론 아무런 준비도 없이 배를 째라고 내밀면 기꺼이 배를 째 버렸지만 말이다.
사아아아!
“흐읍!”
그 순간, 네르하의 전신에서 어마어마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키, 킬링 오라? 대, 대체 무슨……!’
숨이 턱 막히며 전신이 떨린다.
살기라는 것은 실력과는 별개로 수많은 생사를 넘나들어 죽음의 밑바닥을 경험한 자만이 내비칠 수 있는 것.
그 밑바닥의 깊이에 따라 살기의 질이 달라지기 마련인데.
‘세, 세상에?’
세이라는 생전 처음 접하는 의형살기(意形殺氣)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검성이라 불리는 케프렌의 기사단장조차 이런 느낌을 주진 못했는데!’
“흐, 흐윽!”
그녀의 뒤에 있던 쿨리크 역시 네르하의 살기에 압도당했는지 움직이지 못하며 식은땀만 흘리고 있었다.
뭐라도 말하지 않으면 죽는다!
세이라는 그 사실을 절절히 느끼고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혀를 굴렸다.
“아, 아무리… 라데우스 소속이시라 해도…….”
“호오?”
이 살기를 정면으로 받았는데도 입을 열어?
추측되는 실력보다 훨씬 정신력이 대단한 여인이었다.
세이라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언어로써 완성시켰다.
“볼일만 보고 떠나는 이에게… 충성을 바칠 수는… 없는 법입니다.”
“…….”
스으!
그 말이 끝나자 네르하의 살기가 사라졌다.
쿵!
“허억! 헉!”
세이라는 자신도 모르게 이마를 탁자 위에 박는 추태를 보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걸 탓하지 못했다.
“이것 참…….”
네르하는 엎어진 세이라를 향해 살짝 혀를 찼다.
아무래도 지금 서로 간에 인식과 정보의 차이가 꽤나 존재하는 듯했다.
네르하는 살심을 완전히 거두며 세이라를 향해 말했다.
“세이라라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 라데우스의 귀인이시여.”
“너는 우리의 정체를 알고 있음에도 정작 내 정체를 알아차리진 못했구나.”
“……?”
정체?
“라데우스에서 비밀 임무를 맡으신 마법사 아니십니까?”
“하긴, 이런 규모의 정보 조직이 라데우스 내부의 정보를 아는 데는 고작 그 정도가 한계겠지.”
리브라라든가, 외부 미션이라든가.
적어도 굵직굵직한 대형 정보 길드가 아닌 이상, 이런 정보는 절대로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정식으로 제안하지. 너희들, 전부 내 밑으로 들어와라.”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귀인들께서는 임무가 끝나면 돌아가실…….”
“내 이름은 네르하 라데우스다.”
자신의 말을 자르며 다시금 제안하는 네르하의 모습에 세이라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예. 네르하 라데우스 님,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만……. 누구시라고요?”
네르하 라데우스.
그 이름을 다시금 곱씹는 순간…….
세이라의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