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크림슨 (4)>
“네르하 라데우스라고 했다.”
“네, 네르하… 라, 라데우스?!”
세이라의 표정은 숫제 귀신을 만난 자의 표정과도 같았다.
하긴, 이런 곳에서 라데우스의 직계 혈손을 만났으니 놀랄 만도 하…….
“라, 라데우스가의 망나니…….”
하.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세이라는 자신의 입방정을 자학하며 다급하게 말을 주워 담았다.
“그래. 라데우스가의 망나니를 눈앞에서 보게 되니 감격스러운가?”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쿵!
세이라는 자신의 이마를 탁자에 박으며 석고대죄를 청했다.
입가에 심술이 가득 담긴 네르하의 모습을 본 순간,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런 세이라의 모습에 뒤에 있던 페텔과 헤젤이 감탄을 토해냈다.
“역시 네르하.”
“가문 밖에서도 그 명성은…….”
“선배님들?”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그 미소를 접한 두 사람은 대번에 각이 선 기립 자세로 시선을 피했다.
한차례 그들을 노려본 네르하는 다시금 미소를 만들며 세이라를 다독였다.
“뭐, 네가 나에 대한 어떤 소문을 들었든, 그건 헛소문이라고 강력하게 말해 두지.”
“아, 알겠습니다아.”
진지하게 말해서 낙오자도 아니고 망나니라니.
무슨 소문이 어떻게 퍼졌는지는 몰라도 아주 잘못된 정보가 가문 밖으로 퍼진 게 분명했다.
“어쨌든 나는 빈말로 너희를 거두겠다는 게 아니다.”
“…….”
“물론 이번 임무에서 너희를 거두는 것이 성공 확률을 가장 높일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부정하지 못하겠군. 하지만 내 이름을 걸고 너희들을 거둬 주겠다고 장담하지.”
세이라의 목소리에 작은 긴장감이 어렸다.
“‘라데우스 가문’이 아닌 ‘네르하 라데우스’의 이름이로군요.”
“맞아. 눈치가 빨라서 편하군.”
계속해서 세이라의 질문이 이어졌다.
“저희를 어떻게 쓰실 생각이시죠?”
이 부분에선 솔직하게 답해야 했다.
“밑바닥에서부터 조직을 일군 네 수완은 쓸 만하겠더군. 나 역시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처지라서 말이야.”
처음 습격해 온 숫자만 봐도 조직의 규모가 작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특히나 저격수까지 동원했을 정도면 더더욱.
“내가 원하는 건 나만의 정보 사조직이다. 앞으로 4년 후에 다른 곳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규모를 원한다.”
“4년 후라.”
이것 역시 상당한 고급 정보에 속했다. 팔아치울 수 있다면 못해도 만금은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사실상 4년 후에 라데우스에서 본격적인 후계 경쟁이 일어난다는 소리니까.
“그 기반 정도는 충분할 정도로 마련해 주지. 내가 원하는 정도로 규모를 키우는 건 네 수완에 달렸지만 말이야.”
마도 도시 베리타스에서 사업장을 열 수 있도록 해 주는 것만이 아니라 충분한 정도의 지원금 역시 있을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물론 너희들이 바로 이 제안을 받을 필요는 없다. 이번 일이 어떻게 마무리되냐에 따라 거절해도 무방하다.”
“꽤 자비로운 제안이시군요.”
“물론 이 제안을 받은 시점부터 일이 끝날 때까지 너희 조직의 정보력은 모두 나를 위해서만 써야 한다.”
“이런 사기꾸…….”
“내 정체는 더할 나위 없는 가치를 지닌 정보일 텐데? 그만한 가치는 있다.”
“강매에다가 떠넘기신 물건도 비매품이잖아요! 어딜 봐서 가치가 있단 말입니까!”
네르하 라데우스라는 정보를 외부에 팔아치울 경우, 그 후폭풍이 어떻게 몰아닥칠지는 생각조차 하기 싫다.
못해도 이 도시가 박살나는 건 확정이고, 거기에 자신들 역시 말려들 가능성도 100%에 가깝겠지.
“그래서? 내 이름을 밝힌 순간부터 제안을 거부하면 피를 보게 된다는 건 당연한 일이야.”
그 말에 주변의 온도가 몇 도는 내려간 듯했다.
고오오오!
의외로 그 순간, 네르하의 뒤에 있던 페텔과 헤젤이 조용히 마력을 끌어모으며 위협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장내 분위기는 더욱 험악하게 흘러갔다.
‘최소한의 눈치는 있군.’
분위기를 경직시켜 압박감을 주는 건 네르하의 노림수였다.
“으윽!”
세이라의 종족이 뱀파이어라고는 하나 전투력 자체는 그다지 높지 않아 보였다.
하긴, 바깥에선 3레벨의 마법사만 되어도 제법 인정받고, 4레벨 이상이면 어딜 가도 귀족 대우를 받을 수 있다.
세이라가 그 정도 수준이라면 이런 뒷골목에 머무르고 있을 리가 없지.
“일단 저희의 정보와 인력은 모두 네르하 도련님께 제공하겠습니다.”
“좋아. 현명하군.”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건 아직 확답을 드릴 수 없어요.”
“상관없어. 거절해도 뒤끝이 없으리란 건 내 이름을 걸고 장담하지.”
어차피 우선시해야 할 것은 흑마법사에 대한 일이다.
네르하는 일단 이곳에서 제대로 된 정보 조직의 협조를 얻을 수 있게 된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 * *
빈민가 조직 ‘크림슨’은 네르하의 생각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속해 있는 조직원만 무려 500에 달했고, 나름 전투가 가능한 인원 역시 백이 넘어갔다.
“내가 왜 너희들을 이용하려 하는지 알고 있나?”
“물론 알고 있죠. 흑마법사들 때문이잖아요?”
세이라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도시 내부에 숨어 사악한 인체 실험을 진행 중인 자들을 소탕하기 위해서겠죠?”
“잘 아는군. 그들과 시장의 관계는 어떻지?”
자포자기한 건지, 아니면 적극적으로 협력하려고 한 건지.
세이라는 지금, 네르하가 알고자 하는 고급 정보들을 냉큼 털어놓았다.
“협력 관계죠. 시장은 이 도시에서 공공연하게 열리는 암시장의 지배자예요. 그리고 흑마법사들은 암시장, 정확히는 그중 노예시장에서 막대한 돈을 뿌리는 VIP. 시장의 입장에선 소중한 고객인 셈이죠.”
네르하는 그 말을 듣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완전한 유착 관계가 아닌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VIP라는 말이 나온 걸 보니 하루 이틀 이랬던 게 아닌 것 같은데 용케 지금까지 걸리지 않고 잘 숨겨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이제 끝이지만.
“그럼 우리가 암시장을 건드리면 시장이 움직이고, 시장이 움직이면 흑마법사들도 움직이려나?”
설마 라데우스의 마법사인 우리를 제거하려 들기까지 하려나?
“가능성은 있죠. 시장의 탐욕은 상상을 초월하니까요.”
“하긴, 뭐, 여기가 완전한 라데우스의 영역도 아니니까.”
다 까발려지긴 했어도 이쪽은 어디까지나 ‘비밀 임무’를 맡고 온 상황이다.
그런 만큼 우리가 이 도시에서 의문사한다 해도 라데우스로서는 손쉽게 진상을 파헤치진 못할 터.
세이라가 넋두리를 하듯 중얼거렸다.
“시장의 협조를 구하려면 차라리 더 큰 돈을 제시하는 게 좋을 거예요. 그럼 아주 손쉽게 일을 처리할 수 있을 테니.”
그 말에 네르하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흑마법사와 손을 잡은 자다. 본가에서 시장을 내버려 둘 리가 없지.”
그리고 그와는 별개로.
“그런 놈에게 이득을 안겨 주면서까지 일을 처리하고 싶진 않군.”
“음…… 지금, 조금 그쪽이 마음에 들려고 하고 있어요.”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네르하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오늘 안으로 암시장에 대한 모든 정보를 정리해서 보내 주면 고맙겠어. 시간이 생명인 만큼 빠르게 일을 진행해야 할 필요가 있거든.”
“그러죠. 해가 지기 전까지 보내 드리겠으니 염려 놓으셔도 됩니다.”
이미 정리해 놓은 자료가 있는 듯, 세이라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다만 뭐지?”
“만약 시장과 충돌하실 예정이라면 가능하면 피하시라고 권하고 싶군요.”
“이유는?”
“아까 전에 말씀드린, 당신들의 정체를 대번에 알아차린 마법사. 만약 시장을 건드린다면 그 마법사와의 충돌 역시 변수로 고려하셔야 됩니다.”
“…….”
네르하의 이마에 살짝 주름이 졌다.
“단순히 자문 관계 정도가 아니라 직접 나설 수도 있나?”
“그자가 먼저 우리를 통해 시장에게 위기를 알리라 했으니 가능성은 있습니다.”
네르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려해 두지.”
* * *
“시장이 흑마법사와 협력 관계에 있고, 또 그 시장을 돕는 강력한 마법사의 존재가 있다라.”
시장의 초대를 받아 만찬에 참석한 엘림은 꽤나 잘 대접받았는지 약간 얼큰해진 상태로 돌아왔다.
“고작 하루 만에 이 정도면 상당한 성과로군. 수고했다, 네르하 라데우스.”
“감사합니다.”
마나로 취기를 몰아낸 엘림은 곧바로 정상적인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 정보와 결합하면 우리를 부른 것은 처리하기 위함이 아니라 단순히 반응을 보려던 것이었나.”
“아무래도 시장 본인이 흑마법사가 아닌 단순한 금전적 관계라면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겠죠. 또한 시간을 벌 목적도 있었을 겁니다.”
“시간이라면?”
“자신의 치부를 숨겨야 할 시간 말이죠.”
우리가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일 거라는 걸 알았으니 저들도 뭔가 움직임을 보이긴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암시장. 시장은 분명 암시장의 규모를 축소하거나 자신과 관련되었다는 증거를 은폐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우리를 제거하려 들든가 말이지.”
엘림 역시 그 가능성을 염두에 둔 듯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하지만 그래도 움직이지 않을 수는 없다. 앞으로의 계획이 따로 있나?”
네르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크림슨의 협조를 얻게 되었으니 설사 장이 열리지 않아도 암시장의 근거지가 어디인지는 알 수 있을 겁니다. 거길 들쑤시다 보면 뭐라도 증거가 나오겠죠.”
가장 확실한 건 장부.
누가 언제 누구를 얼마에 구입했는지, 그리고 어디로 ‘배송’했는지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는 장부는 그야말로 확실한 물증이 될 것이다.
“이제 고려해야 할 건 상대 흑마법사들의 전력, 그리고 우리의 정체를 시장에게 알렸다는 그 마법사의 존재인가?”
엘림의 얼굴에 고뇌가 일었다.
처음엔 가벼운 조사 차원에서 이번 임무를 맡았지만 흑마법사들이 생각보다 오래 이 도시에 뿌리박혀 있었다면 적의 전력은 상정했던 것보다 훨씬 강할 가능성이 컸다.
“어쩌면 본가에 지원을 요청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
6레벨의 마법사 셋과 5레벨의 마법사 둘, 그리고 3레벨 이하의 풋내기 셋.
전력으로선 나쁘지 않지만 엘림은 어쩌면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일단은 움직일 수밖에 없겠군.”
“언제 움직일 생각입니까, 대장?”
부하 마법사의 말에 엘림은 묘한 의미가 담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선 네르하 역시 이해한다는 듯 같은 미소를 지었다.
“분명 네가 포섭한 조직이 저녁까지 정보를 건네주기로 했다지?”
“네. 맞습니다.”
“그럼 그 정보를 습득한 후 바로 움직인다면 아주 훌륭히 허를 찌를 수 있겠군.”
“시장은 우리가 벌써부터 이만한 정보를 모았는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겁니다.”
엘림과 네르하의 마음이 맞았다.
엘림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일행들에게 선언했다.
“오늘 밤, 바로 암시장을 습격한다. 모두 준비를 해 두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