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시저 루드벡 (1)>
‘허!’
딱 봐도 범상치 않은 위력을 지닌 주먹.
일반인이라면 닿는 순간 머리가 터져 버릴 것이 분명한 일격이었다.
하지만.
까드드드득!
무언가에 갈려 나가는 소리와 함께 네르하가 날린 블레이즈 피스트가 그대로 노인의 눈앞에서 가로막혔다.
“……!”
“허허, 이 버릇없는 녀석 좀 보게?”
나름 완벽한 기습이라고 여겼지만, 그 짧은 순간 노인은 블레이즈 피스트를 완벽히 막아 낸 것이었다.
“나름 쓸 만한 수법이구나.”
주먹이 막힌 것을 안 네르하는 그대로 거리를 벌리기 위해 보법을 밟았다.
무인과의 싸움이라면 연계로 다시 일격을 넣었겠지만 상대는 마법사.
이런 근접 거리에서 마법에 직격당하면 분명 어지간한 부상으로는 끝나지 않을 터.
“흡!”
하지만 노인의 반응은 네르하의 예상을 한참이나 초월하고 있었다.
바로 아래쪽에서 두툼한 노인의 무릎이 그대로 네르하의 턱을 노리며 올라온 것이다.
터업!
다급히 손을 뻗어 그 공격을 막아 내긴 했지만 노인의 공격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허허헛!”
부웅! 부웅!
마치 네르하의 움직임을 예상하고 있다는 듯 그대로 반대쪽 정강이가 네르하의 머리를 노렸다.
‘쳇!’
단순한 체술이라면 충분히 흘려버릴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네르하는 차마 그러지 못하고 몸을 뒤쪽으로 날려 공격을 피했다.
‘이 늙은이!’
파지지직!
아까 전, 네르하가 간신히 알아차렸던 새하얀 저음(低音)의 뇌전. 노인의 전신을 흐르듯 감싸고 있는 그 뇌전이 네르하의 반격을 봉쇄했다.
“이 나이가 되었지만, 육체 능력은 젊은이들 못지않지!”
노인이 껄껄 웃으면서 네르하를 향해 달려들었다.
“자, 계속 어울려 보자꾸나! 라데우스의 별종아!”
“큭!”
네르하는 생전 처음 접해 보는 노인의 전투 스타일에 적잖이 당황했다.
상대의 체술의 수준 자체는 절정까진 아니어도 능히 일류라고 볼 수 있었다. 노인의 투로와 초식들은 바스톤과 비교하면 실례일 정도로 능숙하고, 또 깊이를 담고 있었다.
물론 이것뿐이라면 고전하진 않는다.
문제는 여기에 더해 저 노인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압도적인 마나와, 그걸 이용해 싸우는 초고속의 마법 영창이었으니까.
한동안 노인의 일방적인 몰아세우기가 이어졌다.
“자, 이것도 받아 봐라!”
시종일관 방어로 일관하는 네르하의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네르하에게 근접한 노인의 다리에 한순간 환한 불꽃이 맺혔다.
단순한 파이어 마법이 아닌, 고레벨의 마법이 분명한 초고온의 불꽃!
“불의 속도로 차여 본 적이 있나?”
“그건 또 무슨 개소리……!”
노인은 익살스러운 웃음과 함께 그대로 네르하에게 발차기를 날렸다.
한순간, 네르하의 뇌가 미친 듯이 위기의 경종을 울렸다.
‘저건 호신강기로 막으면 안 된다!’
저걸 막기 위한 최선의 수는 바람!
휘리리릭!
그 판단이 끝나자마자 네르하의 양손에 작은 용권풍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호오?!’
그리고 그 용권풍은 마치 탄성을 지닌 듯 아주 부드럽게 회전하며 노인의 불꽃 발차기의 궤도를 다른 쪽으로 돌려 버리기 시작했다.
노인의 눈이 크게 떠졌다.
“고작 3레벨에 불과한 윈드 스피닝을 이렇게 응용해?”
게다가 마법을 이용해 아주 자연스럽게 공격을 흘리는 기사의 방법을 사용하기까지.
“하지만 마법을 시전하는 게 너무 미숙하군! 무엇보다 영창이 너무 느려!”
번쩍!
네르하는 뜬금없이 정면에 나타난 마법진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분명 발차기를 흘려 버린 탓에 노인의 상체가 뒤틀려 있었는데, 그 상태로 노인은 네르하의 눈앞에 마법진 하나를 무영창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젠장.”
네르하는 저 마법을 막아 낼 수 없으리라 직감했다.
퍼엉!
가벼운 폭발 소리와 함께 네르하의 신형이 그대로 튕겨 나갔다.
“커헉!”
내장이 진탕되는 고통과 함께, 꾹 다문 입가 사이로 토혈이 흘러나왔다.
늘어진 네르하를 향해 노인이 천천히 다가왔다.
“허허허, 정말 재밌는 아이로고.”
“……빌어먹을 늙은이.”
“오, 아직 말을 할 여유가 남아 있었나?”
다행히 노인의 무영창 마법은 그리 강력한 것이 아니었다. 직격당했음에도 팔다리는 여전히 붙어 있었으니까.
네르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주단이란 놈과 싸우는 것보다 열 배는 힘들군.’
지금까지 노인이 보인 마력량 자체는 주단이 보인 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힘만 쌓았을 뿐 고등한 전투 경험이 전무한 주단과는 다르게 저 노인은 절정급 이상의 육체 능력자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압도적인 전투 경험과 노련함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어디까지나 후배와 놀아 주는 기분으로 싸우고 있을 뿐, 저건 분명 전력은커녕 절반의 힘도 내지 않고 있을 터.
“노인장, 정말 끝장을 봐야 하겠습니까?”
이대로 계속 전투를 진행하는 건 승패를 떠나 네르하에겐 좋지 않은 일이다.
어디까지나 지금 이곳은 적진, 즉 암시장의 중심부였으니까.
“끝장은 무슨. 오랜만에 만난 싹수 푸른 애송이를 조금 어루만져 주고 있을 뿐인데.”
그런 네르하의 주장은 이미 한껏 흥취가 돋운 노인에겐 와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역시 아직 수세에 몰렸다는 얼굴은 아니구나. 감추어 둔 비장의 수가 몇 개는 더 있으렸다?”
히죽히죽!
장난스럽게 웃음을 짓는 시저의 모습에, 네르하는 감정을 싹 가라앉혔다.
‘이거, 기분이 좀 더럽군.’
아무리 역량이 과거의 1푼도 채 되지 않는다고 해도, 이대로 농락만 당하다가 끝나는 건 자존심이 용납하지 못한다.
“후우우…….”
가볍게 호흡을 고른 네르하는 그대로 권법의 기수식을 취했다.
“좋습니다, 노인장. 지금부터는 좀 많이 놀라게 되실 거요.”
네르하의 말을 들은 노인이 살짝 헛웃음을 내뱉었다.
“자신감이 과하구만. 하긴, 그 나이대에 그런 실력과 의외성이라면 어지간한 놈들은 제대로 대응도 못 하고 골로 가긴 하겠어.”
후퇴는 불가능하다.
설사 기절한 저들을 내버려 두고 도망간다 해도 저자의 실력이라면 얼마 가지 못하고 붙잡힐 것이다.
분명 저 노인은 이 도시에 있는 모든 이들을 맞상대하고도 이겨 낼 역량이 있었으니까.
‘활로는 눈앞. 승리를 쟁취해 약속을 이행하게 한다.’
그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선, 단순한 투기와 의기만으로는 부족하다.
‘죽인다.’
네르하의 주변을 맴돌던 기세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살심(殺心)은 일어났지만, 살기(殺氣)는 일어나지 않는다.
일명 무심(無心) 혹은 무은(無隱)의 경지.
이 세계에 와서 상대에게 처음 느끼는 아득함이란 감정에도 네르하는 오히려 호전적인 미소가 맺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호오?”
노인은 네르하의 그런 모습에 큰 흥미를 느꼈다.
보통, 이런 식으로 ‘당해 낼 수 없다’라는 감정이 머릿속에 새겨진 순간, 절대다수는 사기와 전의가 꺾여 평소 실력의 절반도 못 내는 상황에 이르고 만다.
하지만 눈앞의 네르하는 오히려 넘어설 수 없는 절벽을 보았음에도 기어코 넘어서겠다며 기어오르고 있다.
‘저건 오만이나 만용으로 치부할 게 아니다.’
선천적인 기질이 타고났거나, 아니면 수많은 전장을 넘어서 마음의 도를 깨우쳤거나.
뭐가 됐든 저 네르하 라데우스라는 녀석이 보통 싹수가 아니라는 것 하나는 확실했다.
‘흐흐, 사자의 새끼는 그래도 사자라는 건가?’
노인의 뇌리에 마법 하나로 이 대륙을 제패한 어느 거대 가문의 주인이 떠올랐다.
그자와 저 애송이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건 자신의 착각일까?
“원하는 대로 끝까지 어울려 드리지. 어디 한번 다시 들어와 보시오.”
“크흐흐, 건방진 녀석.”
노인은 어느새 자신의 말투가 꽤나 부드러워졌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어디 한번 계속 놀아 보자꾸나!”
* * *
‘일격에 승부를 낸다.’
이만한 실력자를 상대로, 길게 끌면 끌수록 무조건 패배하게 되어 있다.
철저하게 자신이 쌓아온 최강의 일격으로 승부를 봐야만 했다.
“자, 어디…….”
노인이 가볍게 네르하에게 견제를 날리려던 찰나.
“흠?!”
네르하의 자세를 바라본 그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어졌다.
“…….”
흐르는 물과도 같은 잔잔한 네르하의 눈.
‘거, 어린놈의 눈빛이 무슨?’
유수(流水).
자신이라는 압도적인 실력자를 눈앞에 두고도, 평정심이 깨지기는커녕 오히려 차분하게 승산을 논하는 눈빛.
저건 전쟁 용병 중에서도 최고의 베테랑들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을 법한 모습이었다.
그런 네르하의 자세와 시선 속에서, 시저는 상대가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렸다.
‘저놈, 일격에 승부를 낼 셈이로구나!’
이런 압도적인 역량 차이 속에서 천운이 따라야만 찾아볼 수 있는 눈곱만큼의 승산.
그 승산의 이름은 바로 단기결전이라 한다.
화악!
가라앉았던 네르하의 전신이 대번에 금빛으로 물든다.
그 금빛은 폭발적으로 터져나가며 네르하의 전신을 휘감기 시작했다.
네르하가 펼친 금빛의 정체를 알아본 노인은 기함을 터트렸다.
“이, 이런 미친놈이!”
저건 분명 검왕 급의 기사들만이 펼칠 수 있다는 오러가 분명했다.
어째서 저런 애송이가 오러를 시전할 수 있는지는 둘째 치더라도.
그 오러가 빚어낼 파괴력과 여파를 대번에 계산해 낸 시저가 다급하게 네르하를 말렸다.
“여길 싹 쓸어버릴 셈이냐?! 여기 있는 게 얼마나 귀한 것들인데! 내가 살짝 빼돌리려고 그놈에게 얼마나…….”
“노인장이 먼저 시작하신 겁니다.”
파파파팟!
자리를 박찬 네르하의 신형이 거대한 창날로 변해 노인에게 쏘아졌다.
금철유성(金鐵流星)!
네르하가 현재 펼칠 수 있는 최강의 일격.
마룡으로 변한 주단을 끝장낸 금빛의 일격이, 그대로 노인의 시야를 빛으로 가리며 막강한 파괴력을 발산했다.
“이런 젠장!”
새삼 미친놈을 잘못 건드렸다는 생각과 함께, 노인의 손에서 막대한 마나가 뽑혀 나오기 시작했다.
네르하의 금철유성이 노인의 마나와 충돌하는 순간.
쿠―웅!
마치 뱃속에서 폭탄이 터지는 듯한 기묘한 고동소리가 창고 안쪽에서 터져 나왔다.
* * *
“헉, 헉!”
털썩!
체내의 모든 마나를 쥐어 짜낸 결과, 네르하는 결국 탈진에 이르렀다.
“…….”
쓰러진 네르하를 바라본 노인은 조용히 어깨 부근의 견장을 매만졌다.
까끌하게 잡혀야 할 견장의 느낌이 느껴지지 않는다.
정말로 네르하는 약속대로 자신에게 유효타를 한 방 먹인 것이었다.
비록 정타는 아니었고 어깨를 살짝 스친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유효타는 유효타라고 인정할 정도는 되었다.
“놀랍구나.”
노인은 쓰러진 네르하의 뒤통수를 한동안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저 나이에 오러를 사용하는 것도 놀랍지만, 설마 이런 파괴력이라니.’
마지막 순간에 노인이 전력으로 위력을 억제하지 않았더라면 주변이 모조리 터져나갔을 것이다.
“특이한 녀석이군. 라데우스의 직계인 놈이 마법적인 성취보다 육체적인 성취가 압도적으로 뛰어나다니… 나이대를 고려하면, 어지간한 케프렌의 직계도 너 정도는 아닐 것이다.”
“그게… 뭐 어쩌란… 거요?”
네르하는 탈력감을 이겨내며 겨우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인을 바라보는 네르하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먹히지 않았다.’
기술의 영역이 아니었다. 마지막 순간, 노인은 네르하의 금철유성을 순수한 힘으로 억눌러 버린 것이었다.
그만큼 기본적인 역량의 차이가 난다는 소리였지만, 마법이 아닌 순수한 마나의 힘으로 억누른 걸 보면 역량의 차이를 좁히면 승산이 있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노인은 빙긋 웃으며 날아간 자신의 견장을 툭툭 건드렸다.
“인정하마. 마지막 일격은 이 천하의 시저 루드벡도 간담이 좀 서늘했다.”
시저 루드벡이라는 이름인가?
‘응?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네르하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분명 어디선가 한번 들어 본 이름이었다.
분명 리브라 입학 전, 클로이아에게 대륙의 유명인들에 대한 강의를 받을 때인 것 같다.
기억을 좀 더 뒤져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눈앞에 닥친 지금 상황은 그럴 여유를 주지 않았다.
네르하가 살짝 굳은 표정으로 시저를 바라보았다.
“우릴, 어떻게 하실 거요?”
만약 시저가 이쪽을 향해 살심을 품는다면 네르하 역시 진원지기를 폭발시켜 마지막 도박을 벌이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시저에겐 그럴 마음이 없었다.
“뭘, 재밌게 놀았으니 이젠 돌아가야지. 약속은 지킨다.”
“…….”
“뭐, 그나저나…….”
노인은 네르하를 내려다보며 은근한 기색으로 제안을 보냈다.
“애송아 너, 내 제자가 될 생각은 없느냐?”
“……?”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