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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62화 (62/237)

62화

<아네시스 케프렌 (1)>

“으허! 으허허! 으허허허허!”

뭐가 그리 좋은지 시저의 입가에선 웃음이 떠나질 않고 있었다.

“슬슬 바깥의 소요가 진정된 것 같습니다만. 빨리 떠나야겠군요.”

체감상 이 창고에 머무른 지도 무려 한 시간이 넘어갔다.

지금쯤이면 누가 승리했든 전장이 마무리되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시저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음, 물론 그렇지. 한참 전에 바깥으로 뛰쳐나간 이곳 놈들은 전멸했고, 기사 놈들이 이곳 주변을 뒤지고 있는 참이다.”

“…….”

“아마 수색 진도상 여기까지 오는 건 앞으로 10분도 채 걸리지 않겠지.”

“서둘러야겠군요.”

네르하는 여전히 기절해 있는 마하타와 두 선배들을 깨우기 위해 다가갔다.

“음, 제자야?”

“아직 제자는 아닙니다만.”

“이쯤 되면 그냥 제자나 다름없지. 으히히히!”

“…….”

네르하는 슬슬 저 시저라는 영감의 정신에 문제가 좀 있는지를 걱정했다.

“크흠! 흠! 아무래도 다음에 다시 만나는 건 너희가 흑마법사에 대한 일을 해결한 뒤가 되겠구나.”

“……노인장께서 도와주신다면 큰 힘이 될 텐데요.”

큰 힘 정도가 아니었다.

시저가 나서면 이곳에 있는 흑마법사는 반나절도 되지 않아 정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시저는 고개를 내저었다.

“처음 만났을 때 말했듯이 나는 딱히 흑마법을 혐오하진 않는다. 흑마법 역시 궁극에 다다를 가능성을 품은 학문이지.”

시저의 성향이 무림으로 따지면 정사지간에 속해 있는 만큼 저런 생각을 갖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다만 흑마법엔 별다른 유감은 없어도 이번 일은 선을 좀 넘었지. 그래서 라데우스 가문에 흑혈의 정보를 풀어 너희를 끌어들였지 않았느냐?”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네르하의 표정이 더없이 멍청해졌다.

자신들의 정체를 시장에게 까발린 자가 이젠 이 도시에 라데우스의 추적자들을 불러온 장본인이라고?

네르하가 입가를 실룩거리며 물었다.

“그럼 왜 시장한테 우리 정보를 넘겼습니까?”

“뭐, 라데우스도 딱히 마음에 들지 않으니 좀 골려 주려고 했지. 여기에 케프렌도 끌어들이면 더 좋다고 생각했고. 크흐흠!”

“…….”

이 말인즉, 지금 이 도시에 이전 만난 자들의 정체가 케프렌이라는 걸 확정함과 동시에.

그 케프렌의 기사들이 존재하는 것도 다 저 시저 영감탱이의 짓이란 소리였다!

“이런 망할 늙은이!”

네르하의 화가 폭발하려던 찰나, 시저의 몸이 갑작스럽게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어딜 도망가!”

“허허허! 그래도 널 미리 알았다면 이런 장난질은 치지 않았을 거다. 그 사실에 위로를 좀 얻거라. 허허허!”

“그걸 말이라고!”

“그럼 리브라에서 보자꾸나, 제자야!”

대번에 시저의 신형이 사라지며 잔상만이 남았다.

게다가 한 방 먹이면 선물을 주겠다는 약속도 어기고 도망가 버렸다!

“응?”

네르하가 분을 삭이며 이를 갈고 있을 때.

시저가 사라진 자리에 무언가 자그마한 함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뭐지?”

함의 위에는 작은 쪽지가 있었는데, 마력사로 휘갈긴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제자를 위한 첫 번째 선물이다. 이 창고에서 가장 귀한 물건이니 내가 가기 전까지 잘 챙겨 먹고 준비 잘하고 있거라. 아, 켈릭스 놈에겐 비밀이고! ―사랑하는 사부가.]

“…….”

딸깍!

네르하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함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이전, 네르하가 복용한 최상급 마나 블래스트에 버금가는 막대한 영기를 품은 영약 세 알이 황홀한 자태를 내보이고 있었다.

“흐으음!”

시저에 대한 분노가 아주~ 부드럽게 가라앉은 순간이었다.

* * *

‘엄청나군.’

중원에서도 몇 번 보지 못했던 엄청난 영단이다.

이곳에서 가장 귀한 물건이라는 게 납득이 될 정도로 강렬한 기운이 뭉쳐진 게 느껴진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이 영단이 극음(極陰)을 품고 있다는 점이었다.

‘클로이아가 좋아하겠어.’

네르하는 시저에게 받은 선물을 품에 넣은 뒤 다른 일행들을 깨웠다.

다행히 마하타는 어깨 몇 번 두드리는 것으로 괜찮았지만, 페텔과 헤젤은 뺨이 꽤나 빨개질 때까지 두들기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마하타에게 사정을 설명하기 위해선 상황을 좀 각색할 필요성이 있었다.

세 사람이 기절한 이후 네르하는 마치 광대처럼 상대에게 농락당했고, 네르하를 가지고 놀던 상대는 마지막 남은 네르하를 기절시킨 뒤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떠나갔다.

그리고 가장 먼저 일어난 네르하는 상대가 마지막으로 남긴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라는 조잡하기 짝이 없는 삼류 각본이었다.

하지만 이 각본은 그런대로 먹혀 들어갔다.

바로 자신들을 습격한 자의 정체가 너무나 거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시, 시저 루드벡이라고!”

“유명한 분입니까?”

네르하의 물음에 마하타의 표정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명왕(冥王) 시저 루드벡을 몰라?”

“꽤 거창한 칭호네요.”

“대륙에 단 다섯 명만 존재한다는 8레벨의 대마법사야! 과거, 가주님과 겨루어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전설적인 존재라고!”

‘우리가 그런 자의 손에서 살아남다니!’라고 감격해하는 마하타의 모습을 보며 네르하는 떨떠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 정신병자 같은 영감님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어?’

실력이 고수라는 걸 눈치챈 것과는 별개로 명성의 대단함은 타인에게 확인받지 못하면 쉽게 체감할 수 없는 법이었다.

“보고할 게 늘었구나. 어쨌든 천운이야. 그런 자를 마주하고도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결과물까지 얻어 내었으니.”

마하타는 암시장의 장부를 소중히 품에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뒤로 양쪽 뺨이 시퍼렇게 부은 페텔과 헤젤이 울상인 얼굴로 뒤를 따랐다.

“더 지체할 시간 없어. 빨리 본거지로 돌아가자!”

한 시간이나 지나서도 자신들의 모습이 외부에 발견되지 않은 건 천운이었다.

그런 생각을 한 마하타와 일행들은 빠르게 창고를 나서며 여관으로 귀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

“암시장의 잔당이다! 쫓아!”

“지금까지 남아 있을 정도면 윗놈들이 분명하다! 반드시 붙잡아!”

“……!”

창고에서 나와 바깥으로 달리자마자 귀신같이 네르하와 일행들의 존재를 알아챈 기사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무시하고 뛰어! 대응할 시간 따위 없어!”

비록 서로 관여하지 않겠다는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해도 지금, 일행의 품속엔 암시장의 장부가 들어 있었다.

저들도 분명 목적이 있어서 이곳을 습격한 것일 터.

만약 이것이 들통나게 되면 저들과의 관계가 어떤 방향으로 변하게 될지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추측할 수 있다.

“고, 곧 붙잡힐 거 같습니다!”

뒤쪽에서 몰려오는 막대한 압박감에 헤젤이 목소리를 떨며 외쳤다.

기사들의 소란으로 인해 상가 인근엔 어둠이 깔려 있다.

마하타가 생도들에게 헤이스트를 걸어 주었음에도 기사와 마법사의 근본적인 신체 능력은 어떻게 좁힐 수가 없었다.

게다가 상대는 정예가 분명했고, 이쪽은 마하타를 빼면 정식 마법사도 아니었으니까.

“젠장!”

마하타가 응전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던 순간.

“먼저 가시죠.”

마하타가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어느새 네르하가 차가운 눈으로 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네르하 라데우스!”

마하타는 기함했다.

이미 네르하에게 저들의 정체가 케프렌이라는 걸 알게 된 상황.

“저와 상대쪽 우두머리는 서로 안면이 있죠. 어떻게든 최대한 시간을 끌고 귀환하겠으니 먼저 가세요.”

“하, 하지만 너는……!”

네르하는 어디까지나 보조로 투입된 생도에다가 라데우스의 직계다.

만약 네르하가 저들에게 붙잡혀 케프렌에게 압송된다? 그 이후는 상상하기도 싫었다.

하지만 네르하는 단호했다.

“외부 미션에 투입된 이상, 지금은 실전입니다. 그 실전에서 성공 확률이 가장 높은 자가 뒤를 맡는 것은 상식. 거기에 지위와 핏줄이 연관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네, 네르하!”

“너……!”

페텔과 헤젤이 감격스러운 눈으로 네르하를 바라보았다.

고귀한 핏줄임에도 자신들을 살리기 위해 솔선수범하는 모습이라니!

‘아니, 아무리 그래도 정도가 있지!’

네르하의 말은 이상적이었지만 현실을 무시하는 소리이기도 했다.

그런 마하타의 기색을 읽었는지 네르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타일렀다.

“전 죽지 않아요. 잡히지도 않습니다.”

“……!”

“그 시저 루드벡과 맞서서도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저런 놈들 따윈 아무것도 아니죠.”

뭐, 그건 어디까지나 시저가 네르하를 좋게 봐주어서였지만 말이다.

“그러니 가세요. 우리가 위험을 무릅쓰고 얻어 낸 공은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계속해서 네르하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마하타로서도 더 이상 어찌할 수가 없었다.

“반드시 무사히 돌아와!”

“네.”

마하타는 최대한 헤이스트를 중첩시키며 속도를 높였고, 네르하는 잠시 속도를 줄이더니…….

“허엇!”

그대로 선두에서 자신들을 추격하던 아녜스를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다, 당신은?!”

달빛이 비추어지고 기사의 시야가 눈을 뜨면서 아녜스는 네르하의 모습을 확인했다.

하지만 상대가 인지했음에도 네르하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자, 잠깐!”

우득!

아녜스의 손짓에도 네르하는 그대로 몸을 날려 그녀의 흉갑 부분을 발바닥으로 후려쳤다.

즉, ‘날라 차기’를 시전한 것이다.

“끼야아아악!”

“아, 아가씨!”

“아가씨이이!”

미처 대응하지 못한 아녜스가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마나를 싣지 않은 단순한 발차기에 갑옷 부분을 노린 거라 큰 대미지는 없겠지만 그래도 좀 많이 아플 것이다.

“이, 이놈이!”

추격하던 기사들은 네르하를 공격하기보단 아녜스의 신상을 먼저 살폈다.

그에 따라 자연스레 추격은 중지되었고, 대치 상황이 이어졌다.

“오랜만이군, 아녜스.”

“다, 당신! 지, 지금 일부러!”

꼴사납게 땅바닥을 구른 아녜스가 도끼눈을 뜨며 고개를 쳐들었다.

“응? 무슨 소리지?”

“무슨 소리? 무슨 소리이이이?!”

“그나저나 곧 이 도시를 뜰 것 같다고 하더니 아직도 있었나?”

“이번 일만 끝내고 돌아갈 생각이었습니다!”

아녜스는 진심으로 화났는지 씩씩거리며 네르하에게 다가왔다.

“당신! 암시장 창고 안에서 나온 걸 보니 당신도 분명 뭔가를 찾아내었던 거죠?”

“글쎄다?”

의뭉스럽게 반응하는 네르하의 모습에도, 아녜스는 무언가를 확신하는 듯 네르하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외쳤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저희는 암시장의 노예 장부가 필요해요! 만약 당신들이 그 장부를 손에 넣었다면 저희에게 파시거나, 그렇지 않다면 그 정보를 공유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아가씨, 너무 성급하십니다!”

“시끄러워요! 이게 얼마 만에 찾은 증거인데!”

아녜스는 생각보다 흥분했는지 주변에 있던 기사의 조언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그래도 나름 실수를 만회하려는, 이전과는 꽤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노예 장부라, 우리 목적과는 딱히 관련이 없는 말이로군.”

“말을 돌리시는군요. 관련이 없지만, 그 정보를 손에 넣었을 수는 있죠.”

오호, 제법 예리한데?

신중하지 못한 것과는 별개로 아녜스의 안목은 제법 날카로웠다.

“흠…….”

네르하는 마하타와 두 선배들이 이제 완전히 사정거리 밖으로 나갔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제 그냥 이놈들을 따돌리고 귀환해도 상관없긴 한데.’

문제는 이것들이 우리 여관의 위치를 알고 있다는 점이겠지.

만약 끝까지 따라온다면 꽤나 귀찮아질 것이다.

“노예 장부가 왜 필요하지? 그것부터 솔직히 말해라.”

“그, 그건!”

그 말에 아녜스의 표정이 급격히 흐려졌다.

뭔가 밝히지 못할 사정이라도 있는 건지 그녀의 뒤에 있던 기사 하나가 낮은 목소리로 대신 답했다.

“가문의 명예에 관한 것이오. 함부로 말할 순 없소.”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우리 이만 헤어지자고.”

“자, 잠깐!”

아녜스가 다급하게 네르하의 앞을 막아섰다.

“말…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확답이 필요해요.”

“정보 공유 말이냐?”

“맞아요.”

네르하는 잠깐 생각했다.

어차피 시장을 압박할 카드는 다른 장부로 대체해도 충분하다. 노예 장부가 흑마법사들과 연관된 가장 큰 증거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대체 불가능한 것까지는 아니었다.

“좋아. 그렇게 하지.”

“……!”

대번에 아녜스의 표정이 환해졌다.

반면에 기사들은 걱정스럽게 아녜스를 바라보았다.

“아가씨…….”

“괜찮아요. 어차피 제 독단으로 벌인 일. 이번 일이 잘못된다고 제가 오욕을 얻는 것 외에 가문에 해를 끼칠 일은 없습니다.”

아녜스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는 차분하게 자신의 목적을 밝혔다.

“저는, 실종된 제 언니를 찾아 이곳에 왔어요.”

“언니?”

아녜스의 입에서, 철저히 감추어졌던 케프렌 가문의 비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네. 수개월 전, 제 언니는 가문 내에서 갑작스레 실종되셨고, 가문 내의 어르신들은 언니의 실종을 일제히 함구하셨죠.”

“계속 말해.”

“어르신들이 입을 닫고 있는 상황에서 제가 가문 내에서 정보를 얻는 건 한계가 있었어요. 전 자연스레 외부에 눈을 돌렸고 정보 길드 등을 동원해 언니의 신상을 추적해 갔죠.”

그 말에 네르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짙은 안개 속에서 물건을 찾는 거나 다름없군. 완전히 제로부터 시작하는 작업이잖아?”

“네……. 그렇게 계속 삽을 푸던 와중에… 믿을 수 있는 분께서 저를 이곳 그렌 타운으로 가라고 하셨어요. 그러면 언니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그렌 타운은 중립 무법 지대.

아무리 기사 가문이라도 소녀 하나가 이런 곳에 있다고 한다면 당연히 노예라는 단어로 귀결되기 마련이었다.

네르하는 그 ‘믿을 수 있는 분’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단서를 얻기 위해 노예 장부가 필요하단 말이군. 네 언니의 이름을 찾기 위해서.”

“네. 맞습니다.”

“그 언니의 이름은 뭐지?”

여기까지 오고 나서야 아녜스의 말문이 다시 닫혔다.

하지만 그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아녜스의 입에서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친언니이자 가문에서 큰 기대를 받던 유망주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루시엘라 엘 케프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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