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시장을 붙잡아라! (3)>
달그닥! 달그닥!
세 대의 마차가 빠른 속도로 도로변을 질주한다.
네르하를 비롯한 라데우스의 마법사들과 케프렌의 기사들은 마음을 먹자마자 그대로 시장 관저로 돌진했다.
“시장은 아주 조심스러운 성격입니다. 지난 십여 년간 온갖 배신을 당하고도 권력을 유지하고 있을 만큼 온갖 방비를 다 해놓았죠.”
특히 정보와 무력, 이 두 분야에선 시장은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니 정면으로 쳐들어간다고 해도 자경단을 제압할 동안 시장은 충분히 몸을 빼낼 겁니다.”
“그리고 도시 곳곳에 박아 놓은 끄나풀들로 우리를 귀찮게 하겠지.”
쿨리크의 말에 네르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 맞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퇴로로 만든 비밀 통로를 통해 시장의 집무실까지 일직선으로 가야 합니다.”
“다 좋은데 말이야.”
엘림이 눈을 날카롭게 빛내면서 쿨리크를 노려보았다.
“네놈들이 이렇게 쉽게 배신할 수 있는데도 시장이 아무런 목줄도 없이 놔뒀을 것 같진 않은데?”
엘림의 말엔 일리가 있었다.
만약 이게 함정이라면 네르하를 비롯한 일행들은 범의 소굴에 자처해서 들어가는 셈이니까.
하지만 쿨리크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간단하다고?”
“저희 보스가 뱀파이어이기 때문이죠…….”
“……!”
“그리고 시장은 흑마법사와 손을 잡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목줄이 채인 셈입니다.”
“그렇군.”
엘림은 대번에 이해했다.
뱀파이어는 음 차원의 마나를 다루는 종족.
마기와는 성질이 다르긴 하지만 뱀파이어 같은 어둠의 종족은 의외로 마기에 상당히 취약한 면이 있었다.
세이라 정도의 뱀파이어는 두칸이 직접 나설 필요도 없이 그의 제자 한 명과 눈만 마주쳐도 대번에 제압될 것이다.
“네르하 님께서는 본인의 힘으로 그런 제약을 벗게 해 주겠다고도 약속하셨습니다.”
“으음, 분명 본가의 힘이라면 충분히 가능하긴 한데…….”
엘림은 살짝 혀를 차며 네르하를 흘겼다.
‘3부인의 힘이라면 못 할 것도 없지.’
다만 지금까지 봐 온 네르하의 재능이라면 이런 정치에 몰두하지 말고 경지를 올리는 데 집중했으면 했다.
‘그것 때문에 임무에 이리 도움을 받았으니 내가 딱히 할 말이 없긴 하군.’
오히려 일개 생도가 미션에 이렇게까지 도움이 된 적은 거의 없었다.
지금까지 리브라의 생도들은 어디까지나 참관 수준에 불과했고 잡일 외엔 맡은 적이 거의 없었으니까.
‘본분을 저버리지 않고 두 가지 토끼를 모두 잡는 건 단순히 재능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정말 제왕으로서 타고나지 않은 이상에야.’
이전, 자신의 동기였던 바멜 라데우스도 이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
엘림이 네르하를 보며 깊게 생각에 잠겨 있던 사이.
웅성웅성!
갑자기 바깥에서 소란이 커지기 시작하자 엘림은 정신을 차렸다.
“무슨 일이지?”
“대장, 아무래도 일이 틀어진 듯합니다!”
“뭐?”
“직접 나와서 보시는 게 빠릅니다.”
부하의 다급한 말에 엘림과 다른 이들은 창문을 열고 바깥 상황을 관찰했다.
그리고 경악했다.
“언데드!”
“으아아악! 살려 줘!”
“도망가! 잡히면 끝이야!”
시장 관저 근처에 갈수록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지고 있다.
엘림은 그 원인이 바로 거리에 무분별하게 나타난 언데드 때문임을 눈으로 보았다.
“……이런!”
일행은 마차를 멈추고 상황을 살폈다.
구울, 가고일, 스켈레톤 솔져 등 보편적으로 흑마법 하면 생각나는 소환수들이 무려 수백 개체 이상 나타나 거리를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개판이군.”
당연히 일반 시민들이 저런 소환수들에 대항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마차에서 내린 아녜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숫자가 많군요.”
“이런 도시이니만큼 시체를 확보하기 편할 테니까. 그래도 저건 좀 너무하는군.”
이미 수십 단위의 희생자가 나온 상황이었다.
도시의 자경단과 뒷골목 암흑가 패거리로 보이는 몇몇 이들이 병장기를 들고 저항하고 있었지만 죽은 자가 왜 죽은 자이겠는가.
골통을 부수고 관절을 박살 내도 주변의 잔해를 흡수해 다시금 모습을 원래대로 복구하고 있다.
“막아! 절대로 관저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
“하, 하지만 놈들이 죽지 않습니다! 이대로라면…….”
“야! 너희들, 어딜 도망가!”
그나마 훈련된 자경단들은 잘 버티고 있는 편이었지만 시장의 끄나풀들이었다가 동원된 암흑가 왈패들은 전황이 불리하자 망설임 없이 도망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곧 뚫리겠군.’
네르하의 판단대로라면 앞으로 10분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아무래도 흑마법사 놈들이 선수를 친 것 같군.”
“으음!”
“놈들도 우리처럼 시장을 노리는 것 같다.”
“설마, 그사이에 놈들의 실험이 완성된 걸까요?”
엘림의 부하 마법사 하나가 불길한 의견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 말이 튀어나오자마자 주변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온전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상급 마족은 개개인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이라고 하던데…….”
라데우스의 정예부대인 아크의 일원이라고 하지만 그들 역시 문헌으로만 읽었을 뿐 마족과 정면으로 충돌해 본 적은 없다.
‘이곳을 버리고 후퇴해야 하는가.’
엘림이 막 이런 생각으로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였다.
“실험이 성공한 건 아닐 겁니다.”
네르하의 입에서 단호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째서 그렇게 확신하지?”
“실험에 성공했으면 굳이 시장 관저를 노릴 필요가 없으니까요.”
“아!”
그 말뜻을 이해한 엘림이 탄성을 내질렀다.
네르하가 말을 이었다.
“작위를 받은 상급 마족들의 경우, 마계에 있는 자신의 영지를 재현하는 ‘영역’이라는 특수한 힘을 쓸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이 맞다. 만약 마족이 온전히 강림했다면 굳이 이런 귀찮은 짓을 하지 않고 이곳에 영역을 전개했겠지. 내가 그 사실을 잊고 있었군.”
엘림은 조급해진 탓에 좁아져 버린 자신의 시야를 자책했다.
그리고 네르하의 냉철한 분석에 감탄했다.
‘역시 이놈은…….’
엘림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네르하를 바라보고 있을 때, 네르하는 별다른 반응 없이 냉정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놈들이 선수를 친 것은 사실이니 빠르게 돌파해서 시장을 확보해야 합니다. 만약 놈이 흑마법사들의 손에 넘어가면…….”
“도시의 제어권이 흑마법사 놈들에게 넘어가겠지.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쿨리크, 지도를 가져와!”
“예. 네르하 님.”
쿨리크가 시장 관저의 비밀 통로가 그려진 지도를 가지고 왔다.
네르하는 그 지도를 활짝 펴며 고민했다.
“이미 상황이 늦었다면 어쩔 수 없지만 만약 그자가 낌새를 눈치채고 탈출했다면 일이 복잡해집니다.”
흑마법사들이 뒤통수를 친 시점에서 시장이 기댈 곳은 그리 많지 않다.
그중 가장 든든한 곳을 찾는다면.
“우리겠지, 시장이 기댈 수 있는 곳은.”
그 말에 옆에서 지켜보던 아녜스가 입술을 비죽였다.
“라데우스요? 그럼 우리는요?”
“……너희는 시장이 운영하는 암시장을 대놓고 박살 냈잖냐? 당연히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지.”
“앗.”
그 암시장의 장부를 우리가 회수했다는 증거는 남기지 않았으니 아마 모든 혐의는 아녜스와 저 기사들이 뒤집어썼을 터.
‘만약 놈이 우리와 합류할 수 있는 최적의 루트를 꼽는다면?’
네르하의 손가락이 지도의 어느 부분에 닿았다.
“이곳입니다. 이곳으로 가죠.”
시장이 만든 비상 탈출구 중에서도 라데우스의 임시 거주지가 된 여관에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지하 수로.
시장이라면 분명 이쪽으로 탈출했을 것이다.
“좋아. 네 판단을 믿겠다.”
엘림은 일행들을 다시 마차에 태우고는 소리쳤다.
“강제 돌파한다! 준비해라!”
아무리 언데드들이 길을 막고 있어도 그걸 치워 버리면 그만.
아크의 마법사들에겐 충분히 그럴 만한 역량이 있었다.
* * *
“헉! 헉! 조금만 더 힘내라!”
네르하의 예상대로 시장 켈릭스는 지하 수로를 통해 탈출을 시도하고 있었다.
“우리가 살길은 라데우스뿐이야. 놈들과 접촉해야만 우리가 살 수 있어!”
시장의 주위엔 십여 명 정도 남은 자경단이 그를 지키고 있었다.
원래는 거의 50에 달했지만, 탈출 중에 두칸의 제자들에게 추격을 받아 그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 이 정도 소란이 있었으면 라데우스의 마법사들도 상황을 눈치챘을 거다. 힘들어도 조금만 더 버텨라!”
사실, 지금 상황에서 체력이 달리는 건 오로지 시장뿐이었지만 충성스런 호위들은 굳이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거, 거의 다 왔다! 출구다!”
지하 수로를 통한 비밀 탈출로는 시장 관저에서 꽤나 떨어진 곳까지 뚫어 놓았다.
아무리 흑마법사라고 해도 여기까지 도달하지는 못할 터!
그런 희망을 가지고 막 빛이 스며드는 입구까지 도착했을 때.
“클클, 고생이 많구려, 시장.”
“흐에에에엑!”
탈출구의 입구에는 이곳, 그렌 타운에서 암약하는 판데모니움의 장로 ‘두칸’이 직접 시장을 맞이하고 있었다.
시장은 그대로 다시 엉덩방아를 찧으며 눈을 부릅떴다.
“어, 어떻게?”
두칸은 그런 시장의 반응에 흡족해했다.
“그대의 비서를 보면 당연한 것 아니겠소? 그대 주변은 이미 내 노예들로 가득 차 있다오.”
“끅!”
“끄르륵!”
“흐억!”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호위 중 몇이 게거품을 물며 그대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마치 비서 고바와 비슷한 증상이었다.
두칸은 썩은 웃음을 지으며 시장을 향해 이죽거렸다.
“설마, 지금까지 당신을 내버려 뒀다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셨소?”
“허, 허헉!”
“그 괴물 같은 자가 조언자랍시고 있어서 지금까지 내버려 두었을 뿐, 당신 하나 어떻게 하는 건 일도 아니라오.”
마음만 먹으면 그렌 타운의 흑마법사들을 뿌리 뽑는 게 가능했던, 두칸조차 두려워하는 대마법사 시저 루드벡.
그가 아니었다면 두칸은 오래전에 죽음의 마신 하그레온의 곁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처음의 조언대로 얌전히 있었다면 나름 편하게 대우하려고 했는데…… 날 이렇게 움직이게 한 이상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외다.”
두칸은 눈을 희번득 뜨며 살벌하게 일갈했다.
“고통 없이 갈 생각은 집어치우는 게 좋을 거다.”
“자, 잠깐!”
시장이 손을 내저으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이, 일을 이렇게 벌려 놓고 날 세뇌한다고 해서 뭘 어떻게 한단 말이오? 분명 통제가 안 될 게 분명하거늘!”
“오, 예리하군. 확실히 그 말은 맞지.”
대놓고 시장 관저에 언데드가 대량으로 출현한 데다 시장의 무력인 자경단 상당수가 희생되거나 희생되는 중이다.
그렇게 되면 사실상 도시의 제어권은 사라지게 되는 셈이었다.
“하지만 딱히 상관없소. 말을 안 들으면 듣게 하면 그만이고, 무엇보다 시장의 권한이 필요한 건 단 한 번뿐이거든.”
“……?!”
“이제 귀찮게 노예를 구입해 가며 일을 진행할 필요가 없어졌단 말이지. 그냥 모아 놓고 한 번에 제물로 바치면 그만이니까.”
“무, 무슨!”
시장은 두칸이 무슨 말을 하는지 대번에 이해했다.
“라, 라데우스에서 당신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크흐흐, 그 라데우스가 오기 전에 당신 목숨 걱정이나 하는 게 좋을 텐데?”
“그건 그렇게 걱정할 필요가 없지.”
“……!”
저 멀리서 들려온 젊은 목소리에 두칸의 고개가 홱 하고 돌아갔다.
“역시 이곳에 있었군. 늦지 않아 다행이야.”
두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네르하를 비롯해 엘림과 아녜스를 포함한 여섯 명의 인원이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