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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69화 (69/237)

69화

<마족 크루갈 (1)>

“안색이 별로 좋지 못해 보이는군.”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요! 헤헤헤…….”

켈릭스는 대번에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네르하의 눈앞에 무릎을 꿇었다.

원래 라데우스의 견습 마법사… 정도로 알고 있던 갈색 머리의 청년이 사실은 직계이자 후계 계승 권한을 가진 네르하 라데우스였을 줄이야!

네르하가 두칸의 앞에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면 아마 영영 알지 못했을 거다.

“호, 호위도 없이 이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일이라면 명령하신 대로 철저히! 확실하게! 처리하고 있습니다요!”

“아, 별건 아니고 말이야.”

네르하는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켈릭스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이번 일이 끝나면 경과에 상관없이 시장의 입지가 많이 위험해질 거라 생각하는데 말이야.”

움찔!

켈릭스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지금 시장은 목을 간수하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정도라고 추측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제, 제게 원하시는 게 무엇입니까?”

역시 켈릭스는 눈치가 좋았다.

네르하는 웃는 낯짝 그대로 켈릭스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자네도 슬슬 줄을 잡아야지? 언제까지 라데우스와 케프렌이 박쥐를 가만히 둘 거라 생각하지?”

“그, 그게…….”

“지금까지야 자네가 처신을 잘했기에 별문제가 없었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좀 다르지 않을까?”

주르륵!

켈릭스는 식은땀을 흘렸다.

‘무, 무슨 압박감이!’

20살도 안 된 꼬꼬마라고 보기엔 너무나 강대한 존재감이었다.

마치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노괴 그래. 가끔씩 툭툭 나타나 자신에게 정보를 주고 사라지던 이름 모를 근육질의 노마법사가 생각나는 존재감이다.

하지만 그런 네르하의 압박에도 시장은 손쉽게 답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네르하는 그런 시장을 이해한다는 듯 어깨를 툭툭 치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 평생을 쥐어 온 권력과 재물을 그리 쉽게 손에서 놓진 못하겠지. 그걸 안고 익사하더라도 말이야.”

“…….”

“난 자네가 지금의 생활을 계속 영위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그 말을 듣는 순간, 켈릭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네르하는 자애로운 미소로 켈릭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래. 라데우스 가문이 개입하는 것은 물론, 케프렌 쪽이 자네에게 수작을 부리지 못하도록 막아 줄 수도 있지.”

만약 이 말을 엘림이 했다면 시장은 끝까지 의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제안의 당사자는 다름 아닌 네르하 ‘라데우스’.

그 무엇보다도 신뢰감이 폭증하는 안전 보증수표나 다름없었다.

“그, 그럼 그 대가는…….”

“당연히 자네가 내 밑으로 들어오는 거지.”

“……설마.”

‘라데우스’가 아닌 ‘네르하’.

네르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켈릭스의 추측에 확신을 심어주었다.

“그래. 난 나만의 세력이 필요하다.”

* * *

켈릭스는 살짝 당황한 어조로 말했다.

“과, 과감하시군요. 이런 때에 세력 확장이라니.”

“비난하는 건가?”

“그, 그건 아닙니다!”

네르하는 선인이 아니다.

엘림이 쓰러지고 미션이 실패를 목전에 둔 이 상황이지만 만약 자신의 안위와 입지에 타격이 가지 않는다면 딱히 실패해도 상관은 없었다.

물론 최소한의 책임감은 있다.

조언자이자 작전의 입안자로서 상황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것은 자존심 문제였다.

‘그리고 세력과는 별개로 이놈에게 목줄을 채워 놔야 하는 건 맞지.’

네르하는 고개를 조아린 켈릭스를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네가 내 후계 경쟁에 끼어들 것까진 바라지 않아. 다만 가문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외부의 세력이 좀 필요해서 말이지.”

“그, 그러시군요!”

켈릭스 역시 지금까지 두 가문 사이에서 줄을 타온 만큼 라데우스의 후계 구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대충 알고 있다.

‘이, 일단은 따르는 척이라도 해서 위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썩은 동아줄이라도 동아줄은 맞으니까.’

그 이후에 네르하에게서 벗어나는 건 그때 가서 생각할 문제다.

생각을 정리한 켈릭스는 재빨리 네르하의 앞에 바짝 엎드렸다.

“추,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패권을 얻으실 그날까지 도련님의 손과 발이 되어 그렌 타운의 모든 것을 동원해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마음에 드는 대답이야.”

“당연한 말씀입니다!”

“그럼 어느 정도 충성에 대한 서약을 받아내도 괜찮을 것 같군.”

“……네?”

그 순간, 켈릭스는 뭔가 일이 잘못된 것을 직감했다.

네르하는 천천히 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들어와, 세이라.”

“네. 네르하 주인님.”

그리고 그 문이 열리며 붉은 머리의 뱀파이어 소녀가 다소곳한 모습으로 장내에 나타났다.

켈릭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

“세, 세이라! 네가 여긴 어떻게!”

“…….”

세이라의 눈동자는 네르하와 다를 바가 없었다.

즉, 시장에게 그다지 호의적인 눈빛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나로서는 이번 일이 끝나면 한동안 이곳에 신경을 쓰지 못할 것 같거든. 그러니 세이라와 ‘권속 계약’을 맺어 줘야겠어.”

“아, 안 돼!”

자신이 수족처럼 부리고 온갖 협박을 서슴지 않았던 부하였는데, 이제 거꾸로 피의 맹약으로 이어진 권속이 된다?

그건 차라리 죽는 것 이상으로 괴로운 앞날이 기다리고 있는 것과 같았다.

“무, 무효! 차라리 이 도시를 떠나겠소! 그러니 제발!”

“늦었어.”

네르하는 그대로 켈릭스의 혈도를 짚어 움직임을 제한시켰다.

“너 같은 인종은 잘 알지. 먹고 튀는 걸 아주 당연하게 여기는 종자들. 그러니 이 정도의 보험 정도는 들어줘야 안심할 수 있지.”

“억! 끄어억!”

“거절은 거절하지.”

권속 계약은 보통, 쌍방의 동의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원래라면 켈릭스는 죽어도 동의하지 않겠지만 네르하에겐 그의 마음을 꺾을 수 있는 수단이 아주 많이 존재했다.

“흑, 흐억, 크흑흑흑!”

약간의 대화와 설득(?)을 거쳐 결국 켈릭스는 세이라의 지배 아래 속박된 뱀파이어의 권속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권속 계약이 모두 완료되자 세이라가 들뜬 웃음을 터트렸다.

“후, 후후, 후후후후!”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냐?”

“지금까지 절 끝없이 괴롭히고 등골을 뽑아 먹은 장본인이 이런 꼴이 되면 당연한 거 아닐까요?”

“어쨌든 약속은 약속이니 너무 괴롭히지 마라. 넌 어디까지나 이놈이 다른 마음을 먹었을 때를 위한 보험이니까.”

“물론이죠! 당연히 그래야죠!”

“…….”

이 녀석을 믿어도 될까?

순간, 켈릭스에 대한 신용도보다 세이라에 대한 신용이 낮아지는 듯한 이 느낌이 착각이길 빈다.

* * *

“배, 뱀파이어의 권속이라. 많이 잔인한 짓을 했네…….”

순혈 뱀파이어도 아니고 권속이면 꾸준히 인간의 피를 빨아야만 했다.

그리고 일반적인 설화에 나오는 것처럼 낮에는 활동이 극히 제한되고 만다.

“자업자득이죠. 대략적으로라도 암시장의 모습을 보셨잖습니까?”

“그렇긴 하지.”

세이라라면 베리타스에서 사업장을 열어도 알아서 켈릭스와 그렌 타운을 제어할 것이다. 어느 정도의 방향성은 지시해 주었으니까.

“뭐가 되었든 지금은 들어가야 할 타이밍입니다. 설사 때가 늦어 마족이 부활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아예 손을 놓고 있으면 그나마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골든 타임을 놓치게 됩니다.”

“…….”

마하타의 표정에 깊은 갈등이 일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결심한 듯 확고한 눈빛으로 네르하에게 충격적인 선언을 날렸다.

“네르하.”

“네. 선배님.”

“지휘권을 네가 맡아 줘.”

“……네?”

“……?!”

네르하만이 아니라 근처에 있던 페텔과 헤젤마저도 크게 놀라며 눈을 부릅떴다.

이는 사실상 네르하의 조언을 받아들인 것을 넘어 네르하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마하타가 말을 이었다.

“솔직히, 난 자신이 없어. 후방 지원에만 줄곧 빠져 있었을 뿐 지휘를 해 본 경험도 없으니까. 하지만 너라면 왠지 잘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믿기진 않지만, 네겐 정말 노련한 노장의 느낌이 나거든.”

“하지만.”

“에리얼은 내가 설득할게. 너라면 에리얼도 납득할 거야.”

에리얼은 이번에 투입된 마법사 중 유일한 비전투원이었다.

그녀는 지금, 엘림과 다른 마법사들의 회복을 전담하고 있어 자리를 비운 상황이었다.

“걱정 마. 만약 일이 잘못되면 내가 책임을 지면 그만이니까.”

마하타는 배시시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네르하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말하시면 제가 실패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 * *

바로 흑마법사의 본진에 돌입하겠다는 결정은 아녜스를 비롯한 케프렌의 기사들에게도 전해졌다.

“좋은 선택입니다. 이런 일은 시간을 끌수록 불리해지는 법이죠.”

“네 휘하 기사들이 불평하진 않던가? 너희에겐 별다른 이득도 없을 텐데 말이야.”

“아뇨. 오히려 반대입니다.”

“응?”

아녜스는 양 검지를 살짝 꼼지락거리며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 오히려 라데우스의 마법사들이 무력화된 틈을 타 이쪽이 공을 독식하자는 의견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

“아무리 정식 임무가 아니라 해도 이 정도 건수라면 저희 쪽 본가에서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일이거든요…….”

“뭐, 의욕이 넘친다는 건 좋은 일이군.”

그래도 이쪽의 협조 없이는 헛발질만 하다가 끝날 텐데 잘도 그런 소리가 나오고 있구만?

아녜스도 그 사실을 알기에 저렇게 부끄러운 표정으로 이쪽을 대하고 있는 거겠지.

“의욕이 앞서는 건 좋지만 괜히 나대다가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건 곤란해.”

“무, 물론 그 정도 사리 분별은 하는 분들입니다.”

아녜스가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작게 말을 이었다.

“아, 아마도…….”

“왜 말소리가 계속 작아지는 거지?”

아녜스는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였다.

분위기가 점점 이상해지자 네르하는 살짝 인상을 쓰며 생각에 잠겼다.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는가 보군.’

아무래도 정식 임무가 아니다 보니 상하 관계와 지휘 계통이 확실하지 않을 것이다.

저들 기사들 입장에선 어디까지나 자의적, 혹은 개인적인 부탁 등으로 아녜스와 동행한 것일 테니 말이다.

‘아무래도 이 부분에 대해선 대책이 필요하겠어.’

괜히 협력자인 기사들에게 엄포를 놓았다간 역효과만 날 테고, 지금에 와서 실력 행사로 기를 죽이기에도 시간이 좀 늦는다.

‘후우, 일단은 적당한 선에서 비위를 맞춰 주며 제어해야겠군.’

어느 정도 선에선 공을 나눌 수도 있고 협조할 수도 있다.

다만 괜히 알지도 못하면서 나대다가 모든 걸 수포로 만드는 것은 사절이었다.

‘아, 이래서 마법도 모르는 무식한 놈들과는 상종하지 말라고 했던 것이 이런 이유에서였나?’

본질이 무인인 네르하로선 정말 알기 싫은 공감대였지만 ‘네르하’가 어릴 적 받았던 가르침에 더해 리브라에서의 기억까지 겹쳐지자 뭔가 기분이 참 묘했다.

* * *

“크아아아악!”

“괘, 괜찮으십니까, 스승님!”

“빌어먹을, 빌어먹을 라데우스의 종자!”

두칸은 자신이 있었다.

만약을 대비해 준비도 나름 충실히 했고, 전략도 충분히 합리적이었다.

다만 방심.

완전한 성공을 목전에 두고 애송이 하나를 눈앞에 두고 너무 치명적인 방심을 해 버렸다.

그리고 그 결과는, 계획은커녕 당장 목숨을 걱정해야 할 정도의 치명상이었다.

“회복 캡슐을 가동시켰습니다. 약식이지만 육체의 회복에 도움이 될 겁니다.”

두칸이 수십 년을 공들여 키운 수제자 달렉이 두칸을 부축하며 말했다.

―후후, 일이 잘 풀리지 않았나 보군.

막 두칸이 제자의 준비성을 치하하려던 찰나, 저 멀리서 두칸의 귀를 거스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루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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