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마족 크루갈 (4)>
저벅! 저벅!
캡슐 안에서 마치 양수가 터지는 것처럼 검붉은 무언가가 흘러나오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관자놀이에 산양의 뿔이 달린 근육질의 남성이 천천히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
그의 발걸음이 내는 젖은 바닥에서의 질척거리는 소리를 제외하면 장내는 소름 끼칠 정도로 조용했다.
장내의 분위기를 제압한 마족은 근엄한 표정으로 두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에휴, 조금은 불만이야, 두칸.”
“응?”
한순간 아녜스가 멍청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묵직한 덩치, 무게감 있는 얼굴.
하지만 의외로 입에서 나온 말투는 한없이 가볍다.
“처음 예상했던 힘엔 미치지 못하는군. 기껏해야 예상치의 60퍼센트 정도일까? 전력으로 따지면 말할 것도 없고. 역시 마무리를 너무 성급하게 진행했어.”
두칸은 이를 악물며 변명했다.
“어쩔 수 없었다. 저놈들에게 대계 자체가 무산되는 것은 피해야 했으니까.”
“뭐, 그래.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네? 인정, 인정.”
마족은 고개를 털며 환하게 웃었다.
겉으로만 보면 딱히 적의도 없고, 마냥 헤프게 웃는 바보처럼 보인다.
하지만 네르하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저 분위기는 절대로 오래가지 않을 거라고.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물론이지. 무려 500년 만에 중간계 외출인데.”
마족은 네르하를 향해 살짝 어깨를 으쓱거렸다.
“잠깐 기다려 주겠나? 약속을 이행해야 해서 말이야.”
“약속이라고?”
“장담하건대 너희들에게도 딱히 해로운 일은 아닐 거야.”
그 말을 끝으로 마족은 갑자기 신형을 돌려 두칸에게 다가갔다.
저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모르겠지만 네르하는 살짝 손을 들어 진형을 형성하라고 신호를 주었다.
끄덕!
아녜스가 네르하의 손짓을 알아보곤 말없이 기사들에게 손짓하며 천천히 저 마족을 상대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약속을 이행할 시간이다, 두칸.”
“…….”
“약속대로 너희를 속박하고 있는 영혼의 구속을 모두 풀어 주도록 하지.”
씨익!
마족의 양 입 끝이 기괴할 정도로 기다란 초승달을 그리며 올라갔다.
그 불길한 미소를 본 두칸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마족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기 시작했다.
“너, 너……!”
“물론 마군단의 참모로 추천하겠다는 약속도 이행할 거야. 다만.”
마족이 상체를 숙이며 두칸과 가까이에서 시선을 마주했다.
“네가 나와의 링크가 끊기고도 살아 있다면 말이지.”
“이, 이노오오오옴! 크루가아아아알!”
두칸은 그 분노를 끝까지 토해 내지 못했다.
푸아아악!
순식간에 칠공에서 피가 터져 나오며 두칸의 늙은 육체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잔인하군.’
한때 신안에 이르렀던 네르하의 ‘눈’은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알아차렸다.
저 마족과 두칸 사이에 이어졌던 어떤 얇은 ‘끈’이 마족의 의지로 인해 강제로 끊어져 버린 것이다.
“커헉! 컥! 끄르르륵!”
두칸은 자신의 목을 조르며 괴로워하더니 이윽고 전신에서 모든 기력이 빠져나간 듯 축 늘어지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그 말을 끝으로, 두칸은 절명했다.
그리고 크루갈이라 불린 마족은 콧노래를 부르며 두칸의 시체를 향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음음, 약속은 지켰어. 약속은.”
두칸과 크루갈 사이에 맺은 가장 첫 번째 약속은 저당 잡힌 영혼을 아무런 수작 없이 온전한 상태로 해방시키는 것.
“뭐, 육체가 손상된 건 어디까지나 본인 책임이니까. 하하하!”
두 번째 약속인 마군단의 추천이나, 세 번째 약속인 판데모니움에 힘을 실어 주겠다는 약속은 어디까지나 두칸이 살아 있을 때 지킬 수 있는 약속이었다.
첫 번째 약속은 확실하게 지켰고,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자연히 무효화되었으니.
“이 이후에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계약상 아무런 하자가 없단 말씀이지.”
홱!
크루갈은 그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네르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래 기다렸지?”
네르하는 가라앉은 눈으로 크루갈과 눈을 마주했다.
“너희에겐 감사하고 있어. 원래라면 좀 복잡하게 일을 진행시켜서 계약을 우회하려고 했는데 너희 덕분에 이렇게 손쉽게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으니 말이야.”
“그렇게 고마우면 우리를 살려 줄 건가?”
“자, 잠깐! 지금, 무슨 소리를……!”
네르하의 약한 발언에 뒤에 있던 아녜스가 기함하며 소리쳤다.
“으음, 어떻게 할까?”
크루갈은 턱을 부여잡고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고민하는 ‘척’을 했다.
그리고 몇 초도 지나지 않아 활짝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그건 힘들겠지? 그래도 걱정 말라고. 고통 없이 편하게 보내주는 것 정도는 가능하니까.”
“그럴 줄 알았지.”
아까 전, 달렉을 기습한 것처럼 네르하가 번개같이 크루갈에게 접근해 그대로 주먹을 날렸다.
콰과과광!
두칸의 어깻죽지를 갈라 버린 블레이즈 피스트가 그대로 크루갈의 심장을 향해 나아갔다.
“너무하는군.”
하지만 크루갈은 당황하기는커녕 웃는 낯 그대로 양팔을 교차해 네르하의 일격을 막아내었다.
촤아아아악!
대지가 길게 파이는 소리와 함께 크루갈의 육체가 뒤로 쭉 밀려났다.
양팔에서 흘러나오는 연기를 털어내며 크루갈이 네르하를 향해 살짝 놀라워하며 말했다.
“제법 아픈데? 보통 인간 어린이들은 강해 봤자 벌레 수준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조가 좀 이상하군. 누구보고 어린이라는 거냐?”
“어린이 맞잖냐? 한 백 년은 살았나?”
문헌상에서도 마족들은 최소 수천, 수만 년은 기본으로 살아온 놈들이니 저런 사고방식인 것도 이상할 건 없다.
스스슥!
멀리 밀려난 크루갈을 둘러싸며 케프렌의 기사들이 크루갈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네르하는 순간, 고민했다.
‘위험해.’
분명 권기가 섞인 일격이었다.
그런데 그 일격을 별다른 방어막 없이 단순히 육체만으로 막아냈다는 건 큰 문제였다.
‘육체 자체에 마나가 넘치거나, 아니면 외공이 극한에 이르렀거나.’
어느 쪽이든 결코 호재는 아니었다.
“나들이의 첫 상대치고는 괜찮은 상대로군.”
전원, 마나 소드를 사용할 수 있는 일류 이상급 기사들이었지만 크루갈에겐 그다지 큰 감흥이 없는 모양이었다.
크루갈의 시선이 네르하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쪽수만 많은 이놈들보단 어린이, 네가 더 끌리는데 말이야.”
“어린이가 아니다.”
“그럼 뭐라고 부를까?”
“네르하 라데우스.”
꿈틀!
‘라데우스’라는 말이 튀어나온 순간부터 마족은 물론 기사들까지 한순간 급격한 동요가 흘러나왔다.
크루갈은 진심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케프렌이 아니라?”
“이세계의 마족 주제에 그런 이름은 알고 있군.”
“아니, 뭐, 그놈들은 우리 마계 귀족들 사이에서도 유명하니까. 그나저나 신기한걸. 난 분명 네가 케프렌의 직계 혈통인줄 알았는데.”
“직계 혈통은 나야! 그 사람이 아니라!”
자존심이 상했는지 포위진을 형성하던 아녜스가 얼굴을 붉히며 빽 소리쳤다.
그 말을 들은 크루갈은 뭔가 멋쩍다는 듯 검지로 살짝 뺨을 긁었다.
“마족이 실수할 수도 있지 뭘 그러냐?”
“사악한 자여! 지상에 다시 얼마나 많은 피를 뿌리려고 아득바득 기어 왔느냐! 다시 네놈들의 요람으로 돌아가라!”
대가문의 고귀한 피를 이은 자답게 아녜스는 꽤나 고풍스러운 말투를 쓰며 크루갈에게 일갈했다.
그에 본색을 드러내든 분노를 하든 무언가 격한 반응을 보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크루갈에게서 나온 반응은 영 딴판이었다.
“뭔가 좀 억울한데.”
“……뭐?”
“물론 피를 뿌리고 싶어서 온 건 맞지.”
“그런데?”
“그 ‘다시’라는 말이 좀 거슬려서 말이야.”
크루갈은 뭔가 못마땅하다는 듯 팔짱을 끼며 아녜스를 노려보았다.
“500년 전, 그 빌어먹을 괴물에게 당해 역소환된 경험은 아직도 내 마음속에 트라우마로 남아 있거든?”
“그게 무슨 소리냐.”
“그때 처음 알았지. 마족과 계약하지도 않은 인간이 마기를 마족 이상으로 다루는 게 가능하다는 걸.”
“……!”
“별로 놀지도 못했고 말이야. 그때 그놈에게 개 맞듯이 맞고 마계로 쫓겨난 기억이 되살아나고 있잖아.”
고오오오!
지금껏 가벼운 태도로 일관했던 크루갈의 전신에서 심상치 않은 기세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거 어떻게 책임질 거야?”
슥!
마치 잔상이 생기듯 움직이며 크루갈이 처음 말을 꺼낸 아녜스에게로 향했다.
“당연히 너희들 목숨으로 책임져 줄 거지?”
기사들의 중심인 아녜스가 공격받을 위기에 처하자 대번에 다른 기사들이 원진을 풀고 아녜스를 보호하기 시작했다.
“무투파 마족이다!”
“권능형이 아니야!”
“막아라!”
“피해, 이 멍청이들아!”
크루갈의 잠재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한 네르하가 소리를 빽 내질렀지만…… 이미 상황은 늦은 뒤였다.
퍼어억!
크루갈이 가볍게 내지른 주먹질에 아녜스의 앞을 가로막은 고드반의 머리가 그대로 터져나갔다.
뇌수가 허공에 휘날리며 비현실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고, 고드반 경!”
“젠장!”
고드반은 일행 중 몇 안 되는 오러를 꺼낼 수 있는 실력자였다.
그런 실력자가 단 일수에 머리통이 날아갔다는 건.
“마하타 님!”
“으, 으응!”
“당장 페텔과 헤젤 선배를 데리고 도망가세요!”
“뭐, 뭐?!”
“지금 상태로는 도움이 되지 않으니 짐이 되기 싫다면 당장 빠지라고!”
네르하는 다급하게 외쳤다.
무투파 마족.
기록에서 읽어 본 기억이 있다.
일반적인 마족들이 펼치는 ‘영역’을 사용하지 못하는 대신 동급 대비 전투능력 자체는 배 이상은 강력하다는 별종.
당연히 지금 상황에선 최악의 상대다.
‘놈의 몸 상태로 보면 어지간한 마법은 통하지 않을 게 분명하다.’
페텔과 헤젤은 영창조차 못 하고 순삭당할 게 분명하고, 그나마 마하타의 정신계 마법이 변수였으나 지금 전력으로는 그녀가 제대로 마법을 펼칠 때까지 보호할 수 없다.
“이이익!”
오러를 뽑아낸 아녜스가 주변 기사들의 도움으로 그나마 버티고 있지만 거의 2분에 한 명씩 사망자가 발생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전멸하겠군.’
다른 일행들을 내보낸 네르하는 빠르게 놈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막 아녜스의 머리를 향해 주먹을 날리려던 놈의 옆구리를 걷어차 버렸다.
퍼엉!
역시나 놈의 육체는 별다른 타격 없이 밀려났을 뿐이었다.
옆구리를 털어내며 크루갈이 네르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흠, 도망가지 않았군.”
“만약 도망갔으면?”
“다 무시하고 네놈을 잡아 죽이러 갔겠지?”
여유를 부리는 크루갈을 마주하며 아녜스가 네르하의 옆으로 다가왔다.
“네르하 님.”
“생존자는?”
“다섯 명입니다.”
돌입한 기사 아홉 중 고드반을 포함해 넷이 순식간에 당해 버리고 말았다.
크루갈을 직시한 채로 네르하는 살짝 한숨을 쉬며 말했다.
“조금 더 신중할 걸 그랬나?”
하지만 아녜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저 마족의 말마따나 시간이 더 있었다면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사태가 커졌을 겁니다. 오히려 당신의 전략은 시의적절했어요.”
“…….”
“어차피 희생 없이 공을 세운다는 자만은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상황이 아직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니고요.”
화륵!
아녜스의 검에서 정령된 오러가 아닌 검염(劍炎)이 터져 나왔다.
저건 분명 아녜스의 마나가 아닌, 검이 가진 자체의 힘이었다.
“호오, 성검(聖劍)인가?”
크루갈이 재밌다는 듯 아녜스의 검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가진 비장의 수를 꺼낸 아녜스가 결사의 의지로 자세를 잡았다.
“이 자리에서 저 마족을 죽이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강력한 파사(破邪)의 힘이 느껴지는 검.
저 검의 힘이라면 충분히 1인분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좋아.”
네르하는 씨익 웃으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어디 한번 해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