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마족 크루갈 (5)>
“다른 기사들은 전부 물려. 오러를 쓸 수 없다면 방해만 된다.”
우연인지 의도한 건지는 몰라도 녀석은 검귀급에 이른 고드반을 가장 먼저 죽여 버렸다.
그리고 또 다른 검귀급 기사 역시 놈의 손에 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물러나서 퇴로를 확보하세요.”
“아, 아가씨…….”
“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건 아니겠죠?”
남은 기사들은 우거지상이 되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지금 상황에서 일행 중 최강자인 아녜스의 말을 거역할 이는 없었다.
그렇게 기사들이 사라지고, 네르하는 차분하게 아녜스와 어깨를 마주했다.
“방금 상대해 봤으니 알겠지만 한 대라도 정타를 맞으면 죽는다고 봐도 좋다.”
“……네.”
“내가 전위에 설 테니 네가 후위에 서라. 틈이 보이면 사정없이 공격해.”
“……네?”
네르하의 제안에 아녜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돌렸다.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감에도 방금 네르하의 제안은 아녜스의 입장에서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 반대 아닙니까?”
네르하는 마법사, 자신은 기사.
아무리 봐도 이쪽이 전위를 맡아야 하는 거 아닌가?!
“루시아도 나와 합을 맞출 때는 후위에 선다.”
“……!”
정확히는 연습할 때만이지만.
“따지는 건 나중에 하고 지금은 집중해. 분명 놈은 시간이 지날수록 지금보다 훨씬 강해질 거다.”
“하하하, 정답이야.”
크루갈이 유쾌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육체에 비할 바는 못 돼도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필요하긴 하지. 한 이틀만 더 지났으면 좋았을 텐데.”
“그걸 그렇게 자랑스럽게 떠벌려도 되나?”
“어차피 여기서 너희들을 죽이면 더 이상 날 방해할 놈은 없을 테니까.”
“그럼 지금 널 죽여야겠군.”
“한번 해보시지?”
크루갈의 도발에 네르하는 사양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그러자 녀석은 주먹에 막대한 기운을 담아 그대로 카운터를 날리기 시작했다.
‘강하고 빠르다. 하지만 그뿐이야.’
네르하의 손에 부드러운 바람이 맺혔다.
이전, 시저의 공격을 막기 위해 사용했던 수법.
부드러운 유법의 묘리가 크루갈이 내지른 주먹의 궤도를 뒤틀었다.
“괜찮군!”
콰과과광!
고작 주먹질 한 방에 동굴 전체가 울리는 거대한 충격파가 발생된다.
그나마 다행인 건 크루갈의 기술적 역량이 시저에 비할 바는 아니라는 점이랄까?
‘그러고 보니, 그 영감탱이는 어디로 사라진 거지?’
제자가 타지에서 객사하게 생겼는데 말이다!
“하아압!”
자세가 무너진 크루갈의 등 뒤로 아녜스가 기습을 가했다.
하지만 가볍게 몸을 뒤튼 크루갈이 주먹을 쥔 채로 손등을 휘두르자 아녜스의 공격은 아주 가볍게 무위로 돌아갔다.
부웅!
“헉!”
아녜스는 다급히 검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고 바닥을 굴러 공격을 피했다.
퍼퍼퍼펑!
그리고 그녀가 피한 자리로 어마어마한 바람 소리가 들려오며 벽면이 거대한 채찍에 맞은 것처럼 찢겨 나갔다.
“헉! 허억!”
아녜스는 방금 전의 공격이 빗나간 것보다 목숨을 부지한 것에 더욱 더 감사했다.
‘괴물!’
어째서 네르하가 전위를 자처했는지 알 것 같았다.
공격을 흘리는 유(流)의 묘리.
말이야 쉽지 저 무식하고 강력한 일격을 단 한 번이라도 흘리는 데 실패하면 목숨이 날아간다.
기사들이 떼거리로 몰려와 보조를 해 줬을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이렇게 일대일로 마주하니까 그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야, 괜찮냐?”
“후우, 후우, 괜찮, 괜찮습니다.”
“너도 나름대로 가문의 고수들과 많이 겨루어 봤을 텐데 저런 유형은 아마 처음일 거다.”
아녜스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문에는 저렇게까지 육체를 단련하신 분이 없으니까요.”
저 육체는 분명 단련이 아닌 흑마법과 다른 사법이 합쳐진 키메라의 그것일 것이다.
“아마 체력에도 한계가 거의 없을 테고, 영역을 펼치는 마족보다야 일반인의 피해가 적겠지만 반대로 제거하려면 훨씬 더 큰 희생이 필요해.”
“인지하고 있습니다.”
죽음의 문턱과 마주했는지 아녜스의 팔다리가 조금씩 떨려 오고 있었다.
‘……텃군.’
네르하는 그 모습을 보고는 살짝 혀를 찼다.
이미 공포를 직시한 아녜스는 더 이상 전투를 이어나가기 어려운 몸이 되어 버렸다.
물론 이걸 넘어서면 검사로서 한 단계 진화하겠지만 적어도 지금같이 목숨이 위험한 극한의 상황에서 그걸 넘어서는 건 매우 힘든 일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네르하의 시선을 알아챘는지 성검을 꽉 쥔 아녜스가 목소리를 크게 내며 외쳤다.
“할 수 있어요!”
기합을 내지른 아네스의 정신이 점차 안정되기 시작한다.
네르하는 그런 그녀에게서 루시아의 모습을 보았다.
“역시 비슷해.”
“하하하, 뭐가 말이냐?”
“넌 몰라도 된다.”
네르하는 대화와 함께 주먹까지 끼어드려는 크루갈의 일격을 조심스레 걷어 내었다.
주먹을 내뻗은 크루갈이 네르하를 향해 이죽거렸다.
“날 따돌리고 둘이서만 데이트를 하다니. 소외감이 느껴지는군.”
“그런 건 살기나 집어넣고 말하시지.”
네르하는 다시금 크루갈을 걷어차 내며 인상을 썼다.
‘역시 너무 단단해. 저 육체를 어떻게 뚫지 않으면 승산이 없다.’
결국엔 모험을 걸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아녜스.”
“네. 네르하 님.”
“포지션을 바꾼다.”
“……!”
“네가 전위다. 할 수 있겠나?”
아녜스는 아주 잠깐 침을 삼켰다.
분명 네르하는 아주 강력한 일격을 준비할 게 뻔했다.
전위를 맡는다고 해도 두려움에 굴복해 피해 버리면 그대로 뒤에 있는 네르하가 죽어버릴 터다.
아녜스는 각오를 다졌다.
“맡겨 주세요. 공격을 통과시킬 바엔 차라리 죽겠습니다.”
“좋아. 한 가지만 명심해라.”
“네.”
“걷어 낸다는 생각보단 눈으로 놈의 움직임에 끝까지 집중해. 그러면 조금 수월할 테니까.”
그 정도 각오는 있어야만 벽을 넘을 수 있다.
물론 실제로 그런 각오를 하다 개죽음을 당한 무인의 시체가 성을 쌓을 정도로 존재했지만 그걸 극복하는 것도 운이자 실력의 영역이었다.
“그래. 작전 회의는 잘 끝났나?”
크루갈이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방금 전만 해도 네르하의 보호를 받았던 아녜스가 천천히 앞으로 나서며 이번엔 네르하를 보호하기 시작했다.
“슬슬 나도 지겨워지려고 하는데, 이제 끝내고 나가서 피를 좀 먹어 줘야겠군.”
“그 전에 당신은 우리의 손에 죽습니다.”
“과연 그럴까?”
화악!
방금 전과 마찬가지로 크루갈은 직선적인 움직임을 보이며 주먹을 내질렀다.
아니, 내지르는 것처럼 보였다.
“……!”
아녜스는 정면으로 다가오는 크루갈의 주먹이 조금씩 흔들리자 눈을 부릅떴다.
‘역시 이때를 위해 지금까지 일부러 직선적인 모습만 보였군!’
변초(變招).
즉, 기술의 영역.
아무리 몸으로 먹고사는 놈이라지만 저 크루갈이란 마족은 살 만큼 산 놈이다.
분명 수많은 전투 경험과 생사를 넘나드는 혈전을 통해 지금의 자리를 차지했을 터.
그런 놈이 별다른 기술도 없이 무식하게 주먹질만으로 승부를 볼 리가 없다.
“죽어라.”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가운 목소리.
수많은 권격이 잔상을 그리며 아녜스의 전신을 두들기려 한다.
분명 저 잔상 하나에만 스쳐도 인간의 육체는 종잇장처럼 터져 나갈 터.
……중얼중얼중얼.
“……?”
그 순간, 크루갈은 아녜스가 실성한 것처럼 입술을 나불대는 것을 보았다.
“끝까지 본다. 끝까지 본다. 끝까지 본다.”
네르하가 마지막에 남겼던 조언.
끝까지 상대의 움직임에 집중하라는 네르하의 말은 오히려 크루갈이 변초를 시전하면서 진정한 빛을 보았다.
“보였다.”
크루갈의 주먹이 정확하게 목표로 한 곳.
그곳은 바로 다름 아닌 아녜스의 심장이었다.
화륵!
정식 후계로 이름을 올리며 부친이자 하늘 같으신 가주에게서 선물받은 성검, 유레이트.
그 순백의 검신이 화려하게 타오르며 오러로 만든 검신을 만들어 낸다.
‘막는다!’
아녜스가 택한 방법은 흘리기가 아닌 막기.
‘아무리 초월적인 근력을 가졌다고 해도 연속으로 주먹을 휘두르면 하나하나의 위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어!’
정확한 타점을 캐치할 수 있다면 흘리기보다 막는 것이 훨씬 수월하게 방어할 수 있다!
쿠웅!
거대한 진동이 울려 퍼지며 아녜스의 검면이 크루갈의 주먹을 막아내었다.
“끄으으윽!”
이대로 밀리면 뒤에서 주문을 준비하던 네르하에게까지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아녜스는 그 생각 하나만을 생각하며 필사적으로 크루갈의 일격을 버텨 내었다.
그리고, 단 한 차례 해낸 그런 그녀의 행위는 곧바로 보답을 받았다.
“잘했다.”
귓가에 속삭이듯 들려온 네르하의 목소리.
그리고 네르하는 아녜스의 뒷목을 잡고 구석으로 던져 버린 뒤, 그대로 크루갈을 향해 달려들었다.
“끼약!”
병아리 울림소리 같은 비명을 내지른 아녜스는 이윽고 네르하의 신형이 찬란한 황금빛으로 물든 것을 보고는 경악했다.
“어? 어어?!”
자신의 눈이 지금 착각을 일으킨 것일까?
“그, 금색이라고?”
라데우스의 스타 플래티넘이 아닌, 마치 케프렌의 골든 글로리를 보는 듯한 금빛 휘광.
그 위험성을 감지했는지 크루갈의 표정에 처음으로 당황이 일었다.
“……!”
금철유성(金鐵流星)!
발끝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황금의 창날이 그대로 크루갈의 상반신을 꿰뚫어 버렸다.
* * *
쿠구구궁!
지하의 지반을 무너뜨릴 정도의 강력한 일격.
지금껏 크루갈이 날뛸 때도 무너지지 않던 지하 기지가 네르하가 펼친 일격에 점차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오, 오러?”
천장에서 바윗덩이가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아녜스는 방금 전 자신이 본 광경을 상기하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어, 어떻게… 라데우스의 인간이 오러를?”
황금으로 뒤덮인 탓에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지만 아녜스가 확인하기로 방금 전 네르하가 시전한 기술은 분명 ‘오러’가 틀림없었다.
그것도 간신히 검의 형태를 만들어 내는 것에 그친 자신과는 다르게 몇 단계는 윗줄에 있는 게 분명한 선명하고 날카로운 오러의 칼날!
“젠장, 역시… 아직도 이 기술은… 좀 힘들군.”
네르하는 한순간 대량으로 빠져나간 마나의 탈력감을 이기지 못하고 한쪽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래도 발끝이 놈의 육체를 가르는 느낌을 확실하게 느꼈다.
‘마족의 재생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치명타는 분명할 거다.’
네르하는 체력과 정신력이 고갈되는 와중에도 차분하게 정면을 직시했다.
후두두둑!
흙먼지가 걷히면서 심장 부근에 거대한 구멍이 뚫린 크루갈이 굳은 표정으로 앞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대단하군.”
네르하의 표정이 일변했다.
분명 심장을 잃은 것은 맞지만 놈의 생명력은 그 힘을 잃지 않고 여전히 충만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빌어먹을…….’
아녜스가 질린 표정으로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그걸 맞고도 살아 있다고?”
“음, 아무래도 키메라의 육체다 보니 생명력이 상당히 뛰어나서 말이지. 또 내 파트너였던 자가 워낙 준비를 철저히 해서 말이야.”
꽈득! 꽈드득!
구멍 사이에서 어느새 세포조직이 재생되며 심장의 형태를 다시 만들어내고 있었다.
“방금 일격은 정말 대단했다, 라데우스의 인간.”
네르하를 바라보는 크루갈의 눈에는 미미한 감탄이 서려 있었다. 처음 보였던 장난기 역시 말끔하게 지워 버린 채였다.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
“너는 초마인과 어떤 관계냐?”
“뭐?”
마냥 무시하기엔 크루갈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