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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74화 (74/237)

74화

<마족 크루갈 (6)>

“진지하게 묻는 것이니 진지하게 대답해 주었으면 하는군.”

네르하는 크루갈이 무슨 저의로 이런 질문을 했는지를 고민했다.

‘재생을 위해 시간을 끌 속셈인가?’

그렇다고 보기엔 또 놈의 표정 하난 더없이 진지했다.

시간을 길게 끌 수 없기에 생각 또한 짧았지만 의외로 답은 빠르게 나왔다.

“방금 전 내 기술에서 그 초마인이란 놈이 생각난 건가?”

“맞다.”

네르하의 이마에 살짝 주름이 졌다.

대체 뭔 연관성이 있기에 마법과 오러를 융합시킨 ‘금철유성’에서 어떻게 초마인의 흔적을 발견했단 말인가?

네르하는 솔직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모른다.”

“…….”

“그 초마인이란 놈이 뭐 하는 놈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 이미 5백 년 전에 뒈진 놈이다. 인간의 수명은 그렇게 길지 않아.”

“네가 그 초마인의 기술을 이었다는 가정도 있다만.”

“이건 내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기술이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은 적은 없어.”

“진심인가?”

“진심이다.”

그 문답까지 끝나자 크루갈은 다시 침묵했다.

‘젠장, 끝을 볼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놈의 육체에 뚫린 구멍은 점점 더 작아지고, 놈의 활력은 눈에 띄게 회복되고 있다.

‘진원지기까지 끌어다 써도 될까 말까 하겠군.’

아쉬웠다.

리브라를 졸업하는 4년의 시간만 온전히 수련에 투자할 수만 있었어도 이런 결과는 나오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어쩔 수 없지. 목숨을 걸고 끝장을 볼 수밖에.’

네르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크루갈이 네르하를 내려다보며 뜬금없이 이런 말을 꺼냈다.

“여기까지만 하지.”

“뭐?”

“생각보다 재생이 더디군. 역시 그런 종류의 공격은 육체의 재생을 차단하는 효과가 있어.”

마치 이전에 한번 겪어 보았다는 듯한 말투.

아니, 그 전에 마족이 먼저 전투를 중단하겠다고?

“그대들은 이미 한계에 도달한 것 같고, 나 역시 지금 바로 정양하고 회복하지 않으면 이 새로운 육체의 잠재성을 크게 깎아 먹게 된다. 서로 간에 더 이상 싸움을 이어나갈 이유가 없을 텐데?”

“웃기지 마! 마족을 눈앞에 두고 후퇴를 하라고!?”

아녜스 역시 검극을 받침대로 삼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분노를 담아 크루갈에게 소리쳤다.

“네가 이곳에서 나가면 어떤 지옥이 펼쳐질지 모르는데!”

“흠, 뭔가 오해를 하고 있군.”

“오해라고?”

“나는 이미 수육에 필요한 충분한 에너지를 얻었다. 더 이상 생체 에너지를 공급받을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지.”

“하지만… 네놈이 피를 뿌리겠다는 말은…….”

“당연히 몸이 정상일 때 얘기지. 자기 몸이 아파 죽겠는데 남을 건드려서 뭐 하겠나? 머리가 나쁜 여자로군.”

“뭐, 뭐얏!”

아녜스는 발끈했다.

크루갈은 그런 아녜스를 무시하며 네르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나 하나 막는다고 해서 이제 너희들 땅에 펼쳐질 지옥이 경감되는 것은 아니다.”

“그건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로다. 이곳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마족들의 강림과 현신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이야기지.”

“……!!”

“아마 너희 라데우스 쪽에서도 대략적으론 눈치채고 있을 거다. 이미 북쪽에 대악마 하나가 현신하여 몸을 숨기고 있으니까.”

그야말로 세상의 균형을 뒤흔들 만한 초특급 정보였다.

‘북방이라면 분명…….’

최근, 라데우스의 가주인 카이젤이 한차례 원정을 떠났다가 돌아온 곳이었으며 안정적으로 그 지방을 평정하고 후처리만 남았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저놈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째서 그걸 내게 알려 주는 거지?”

“하하하, 일단은 ‘마계 백작’인 이 몸의 육체에 상처를 입힌 인간에 대한 찬사라고 해 두지.”

“진짜 이유는?”

크루갈은 네르하의 뒤이은 추궁에 깔끔하게 그 이유를 밝혔다.

“그냥 그놈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아무래도 서로 간에 사이가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크루갈이 엄숙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500년 전 일어날 예정이었던 마인대전(魔人大戰)이 그 망할 인간 하나에 의해 무산되고 다시금 시간이 지나 그때가 도래했다.”

“…….”

“이제 곧 너희 중간계에 큰 혼돈이 찾아올 것이다. 그러니 싸움은 이쯤 하고 이후를 대비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크루갈의 말은 나름 타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원래라면 이쯤에서 적당히 타협하고 전투를 중지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씨익!

하지만 네르하의 생각은 달랐다.

“그렇다 해도 네놈을 보내 줄 순 없지.”

“……이놈.”

이렇게까지 말을 했는데도 들어먹지 않는 네르하의 모습에 크루갈은 크게 분노했다.

“어디서 약을 팔고 있어? 네놈이 우리를 죽일 수 있었다면 굳이 자비를 베푸는 척하지 않고 죽였을 텐데.”

“…….”

“심장을 재생하는 퍼포먼스는 인상적이었지만 당장 네놈의 힘과 육체에도 한계가 찾아왔을 거야. 그렇지 않나?”

“굳이 벌주를 마시려고 드는군.”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뿐이지.”

고오오오!

네르하와 크루갈 사이에 또다시 진한 살기와 투기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미쳤어.’

아녜스는 식은땀을 흘리며 네르하와 크루갈을 번갈아 보았다.

방금 전 금빛이 반짝이는 기술로 인해 이곳 지하는 이미 무너지기 직전까지 왔다.

그런데도 싸움을 지속하겠다는 건 이곳에서 사이좋게 매몰되어 자살하겠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그때였다.

“흐음, 다행히 그리 늦지 않은 모양이군.”

우뚝!

저 멀리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네르하의 신형이 우뚝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그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영감탱이.”

네르하의 시선이 자리 잡은 곳엔 익숙한 근육질의 노인이 한 은갈색 머리의 청년과 함께 서 있었다.

“다시 보는구나, 제자야.”

명왕, 시저 루드벡.

지금까지 행방이 묘연했던 그가, 상황이 마지막으로 향할 때가 돼서야 장내에 나타난 것이었다.

* * *

씨익!

시저의 미소를 본 네르하가 살짝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제가 죽을 때가 다 돼서야 오시는 겁니까?”

“너무 그러지 마라. 나름 지원군도 데리고 왔는데.”

지원군?

네르하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다.

‘저자는?’

시저의 옆에 있는 은갈색 머리의 청년.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 있고, 딱 봐도 선하게 생겼지만 네르하는 속지 않았다.

‘네르하’의 기억보단 좀 더 성숙해진 모습이었지만, 저 청년의 정체는 분명했다.

그가 빙그레 웃으면서 네르하에게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구나, 동생아.”

“……네. 오랜만에 뵙습니다.”

네르하는 정중하게 청년에게 허리를 숙였다.

“아르바 형님.”

“그래.”

아르바 세타 라데우스.

네르하의 셋째 형이자 라데우스 계승 서열 4위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

‘분명 북방에 있다고 들었는데?’

게다가 호위 한 명도 없이 갑자기 덜컹 나타난 것도 뭔가 이상했다.

어느 정도 인사가 끝나고 시저가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화려하게도 날뛰었구만.”

네르하는 입술을 살짝 비죽이며 시저를 쏘아보았다.

“설마 이제 와서 다 잡은 거 막타 치러 오신 건 아니시겠죠? 제 공을 빼앗으실 생각이십니까?”

“크하하하! 내가 그렇게 염치가 없진 않다!”

시저는 눈을 번뜩이며 이렇게 말했다.

“물론 죽었다면 복수 정도는 해 줄 생각이 있었지. 감히 첫 가르침도 내리지 못한 남의 제자를 죽였으니 그 대가는 치러야 하지 않겠니?”

시저가 ‘제자’라는 단어를 노골적으로 언급하자 네르하는 살짝 시선을 돌려 아르바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그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때, 크루갈이 입을 열었다.

“상당한 실력자로군. 500년 전에도 찾아보기 흔치 않을 정도로.”

“당연하지.”

“육체가 완전히 회복되었다면 꽤 좋은 싸움을 해볼 수 있었을 것 같은데? 흐음, 이번 나들이는 여기까진가?”

“운이 나빴다고 생각해라.”

시저와 아르바의 등장에 크루갈은 나름 체념한 기색이었다.

‘끔찍하군.’

만약 돌입이 늦어 저놈의 육체가 완전히 회복되었다면 설사 엘림과 다른 마법사들이 회복되었다 하더라도 전원 목을 내줬어야 했을 것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마지막까지 즐기다 가지 않으면 손해겠어.”

크루갈의 전신에서 투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처음 조우했을 때에 비해선 명백하게 감소된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점엔 변함이 없었다.

막 자세를 잡으려던 찰나, 네르하의 귓가에 시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받거라, 제자야.”

“……?”

툭!

네르하는 시저가 갑자기 무언가를 던지자 얼떨결에 그것을 받았다.

“이건?”

시저가 던져 준 것은 다름 아닌 글러브.

손가락 부분이 잘려 있는 오픈 핑거 형태에, 손등 부분엔 뭔가 볼록한 검은 구슬 같은 것이 튀어나온 이상한 형태였다.

하지만 네르하는 그 글러브가 무엇인지 깨닫고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이걸 사부가 어떻게?”

“나도 부탁받은 거다.”

그 부탁을 누가 했는지 대충 짐작이 간다.

이것은 ‘망각의 서’라는 아티팩트의 코어를 이용해 만든, 수여식을 통과한 것을 증명하는 물건.

이 세상에 단 하나만 존재하는 네르하만의 장비였다.

“이자카르 님의 힘이 느껴지는군.”

네르하가 그 글러브를 착용하자 대번에 크루갈에게서 반응이 왔다.

“꽤 유명한 마족이었나 보지?”

“마왕의 위(位)에 도전하던 분이셨지. 작위는 충분했으니 인간들에게 봉인되지 않고 살아남았다면 마왕의 자리에 오르셨을 거다.”

크루갈의 눈에 흔치 않게 탐욕이 번들거렸다.

“탐나는군. 네놈을 죽이고 그 힘을 가져가야겠어.”

“할 수 있다면.”

글러브를 착용하자 탈력감만 있던 전신에 활력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굉장하군.’

수여식에서 자신만의 무기를 얻은 이들이 어째서 그렇게 행복해했는지 그 이유를 단번에 깨달을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 글러브는 네르하에게 이로운 것만 안겨 주지 않았다.

‘마기.’

손등의 혈도를 타고 미약한 마기가 네르하의 육체에 흘러들어 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의 네르하가 감당하지 못할 수준은 절대 아니었다.

아마도 이전 보물전의 정령이 말한 대로 단계별로 제약이 걸려 있는 듯했다.

‘좋아. 해 주지. 무술과 마법만이 아닌 마나와 마기의 융합을!’

고오오오!

네르하가 본격적으로 힘을 끌어올리자 찬란한 황금빛이 전신을 타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다만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 황금빛 사이사이에 검은색의 실선이 조금씩 보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멋지군!”

크루갈은 그런 네르하의 기세를 접하며 감탄을 터트렸다.

“바깥에서 날뛰지 못한 건 아쉽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나름 만족할 수 있겠어.”

크루갈 역시 육체에 허용된 힘을 한계까지 쥐어짜며 주먹에 힘을 모았다.

그러고는 네르하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이번 격돌 이후 둘 중 하나는 죽는다.”

네르하는 대답 대신 자세를 잡는 것으로 응답했다.

그리고…….

한 마족과 한 인간이 자리를 박차고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콰과과광광!

* * *

경천동지(驚天動地).

그야말로 하늘이 놀라고 땅이 움직일 정도의 일격.

기교도 속임수도 없는 심플한 주먹질의 결과는.

“……아쉽군.”

네르하가 다시금 크루갈의 심장을 꿰뚫으며 결판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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