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아르바 라데우스>
같은 급의 고수와 같은 속도의 세계에서 공격을 나누게 되면 아주 가끔,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한 착각이 들 때가 많다.
대표적으로 천마와의 전투가 그랬고, 또 크루갈과의 마지막 수 교환이 그랬다.
네르하에 의해 심장이 꿰뚫린 크루갈은, 그 상태로 담담하게 네르하를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너는 다른 인간들하고는 다르구나.”
“…….”
“역시 닮았어. 그놈과…….”
만약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방금 전의 격돌이 기교를 배제한 순수한 힘의 충돌이라고 보았을 테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크루갈은 끝까지 주먹에 변초를 섞으며 네르하를 공략했고.
네르하 역시 끝까지 그 변초를 읽어 내며 기어코 카운터를 날렸다.
힘 대 힘이 아닌, 기술 대 기술의 대결.
그렇게 그 결과, 네르하가 승리했다.
“방금 전의 일격은 오러가 아니었다. 처음 내 심장을 꿰뚫은 수법과 비슷했지.”
“맞다.”
“이름이 뭐지?”
네르하는 이 세계의 언어가 아닌 중원의 언어를 입에 담았다.
“태극도(太極道).”
금철유성의 뒤를 이은, 무공과 마법을 조합한 두 번째 기술의 이름이었다.
“그렇군. 익스터널 사이드와 이너 사이드의 힘을 융합한 것인가?”
네르하의 눈이 크게 떠졌다.
방금 전엔 이 세계의 언어로 번역한 것이 아닌 온전한 중원의 언어를 입에 담았음에도 상대가 알아들었던 탓이었다.
“방금, 내 말의 의미를 알아들었나?”
“조금은. 오백 년 전에도 이와 비슷한 기술에 당했으니까.”
털썩!
크루갈의 신형이 무너졌다.
“다시 재생하기엔…… 이 육체에 부여된 생명력이 한계에 달했군.”
아무리 수천 이상의 목숨을 잡아먹은 육체라 해도 심장을 두 번이나 뚫리고도 재생하는 데엔 한계가 있었다.
“네르하 라데우스.”
“말해라.”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내 본체로 다시 붙어 봤으면 좋겠군.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져 있겠지?”
소름 끼치는 말을 웃으면서 하는 크루갈의 모습에 네르하는 피식 웃으면서 이렇게 답해 주었다.
“헛소리는 그만하고 이만 뒈져라.”
“크, 크크큭!”
푸욱!
네르하가 놈의 심장에 박힌 팔을 거칠게 빼내었다.
“다음엔… 좀 더 재미있었으면… 좋겠군.”
털썩!
크루갈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진다.
그리고 거짓말같이 그대로 육체가 급격히 붕괴하며 몸이 먼지로 화하기 시작했다.
* * *
결국 흑마법사의 본거지에서 일어난 전투는 두칸과 흑마법사 일파의 전멸이란 결말로 끝나게 되었다.
“네, 네르하! 괜찮아?!”
바깥에서 조마조마하게 대기하고 있던 마하타가 아녜스의 부축을 받고 나타난 네르하에게 다급히 다가갔다.
그리고 갑자기 뒤이어 나타난 아르바의 모습을 보고는 기함했다.
“헉! 아르바 도련님?!”
“마하타 세스타스, 오랜만이로군.”
“도, 도련님을 뵙습니다.”
마하타와 아르바는 일면식이 있었던 사이 같았다.
다만 아무래도 서로가 다른 루트로 진입한 탓에 동굴 안에서 마주치지는 않은 듯했다.
“미안하지만 내가 이곳에 온 건 대외비라서 말이야. 모른 척해 주었으면 좋겠군.”
싱긋!
아르바의 미소에 마하타는 한순간 살짝 넋을 놓았다.
“거 수작 부리지 마시고.”
꿈틀!
귓가에 들려온 네르하의 한마디에 아르바의 눈썹이 살짝 흔들렸다.
“북방에 계실 형님께서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그것도 호위 한 명 없이 홀몸으로 말이죠.”
아르바는 미미하게 웃은 그대로 네르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흐음, 꽤 당돌해졌구나. 과거의 네르하를 생각하면 완전히 사람이 바뀐 것 같군.”
뼈가 있는 아르바의 말에도, 네르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니까요.”
“살아남지 못한다라. 너는 정말로 네이하와의 약속을 지킬 셈이구나.”
“…….”
이번엔 네르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디까지나 이복형제인 아르바가 어떻게 네이하와의 약속을 알고 있는지 의문이다.
“뭐, 그런 사소한 건 넘어가지.”
아르바가 이번엔 아녜스를 바라보았다.
“아네시스 케프렌, 미안하지만 자리를 좀 비켜 주겠나? 지금부턴 가문 내의 일이라서 말이야.”
“……!”
“그대와 케프렌의 기사들이 벌인 분투엔 경의를 표하지. 추후에 가문 차원에서 합당한 보상이 내려지도록 케프렌과 조율 과정이 있을 것이네.”
“……알겠습니다.”
말은 치하나 다름없었지만 그 속에 든 뜻은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아녜스는 헤어지기 전, 살짝 네르하와 시선을 마주했다.
―떠나지 말고 대기하고 있어라. 형님과의 대화가 끝나면 찾아갈 테니까.
“……!”
네르하의 전음에 아녜스는 살짝 놀란 기색이었지만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았다.
네르하가 그녀와 맺은 계약은 어디까지나 그녀와 루시아가 무사히 만나도록 조율을 해 주는 것.
이대로 헤어진다면 그 약속을 어기게 되는 셈이었다.
“그럼.”
아녜스가 남은 기사들과 자리를 떠난 후, 그제야 아무런 방해가 없어진 네르하는 다시금 아르바에게 시선을 돌렸다.
“궁금하다는 표정이구나.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그렇죠.”
그것만이 아니라 아르바와 시저가 어떻게 일면식이 있는지도 궁금했지만 이건 바로 물어보지 않고 참았다.
이건 어차피 나중에 시저에게 물어보면 대답해 줄 것이기에…….
“으으음…….”
“……?”
어째서인지 아르바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침음을 흘렸다.
그런 아르바의 모습에 옆에서 지켜보던 시저가 호탕하게 웃으면서 아르바의 등을 후려쳤다.
“억!”
“하하하! 동생에게 뭘 그리 숨기려고 들어? 어차피 갑을 관계에서 을은 네 녀석이 아니더냐?”
그 순간, 네르하는 아르바에게 매우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는 걸 직감했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이 딱히 위기 같은 것이 아니라 기회라는 점도.
아르바가 고민 끝에 네르하에게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네르하.”
“말씀하시죠.”
“지하에 있는 판데모니움 흑마법사 집단의 연구 자료들…… 그걸 모두 내게 넘겨 주지 않겠니?”
“…….”
이번 작전에서 1등 공신을 꼽는다면 당연히 네르하다.
설사 생도 자격으로 보조적인 입장에서 참여했더라도 결과적인 공헌도가 1등이라면 네르하는 이번 임무로 인해 파생된 결과물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
그게 바로 라데우스의 율법이었다.
곰곰이 아르바의 말을 곱씹던 네르하가, 문득 이런 말을 날렸다.
“북방에서 뭔가 문제가 생기셨나 보군요.”
“…….”
정곡을 찔렸는지 아르바의 이마에 살짝 주름이 졌다.
그 순간, 네르하의 뇌리에 스쳐 지나가는 말이 있었다.
‘마왕급 마족.’
크루갈의 말에 의하면 북방에 나타나 몸을 숨겼다는 어느 존재. 그 존재 때문에 아르바가 이런 먼 곳까지 직접 행차했을 것이다.
네르하가 답을 주지 않고 침묵하자 아르바는 살짝 조바심이 난 듯 말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절대 맨입으로 달라는 건 아니다. 그에 상응하는…… 아니, 그 이상의 보상을 네게 약속하지.”
“일단 밑도 끝도 없이 보상을 약속하시는 것보단 제게 상황 설명을 해 주시는 게 우선일 듯싶습니다만.”
네르하는 아르바의 말에 곧장 넘어가지 않았다.
사실, 흑마법사들의 연구 결과 따위 넘기든 말든 상관할 바가 아니지만 대상이 아르바라는 것이 문제였다.
‘클로이아의 말에 의하면 직계 중 최고의 능구렁이!’
그런 능구렁이가 제대로 표정 관리도 못 하며 네르하에게 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건.
네르하의 표정 역시 덩달아 심각해졌다.
‘분명 북방에서 무언가 사고가 터졌을 거다. 그걸 본가에 보고하는 대신 직접 해결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일 테고.’
진지하게 소가주 자리를 노리는 위치에 있는 아르바라면 분명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하아.”
아르바는 살짝 한숨을 내쉬면서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그 이유를 알려 줄 수는 있다. 하지만 보안을 위해 언령의 제약을 걸어야만 해.”
원래라면 이런 말조차 하지 않고 겁박을 하든 뭘 하든 네르하의 입을 막으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옆에 네르하를 자신의 제자로 받았다고 천명한 시저가 있는 데다 본인의 상황 역시 그리 좋지 못하니 이렇게 약한 모습으로 나오는 것일 터.
“부탁이다, 네르하. 내겐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
네르하는 순간, 확 거절하고 아르바를 까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쩝, 클로이아의 일을 생각하면 엿 한번 제대로 먹여야 시원할 텐데 말이야.’
하지만 개인적인 감정으로 이번 거래를 파탄 낼 수는 없었다.
뭔가 운이 좋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지금의 네르하는 갑의 입장이었다.
“좋습니다. 일단 사정부터 들어보도록 하죠.”
네르하는 아르바와 발설 금지의 언령 계약을 체결하고, 북방에서 일어난 진실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예상했던…… 그리고 예상했지만 그만큼 놀라운 아르바의 한마디가 네르하의 고막을 때렸다.
“북방에 마왕이 강림했다.”
* * *
마왕.
오등작으로 나뉜 마계 귀족 중에서도 공작 위 이상의 마족에게만 지칭되는 최강의 칭호.
단신으로 국가를 멸망시키는 게 가능하고, 대륙을 위기에 몰아넣는 것이 당연시되는 힘을 가진 존재.
당연하게도 마왕급 마족이 강림하게 되면 라데우스와 케프렌은 물론 모든 대륙의 국가, 가문들이 연합해 군세를 편성하게 된다.
“마왕이라…….”
마지막으로 강림한 마왕의 기록은 무려 천여 년 전.
라데우스와 케프렌의 태동기에 나타나 여섯 개의 국가를 멸망시키고 대륙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그 마왕의 존재 덕에 국가의 힘은 쇠퇴하고 소수의 혈족으로 형성된 지방 호족들의 세력이 커지기 시작했고, 그것이 지금의 라데우스와 케프렌 등을 만들어 낸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일단 그건 그거고.’
네르하는 마왕이 강림했음에도 아르바가 본가에 알리지 않고 이쪽으로 찾아온 이유를 알아차렸다.
“초동 대처에 실패하셨군요.”
“……그렇다.”
“본가에 곧장 보고하기엔 생각 이상의 피해를 입으셨을 테고요.”
“…….”
아르바는 말 대신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북방에서 아르바가 맡은 직함은 무려 가주 대리.
그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공과 책임은 아르바에게 돌아가기 마련이었다.
아르바는 입술을 깨물더니 천천히 입을 열어 나갔다.
“북방에 강림한 마왕은 일반적인 소환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이곳에서처럼 특별한 육체에 영혼이 초혼되어 이루어진 현신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엄청 강했겠군요.”
백작급 마족. 그것도 온전한 상태가 아닌 크루갈의 강함을 생각하면 그보다 몇 단계는 윗줄에 있을 것이다.
눈을 감은 아르바는 씹어 삼키듯 자신의 실패를 털어놓았다.
“가주께서 내게 맡겨 주신 부대 하나가 전멸했다.”
그 말에는 네르하조차도 할 말을 잃었다.
아마 네르하가 이번 작전에 동행한 ‘아크’ 같은 전투부대일 가능성이 컸다.
그런 녀석들이 분대도 아니고 부대째로 전멸했다는 건 정말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곳에 오신 이유는?”
“내 곤란함을 알아챈 시저 님께서 알려 주셔서 알게 되었다. 이곳에 있는 판데모니움의 흑마법사들이 북방의 놈들과 비슷한 실험을 했다는 것을.”
아무리 마법적인 지식이 부족한 네르하더라도 여기까지 오면 아르바가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역소환 말이군요.”
“그래.”
영혼을 불러 장착시킬 수 있다면 반대로 그 영혼을 날려 버릴 수 있는 방법 역시 있을 것이다.
아르바는 그것에 희망을 걸고 이곳까지 직접 발걸음을 옮긴 것이다.
‘그렇다면?’
네르하는 아르바를 올려다보며 씨익 웃었다.
그 불길한 웃음에 아르바의 눈가가 씰룩거리던 찰나.
“넘겨드리는 대가로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아르바의 얼굴이 결국 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