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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76화 (76/237)

76화

<복귀 (1)>

“조건이라.”

아르바의 눈썹이 살짝 찡그려졌다.

“일단 들어보고 결정하지.”

“네, 우선은.”

네르하는 서슴없이 요구 조건을 밝혔다.

생각보다 간단한 네르하의 요구 내용에 아르바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려운 일은 아니군.”

아르바가 나름 괜찮은 조건으로 교섭을 끝마칠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 있습니다.”

“뭐?”

의아해하는 아르바에게 네르하는 계속해서 자신의 요구를 들이밀었다.

“아, 아니…….”

네르하의 말이 이어질수록 아르바의 표정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하나하나는 그리 어려운 게 아니지만 숫자가 문제였다.

무려 다섯 개에 달하는 사항을 모두 전달받은 아르바의 얼굴이 기어코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욕심이 많구나.”

네르하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형님의 능력으로는 아주 쉬운 일들일 텐데요? 기분의 문제이지 가능성의 문제는 아니지 않습니까?”

“…….”

아르바는 그 말에 부정하지 않고 침묵했다. 그 말마따나 조금 귀찮을 뿐이지 네르하가 내건 조건들은 아르바의 능력으로는 충분히 해 줄 수 있는 것들이었다.

아르바는 어째서인지 옆에 있던 시저를 살짝 노려보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좋다. 지금 급한 건 이쪽이니 어쩔 수 없겠지.”

생각보다 순순히 항복하자 네르하는 속으로 아쉽다는 듯 살짝 혀를 찼다.

‘순순히 받아들이는 걸 보면 조금은 더 등쳐먹을 수 있었을 것 같기도 한데?’

사실, 네르하는 추가로 클로이아에게 두 번 다시 접근하지 말라는 말을 넣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만약 그걸 입 밖으로 꺼냈다간 협상이 그대로 파탄이 날 거란 직감이 들었다.

아르바가 고개를 돌려 시저에게 말했다.

“공증을 서 주시죠.”

“기꺼이 받아들이지.”

시저 정도의 대마법사가 서는 공증이라면 라데우스 본가의 힘으로도 풀기가 어려웠다.

아르바는 네르하의 요구 사항들을 다시 꼼꼼하게 확인한 후에 언령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그럼 이만 실례하지. 흑마법사들의 연구 자료를 확보하는 것만으로 끝날 일이 아니니까.”

“그러시죠.”

나름 마음이 급했는지 아르바는 재빠르게 동굴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런 아르바의 뒤를 바라보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시저가 익살스럽게 웃으며 네르하의 등을 두드렸다.

“어때? 놀랐지?”

“네, 정말 놀랐습니다.”

어째서 시저가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이 장갑을 가져왔는지, 그리고 아르바와 어떻게 만나 이곳에 흘러왔는지 물어보고 싶은 게 한둘이 아니었다.

시저가 의기양양하며 어깨를 쭉 폈다.

“넌 방금 이 사부 덕을 톡톡히 본 것이라 여겨라.”

“뭐라구요?”

“이 사부의 존재가 아니었다면 저 사갈 같은 놈이 널 속살까지 벗겨 먹으려고 했을 테니까.”

뭐, 아르바가 그런 짓거리를 할 거란 가능성은 둘째 치더라도 이쪽도 호구는 아니다.

아르바가 아무리 뱃속에 뱀을 키우고 있다 해도 이쪽 역시 짬으로 따지면 만만치 않았으니까.

그런 네르하의 기색을 읽었는지 시저가 진지한 표정으로 충고했다.

“조심해라.”

네르하와 시저의 시선이 마주했다.

“아르바 녀석은 진지하게 라데우스의 후계 자리를 노리는 놈이다. 자기편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그 누구보다 가혹하게 상대를 나락으로 밀어 버릴 놈이야.”

“철두철미하다는 건 알겠더군요.”

“지금이야 놈이 재수 없게 독박을 썼고, 또 네가 리브라에 있으니 당장은 저놈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 허나 절대 방심하지 마라.”

시저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혹여나 나중에 놈과 충돌하게 되면 명심해라. 만약 기회가 생겼다면 확실하게 놈의 숨줄을 끊어 버려야 한다.”

어찌 보면 과격한 충고였지만 아르바의 성향을 생각하면 절대 틀린 말이 아니었다.

“명심하겠습니다.”

“하하핫! 그래야 내 제자라고 할 수 있지!”

“아직 제자, 아닙니다.”

“곧 그렇게 될 텐데, 뭘!”

여전히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가득 찬 시저 영감은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그러고는 ‘다음에 만날 장소는 리브라 내부가 될 거다!’라는 말을 남기고는 또 귀신같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귀신같은 노인네.’

문자 그대로 바람처럼 사라진 시저의 모습에 네르하는 살짝 침음을 흘렸다.

이형환위는 아닌 것 같은데 눈앞에서 완벽하게 모습을 감춘 것이었다.

‘흐음, 저 수법은 잘하면 비슷하겐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잔영이 흐릿하게 사라지는 걸 보면 공간 계열 마법이라기보단 분명 보법과 마법을 조화한 것이 분명했다.

‘뭐, 나중에 알려달라고 하면 되겠지.’

시저가 정말로 리브라에 무사히 들어올 수 있다면 네르하는 진지하게 시저를 스승으로 대할 생각이었다.

* * *

그렇게 지하에서의 일이 끝난 이후 그렌 타운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사실, 안정이라고 해 봐야 이미 시장인 켈릭스가 세이라의 권속이 된 상황에서 상황은 종료된 거나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아마 나는 바로 리브라에 돌아가게 될 거다.”

“예. 네르하 도련님.”

“너는 그렌 타운의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세력을 정리하고 주도(主都)로 올라오도록 해.”

세이라가 약간 난감하다는 듯 말했다.

“주도에 올라와도 어떻게 연락할 방법이 없습니다만.”

리브라의 폐쇄성은 약속을 잡고 만날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게 아니었다.

“그건 걱정 마. 마하타 님이 연락책이 되어 주기로 하셨으니까.”

“아, 마하타 님이라면!”

흑마법사들의 본거지 공략에 마지막까지 참여하면서, 결과적으로 마하타는 아크의 분대원 중에서는 가장 큰 공을 세우게 되었다.

그 공의 대부분은 사실상 네르하가 떠먹여 준 셈이었지만 말이다.

마하타는 그 부채 의식이 제법 깊은 편이었고, 네르하는 그 점을 정확하게 찔렀다.

“마하타 님은 못 해도 한 달 이상은 주도에 머문다고 하니 접촉하기 쉽겠지.”

한 달이면 그렌 타운의 뒷수습과 세력 정리를 끝내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너에겐 꽤 기대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깔끔한 마무리를 부탁하지.”

“맡겨 주시길. 앞으로 그렌 타운은 네르하 도련님을 뒷받침하는 든든한 세력이 될 겁니다.”

세이라는 역시 유능했다. 사태를 마무리 짓는 것에 지나지 않고 네르하가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캐치했으니까.

다만 약간 문제가 있다면.

“권력의 빈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충성심과 야망이 넘치는 놈들은 이곳에 많으니까요. 그런 놈들을 적당히 상잔시키면 금방 끝낼 수 있을 겁니다. 후후, 후후후…….”

고개를 숙인 채 뭔가를 중얼거리는 세이라의 모습에 네르하는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저걸 내버려 둬도 될까?’

빈민가 정보 조직 특성상 도시 내의 세력가들에게 온갖 시달림을 받아왔을 테니 한이 골수까지 맺혀도 이상할 건 없었다.

“세력을 어떻게 재편하든 그건 네 재량이겠지만 복수는 적당히 하도록. 쓸데없는 피를 뿌리면 상황이 더 복잡해지니까.”

“넵! 명심하겠습니다!”

표정이 과하게 빛나는 걸 보니 전혀 명심한 모습이 아닌 것 같다.

네르하는 한숨을 내쉬며 세이라에게 적당히 할 것을 계속해서 강조했고, 결국 세이라는 ‘눼에’라며 입술을 비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세이라와 앞으로의 일정까지 조율한 네르하는…….

“아녜스.”

마지막으로 정산할 것이 남아 있는 아녜스와 마주했다.

* * *

아르바의 개입으로 하루 늦게 만나게 된 아녜스는 좀처럼 얼굴을 펴지 못하고 우울한 기색이었다.

“전사자들의 시체는 수습했나?”

“시의 적극적인 협조 덕분에 전원, 무사히 수습할 수 있었습니다.”

마계 백작 크루갈에게 무려 넷이나 되는 인원이 당해 버렸다.

그들 모두가 나름 괜찮은 실력자인 건 차치하더라도 무엇보다 그들은 가문 내에서 아녜스를 뒷받침하던 든든한 지지 세력이었다.

언니를 만나겠다고 지불한 대가로는 꽤 뼈아픈 타격일 거다.

“이번 사건은 저희 가문 내에서도 보고가 올라갈 겁니다.”

“제법 괜찮은 보상을 받길 빌지.”

“네. 다른 누구도 아닌 마계 귀족의 강림을 저지했으니 본가에서도 좋은 반응이 나올 겁니다. 그분들의 이름과 명예는 가문의 역사에 굵직하게 새겨지겠지요.”

여기에 어느 정도 실리도 있었다.

아르바가 먼저 들어가 내부 물품들을 쓸어 담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 전투에 참여한 아녜스와 기사들에게도 유물에 대한 일정한 점유권이 있었다.

물론 아르바의 목적은 유물 그 자체가 아니라 북방에 강림한 마왕급 마족에 대한 대처였으니 이 문제는 아르바와 케프렌 가문 사이에서 조절해야 할 일이었다.

모든 권한을 아르바에게 넘긴 만큼 그 문제는 이제 네르하의 손에서 떠났으니까.

즉, 이제 남은 건 오직 하나.

“당신과 나 사이에 남은 정산을 해야겠죠.”

“그렇겠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아녜스와 루시아를 만나게 할 것이냐?

사실상 두 사람이 협약을 맺게 된 가장 중점적인 이유였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선 제가 생각해 둔 것이 있습니다.”

“생각이 있다고?”

“언니가 리브라에 있다는 걸 확신한 이상 굳이 위험을 무릅쓰지 않아도 찾아갈 방법이 있으니까요.”

‘의외로군.’

사실 이 만남을 위해 제법 치밀한 계획을 준비할 생각이었는데 의외로 아녜스가 먼저 네르하의 부담을 덜어준 것이었다.

“만약 잘 풀리지 않게 된다면 그땐 당신의 도움을 받게 될 겁니다.”

“잘 풀리길 빌지.”

네르하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이번에 당신이 보여 준 모습은 제 상식을 가볍게 박살 내는 것이었습니다. 언젠간…….”

철컥!

검을 역수로 쥔 아녜스가 네르하에게 인사를 보냈다.

“네르하 공자에게 정식으로 대련을 신청하도록 하죠.”

지금까지 아녜스가 알았던 전투마법사라는 존재와는 궤를 달리하는 움직임.

“당신의 모습을 보면 리브라의 커리큘럼이 어떠한지 한번 경험해 보고 싶기도 하군요.”

“케프렌과 검의 낙원도 지지 않을 겁니다.”

네르하는 살짝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돌렸다.

‘그런 거 없는데.’

아마 리브라의 커리큘럼을 접하게 되면 실망할 가능성이 100%일 거라고 장담한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그래. 네 말대로 곧 만나기를 바라지.”

네르하와 아녜스는 깔끔하게 등을 돌렸다.

* * *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엘림이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다.

“내가 꼴사납게 기절해 있던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나?”

엘림은 마하타와 부하들에게서 자신이 쓰러진 이후의 일을 모두 전해 듣고는 매우 분개했다.

그 작전에 자신이 참여하지 못한 것이 매우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 정보들을 착실히 종합하여 라데우스 가문에서 파견 나온 조사원에게 보고서를 올렸다.

“알겠습니다. 나머지 정황은 저희가 조사에 착수할 테니 여러분은 이만 본가로 귀환하십시오.”

“예. 두마 경.”

본가에서 파견 나온 라데우스 외부 지원국 소속인 두마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엘림에게 공치사를 날렸다.

엘림의 보고서와 자신들이 수집한 정보엔 큰 차이가 없었다.

“가문에서 큰 상이 내려질 겁니다. 이번에 강림한 존재가 정말로 백작급 마족이 맞는다면 가문의 여력을 끌어오지 않고 적을 토벌한 여러분의 공은 절대로 저평가를 받을 일은 없겠죠.”

“감사합니다.”

“한동안 임무는 없을 겁니다. 주도에서 몸조리를 하며 푹 쉬세요.”

그 말을 끝으로 두마는 조사를 위해 격전지였던 장소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본가 조사원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엘림이 부하들과 실습생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모두, 고생 많았다. 대장으로서 마지막 결전에 참여하지 못하고 꼴사납게 기절하고 있었으니…… 정말이지 면목이 없군.”

“아닙니다, 대장.”

“사실, 저희도 면목이 없습니다. 공은 저 녀석이 다 세웠는데 말이죠.”

일행의 시선이 모조리 네르하에게로 향했다.

양심이 있다면 이번 작전의 최고 공훈자가 네르하임을 부정할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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