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레이첼 루비아이 (3)>
레이첼 루비아이.
기본 오대 원소 중 불(火)에 대한 고유 계통을 각성한 스탠다드형 마법사.
사실, 특별한 이능 계열도 아니고 응용력이 부족한 불 하나만을 다룬다는 점은 일반적인 마법사 세계에선 그다지 큰 평가를 받기 힘들었다.
하지만 불이란 마법의 가장 기초이자 근본 원소 중 하나.
최초의 마법 역시 불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이 존재하는 만큼 가장 활발하게 연구되고 또 높은 수준으로 개발된 능력이기도 했다.
레이첼 루비아이는 그런 화염 계열의 마법사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재능을 가진 존재.
“조심하세요.”
레이첼을 찾아가기 전, 클로이아가 그녀를 평가하며 내뱉은 말이 아직도 네르하의 귓가에 아련히 남아 있다.
“레이첼 선배는…… 화력전에 한해선 동급의 모든 마법사를 통틀어 넘어설 존재가 없는 천재입니다.”
콰과과과광!
그 말을 증명하듯 네르하의 사방이 불덩어리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리브라와 라데우스 가문이 추구하는 전투 마법사란 존재의 기본적인 형태를 그대로 구현한 듯한 존재가 바로 레이첼 루비아이였다.
루비아이식 고유 마법.
작염난란(作炎難亂).
불꽃의 정령이 춤을 추듯 화려하게 일렁이는 불덩어리들이 네르하의 퇴로를 막아선다.
“일단 가볍게 시작해 볼까!”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레이첼이 쥔 단봉의 움직임에 따라 불길이 생명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단순한 불이 아니군.’
기체를 넘어선 묵직한 물리력이 느껴진다.
어설프게 탈출하려다간 저 불의 벽에 막혀서 순식간에 숯덩이가 될 터.
네르하를 포위한 불꽃의 진 바깥에서 레이첼이 무감각하게 입을 열었다.
“네가 지금까지 얼마만큼의 실전을 치렀는지는 몰라도, 순수 원소를 다루는 마법사와 싸운 경험은 얼마 되지 않을 거다.”
확실히 네르하는 일반적인 마법사라 불릴 만한 것들과 싸워 본 경험이 없었다.
“의외로 전투마법사의 세계에서 순수 원소를 다루는 마법사는 숫자가 적거든.”
복합 속성이나 특질계에 비해, 순수 원소만을 다루는 마법사는 실전에서 유연성이 제법 떨어지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순수 원소를 다루는 마법사는 ‘파괴력’에 있어서는 아주 화끈하지.”
불꽃의 벽이 점차 네르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레이첼이 비릿하게 웃었다.
“정석을 맛보도록 해.”
콰과과과!
본격적으로 불꽃의 헤일이 네르하를 덮쳤다.
그 막대한 열량에 클로이아가 버럭 따지기 시작했다.
“선배! 도련님을 죽일 생각입니까!”
“시끄러워! 내가 상대의 역량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할까 봐?”
레이첼은 그런 클로이아의 항의를 가볍게 무시했다.
“저놈은 저 정도에 죽지 않으니까 그냥 지켜보기나 해!”
네르하의 경지나 실적을 무시하듯 대했던 레이첼이였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일부러 상대를 깔보는 성향 때문에 나온 말이었고.
실제로는.
‘5레벨 이상의 흑마법사를 죽인 놈을 얕볼 리가 없지!’
레이첼은 대번에 눈치챘다.
마법적인 소양 이전에, 네르하에게선 수많은 전장을 거친 베테랑들과 소름끼치도록 비슷한 냄새가 났다.
그녀 역시 과거 전쟁 마법사라고 불렸던 만큼, 동류를 알아보는 눈 정도는 충분히 지니고 있었으니까.
“흐읍!”
네르하는 레이첼의 염진(炎陣)을 둘러보며 그대로 위로 솟구쳤다.
그런 네르하의 대응에 레이첼이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하늘은 퇴로가 되지 못해.”
화아아악!
마치 해일이 일어나듯 기둥처럼 치솟은 불꽃이 위쪽으로 향한 네르하를 덮쳤다.
네르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래도 거리가 벌어지면 위력은 줄어들 수밖에 없죠.”
미리 준비해 두었던 마법이 펼쳐졌다.
아이스 월!
3레벨의 범용 얼음 마법이 네르하의 주위를 감쌌다.
“고작 3레벨? 시간을 벌려고?”
레이첼은 대번에 네르하의 의도를 눈치챘다.
“단번에 승부를 볼 생각이야? 너무 날로 먹으려고 드네?”
그 말마따나 허공을 밟은 네르하가 그대로 레이첼에게 돌진했다.
“허튼짓을 하는군.”
이그니스 월.
레이첼의 전면에 대번에 거대한 불의 방패가 나타났다.
‘쳇!’
저거에 꼴아 박아 봤자 손해만 보는 건 자신.
네르하는 허공답보를 이용해 방패와 충돌하기 전에 빠르게 거리를 벌렸다.
재빠른 네르하의 반응에 레이첼이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신기한 발재주로군. 윈드 워크는 아닌 것 같은데? 뭐, 딱히 상관없겠지.”
이전 네르하의 주변을 감싸던 불길이 갑자기 형태를 바꾸며 수십 개의 창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네르하가 눈을 부릅떴다.
‘저런 짓이 가능하다고?’
아예 처음부터 저런 형태로 쏘아냈다면 모르되.
이미 자신의 손을 빠져나간 원소를 저런 식으로 찰흙 주무르듯 형태를 가공해 재활용하는 건 네르하로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말 엄청난 실력자다!’
네르하가 감탄에 잠깐 정신이 팔린 사이.
“블레이즈 스피어.”
움찔!
레이첼은 냉정하게 수십 자루의 화마의 창을 네르하에게 날렸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루비아이식 고유 마법.
화련작탄(火聯炸彈).
수천 개에 달하는 불꽃의 탄환이 창과 함께 네르하에게 쏘아졌다.
콰과과과광!
어마어마한 소음과 함께, 대련장 한가운데에 거대한 연쇄 폭발이 일어났다.
레이첼은 연기에 가려진 시야 속에서 차갑게 조소했다.
“너희같이 근접에서 승부를 보는 놈들의 약점이 뭔지 알아? 거리만 주지 않으면 그냥 가만히 있는 샌드백에 불과하다는 거야.”
콰콰콰콰!
그야말로 회피가 불가능할 정도로 촘촘한 광역 포격이었다.
“선배! 진짜 너무한 거 아니에요!?”
생각보다 사정 봐주지 않고 몰아치는 레이첼의 모습에, 클로이아는 지금이라도 개입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
팟!
자욱한 연기를 뚫고 네르하가 허공에 모습을 드러냈다.
‘큰일 날 뻔했다.’
방어 마법과 호신강기를 전력으로 펼치고, 거기에 피할 수 있는 건 모조리 피해서 직격을 회피했다.
‘저게 바로 7레벨에 이른 마법사의 진짜 역량인가?’
고레벨의 화력을 빠르고 쉴 새 없이 쏟아내는 역량.
만약 지금 이 장소가 일반적인 평원이었다면 눈에 보이는 대지 전체가 완전히 불바다가 되어 버렸을 것이다.
‘거리를 좁힐 방법을 찾아야 한다.’
저 마나도 무한은 아닐 것이다.
저렇게 마법을 난사하다 보면 분명 지치거나 틈이 벌어지는 순간이 있을 것이고.
‘같은 레벨인 클로이아의 마나량을 생각하면 분명 내 체력이 다하기 전에 화력이 줄어들 때가 온다.’
그 틈을 노린다면 분명 승산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레이첼의 말이 네르하의 생각을 끊었다.
“내가 쌓은 마나의 총량은 저 모질이의 세 배가 넘는단다.”
“……!”
“딱 봐도 내가 지치는 걸 노리는 기색이니 알려 주는 거다, 애송아.”
세 배라고?
네르하는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클로이아와 레이첼을 번갈아 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같은 레벨에서 세 배라는 건 좀 무리가 아닌가?
황당해하는 네르하의 표정을 읽었는지, 레이첼이 부가 설명을 해주었다.
“굳이 사정을 말하자면, 저 녀석이 레벨에 비해 쌓은 마나량이 지나치게 적은 거지. 그에 비해 나는 동급 최고 수준이고.”
“그렇군요.”
이건 딱히 재능 문제가 아니다.
제국 굴지의 백작가인 루비아이 가문 출신인 레이첼과 척박한 북방 지대에서 빈곤한 삶을 이어가던 클로이아의 차이였다.
아무리 머리가 천재면 뭐 하나? 자기보다 재능이 달리는 녀석들이 영약을 퍼먹어 가면서 물량전을 걸어오는데.
살짝 고개를 돌려 보니 클로이아가 부끄러움과 자괴감이 섞인 얼굴로 고개를 꺾고 있었다.
네르하는 한숨을 쉬며 레이첼에게 말했다.
“곧 그 차이는 급격하게 좁혀지게 될 겁니다.”
“호오?”
“그녀가 저의 지지자이듯 저도 그녀의 후원자이니까요.”
씨익!
그 말이 나름 마음에 든다는 듯 레이첼이 호기롭게 외쳤다.
“저년의 후원자를 자처한다면 그에 걸맞은 역량을 보여 봐. 설마 이대로 허무하게 끝내진 않겠지?”
“물론이죠.”
네르하는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호기롭게 외친 것과는 달리 네르하의 내심은 사뭇 복잡했다.
‘필살의 기술은 봉인한 채로 상대를 꺾을 수 있을까?’
필살의 기술이란 말 그대로 반드시 적을 죽이기 위한 기술.
금철유성, 그리고 태극도가 이런 류에 속했다.
하지만 그래도 해야만 했다. 어디까지나 이건 생사결이 아닌 내기니까. 아무리 레벨 차이가 나도 진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저 젊어 보이는 외견과는 달리 상대는 분명 백전을 경험한 걸물.
‘결국 타격을 주기 위해선 일점으로 돌파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문제는.
‘저 여자를 상대하던 자들 대부분이 그런 생각을 했겠지.’
잔재주가 통할 상대는 아니지만 지금의 마법적인 역량 차이를 뒤집으려면 어떻게든 잔재주를 부려야만 했다.
“하압!”
기합을 내지른 네르하가 그대로 레이첼에게 돌진했다.
“또 앞뒤 가리지 않는 돌진이니?”
레이첼은 한숨을 내쉬며 네르하에게 손가락을 겨누었다.
화륵!
자그마한 그녀의 손가락에서 그녀의 신장을 가볍게 넘어가는 거대한 화염구가 생성되더니.
“레드 불릿.”
콰앙!
그대로 막대한 굉음과 함께 발사되었다.
네르하는 황당한 시선으로 날아오는 총알 아니, 대포알을 바라보았다.
그 거대한 크기를 바라본 클로이아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뭐가 불릿이야!”
‘동감이야.’
속으로 수십 번 고개를 주억거린 네르하는, 빠르게 양손에 바람의 마력을 휘감기 시작했다.
이전, 시저의 공격을 흘릴 당시 사용했던 나선경의 일종이었다.
콰과과곽!
금속이 갈리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네르하의 양손이 화염구와 충돌했다.
‘덩치가 커서 오히려 수월해!’
윈드 스피닝을 사용함과 동시에 네르하는 그대로 화염구의 정면으로 주먹을 찔러 넣으며 외쳤다.
“디스펠!”
“뭐?”
레이첼이 황당한 시선으로 네르하를 노려보았다.
‘여기서 디스펠을 쓴다고?’
범용성 원소 환원 주문, 디스펠.
상대의 술식에 개입해 마법을 근원적인 부분에서 해체하는 주문으로, 이 마법은 몇 안 되는 ‘레벨’이 존재하지 않는 마법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디스펠은 그때그때 상대의 마법에 간섭해서 술식을 역산하는 식이라 고정된 술식 같은 게 존재할 리가 만무했다.
1레벨부터 9레벨까지 모든 마법에 대해 적용될 수 있는 수법이지만.
보통은 일반적인 상대보다 2레벨은 위에 있어야만 안전하게 디스펠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마법계의 정석이었다.
그 말인즉.
“야! 죽고 싶어 환장했냐?!”
어설프게 디스펠을 걸었다가 마법을 해체하지 못한 마법사에겐 두 가지의 결말이 존재한다.
하나는 그냥 그대로 마법에 쓸려서 당해 버리든가.
또 하나는 어설프게 손을 댄 결과로 술식이 더욱 꼬여서 마법이 폭주한다든가.
이번의 경우엔 후자에 속했다.
“젠장!”
레드 불릿은 막대한 화력을 한곳에 집중해 빠르게 쏘아내는 고화력의 마법.
어떻게 그 속도를 견뎌내고 주먹을 내질렀는지는 몰라도 8레벨의 대마법사가 아닌 이상 디스펠을 걸은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이러면 마력이 제멋대로 날뛰면서 불길이 터진다!’
어설프게 술식에 개입한 탓에 레드 불릿은 구체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폭주하는 원초의 불길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 불길은 정면의 네르하를 집어삼킴과 동시에 그를 연료로 삼을 터!
레이첼은 속으로 X 됐음을 직감하며 클로이아에게 고함을 내질렀다.
“지금 뭐 해! 저놈이 술식을 꼬아 버려서 원소 제어도 되지 않는다고!”
이 상황을 어떻게든 수습하려면 빙결 마법의 대가인 클로이아의 개입이 필수적이었다.
“…….”
“야! 지금까지 그렇게 딴죽을 걸던 년이 왜 중요한 순간에 가만히 처 있어!”
아무런 응답도 없는 클로이아의 모습에 분통이 터트리던 찰나.
“아직 승부는 끝나지 않았어요, 선배.”
“뭐?”
“저길 보세요.”
클로이아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홱 돌린 순간.
바람의 인도하에 일정하게 타오르는 ‘불기둥’을 본 순간, 그녀는 경악에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저건 또 뭐야?”
레이첼은 불길에 휩싸여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을 네르하를 상상했지만.
오히려 불길은 외력의 통제에 따라 안전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려면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
총명한 레이첼은 멍하니 가장 확률이 높은 가정을 입 밖으로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설마, 그 터지는 불길을 마나 제어 능력으로 붙잡았다고?”
분명 상대는 술식을 역산하지 못해 마법을 폭주시켰다.
하지만 제어 역할을 하던 술식이 완전히 박살 나 불꽃이 폭주하기 직전.
네르하는 순수한 마나 제어 능력을 통해 불길을 불기둥의 형태로 인도한 것이었다.
“말도 안 돼!”
일반적인 마법사는 술식의 해석 능력을 연구하면서 동시에 제어 능력을 단련한다.
아니, 오히려 마나 제어 능력을 단련하기 위해 술식 해석 방식을 공부한다는 게 옳은 일이었다.
그렇기에 높은 해석 능력을 지닐수록 제어 능력 역시 비례하여 상승하는 법.
이건 걷는 법도 모르는데 저 하늘 위를 날고 있는 꼴이다.
마법의 기본적인 상식이 뒤집어진 사건인 것이다!
팍!
그때, 불기둥 정중앙에 거대한 구멍이 뚫리며 그대로 네르하의 신형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차!”
레이첼은 그제야 자신이 지나치게 넋을 놓았다는 걸 자각하고는 빠르게 대응에 나서려 했지만…….
“방심하셨군요.”
그 빈틈을 놓칠 리가 없던 네르하는 그대로 그녀의 눈앞까지 접근해 목덜미 아래에 손가락을 살짝 찔러 넣었다.
“체크메이트.”
“…….”
그대로 승부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