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실전 마법 연구회 (1)>
졌다.
아무리 마지막 순간 방심했다 해도, 패배는 패배.
지금까지 수많은 전장을 넘나들며 수많은 역경을 이겨온 만큼 변명은 용납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패배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었다.
레이첼은 식은땀을 흘리며 네르하에게 일갈했다.
“너, 대체 뭐 하는 놈이야?”
“뭐가 말입니까?”
네르하가 싱긋 웃으며 반문하자 레이첼이 역정을 냈다.
“방금 전 마나 제어 말이야! 술식 해석 능력은 분명 기초도 없는 수준인데 마나 제어만큼은 분명…….”
자신의 밑이 아니다.
레이첼은 자존심 때문에 그 말을 꾹 집어넣었다.
네르하는 살짝 지친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운이 좋았습니다.”
“뭐? 운?”
레이첼은 황당해했지만, 네르하는 진심이었다.
‘불꽃을 어떤 식으로 제어하는지 대충이나마 봐 둬서 다행이지.’
다만, 여전히 원거리의 형태변환은 아직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도 잡히질 않았다.
레이첼은 지쳐 있는 네르하를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저게 재능이라면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수준이야!’
삼마자 머르딘조차 감탄한 네르하의 마력 제어 및 감응 능력.
사실, 그 능력의 원초는 전생에서부터 단련한 무인의 힘이었지만 그걸 머르딘과 레이첼이 알아챌 리가 없었다.
“딱히 상관은 없지 않습니까? 중요한 건 승부의 행방이죠.”
아무리 레이첼이 심볼 스펠(Symbol spell)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해도.
다시 싸운다면 절대로 이런 식의 빈틈을 찾기는 힘들 거다.
아마 이리저리 유린당하다가 미끼에 걸린 물고기 신세가 되어 노릇하게 구워지겠지.
“뭐가 됐든 내기는 제가 이겼습니다. 딴 말 마십시오.”
“좋아, 내기는 네가 이긴 거로 하지.”
레이첼은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설마하니 네 수준이 벌써 이 정도에 도달했을 줄은 생각도 못 했어. 지금까지 쏟은 화력이면 이전 수여식에 잠입했던 놈들 정도는 충분히 태워 버릴 수 있는데 말이지.”
그건 인정. 확실히 말도 안 되는 화력이긴 했다.
‘마법이 깨졌을 때 생각보다 훨씬 당황해서 쉽게 마무리할 수 있었어.’
다만 자신의 마법이 깨졌다는 당혹감이라기보다는, 네르하가 워낙 무모한 짓거리를 벌인 탓에 생긴 균열이었지만 말이다.
만약 레이첼이 침착하게 대응했다면 아마 승부는 훨씬 더 괴로워졌을 것이다.
그 전에 마무리가 되어 다행이었다.
레이첼은 방금 전 있던 대결을 복기하며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역시 천부적인 전투 센스와 마나 제어 능력으로 의외성을 창출했지만…… 기본적인 마법에 대한 능력은 떨어지는군.”
만약 네르하가 5레벨에 이르렀다면 이렇게까지 몰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뭐래, 패배자가.”
퍽!
“악!”
옆에서 들려온 불손한 소리를 응징한 레이첼이 살짝 탐욕스런 시선으로 네르하를 훑어보았다.
‘사실, 능력이 떨어진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지.’
오히려 군계일학에 가깝다.
‘추정 성취는 3레벨 후반대에서 4레벨 초반. 그것도 막 1학년이 이 정도라면…….’
왕년의 자신이나 클로이아보다도 훨씬 나은 성취라 할 수 있다.
그걸 떠나 재학생 중에 이렇게까지 자신과의 전투가 성립됨을 넘어 승리할 수 있는 자가 존재할지도 의문이다.
‘이거, 많이 탐나는 걸.’
레이첼은 살짝 찔러보기로 했다.
“내기가 내기인 만큼 약속은 지킬 거다. 내 인맥을 모두 동원해서 너의 경험을 확실하게 채워 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교수님.”
“뭐, 그건 그렇고 말이다.”
살짝 말끝을 흐리는 레이첼의 모습에 네르하가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너, 말이야. 혹시 동아리에 들어올 생각은 없냐?”
“네?”
동아리? 갑자기?
네르하가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선배.”
“왜?”
“네르하 도련님은 지금, 제 연구실에 보조로 참가하고 있어요. 그걸 빼 가겠다고요?”
클로이아가 눈에 쌍심지를 켜며 레이첼에게 따졌다.
하지만 레이첼은 능글맞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거랑 동아리 활동은 별개의 영역이지. 양립하지 못할 게 뭐가 있겠니?”
“아니, 그 전에 1학년은 동아리 활동이 금지잖아요! 참여 가능한 건 2학년부터일 텐데?!”
공용 마법을 중점적으로 배우는 신입생들은 동아리 활동이 금지되어 있다.
애초에 리브라에서 동아리라고 한다면 특정 계열들에 치우친 경우가 많아서 대부분이 4레벨에 이르지 못한 신입생들에게 오히려 독이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내 역량으로 어떻게 할 수 있어.”
“뭐, 뭐라고욧!”
“그리고 동아리 모집 공고가 시작되는 건 2학년부터일 뿐이지. 1학년이 동아리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학칙은 없다고?”
“무슨 그런 억지가!”
사실, 네르하가 동아리에 들어간다고 클로이아가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레이첼이라는 지도 교수를 만들 수 있다면 앞으로의 리브라 생활이 한결 더 편해질 것이란 건 자명한 이야기.
하지만.
‘네르하 도련님이 동아리에 들어가면 안 돼. 게다가 거기는!’
레이첼이 이끌고 있는 동아리는 문제가 참 많다는 점이었다.
“잠깐만, 클로이아.”
네르하가 그녀를 제지하며 앞으로 나섰다.
“동아리라면 무슨 동아리를 말씀하시는 거죠?”
“동아리의 이름은 ‘실전 마법 연구회’라고 하지. 내가 지도 교수로 있는 곳이기도 해.”
“호오?”
제법 마음에 드는 이름이다.
사실, 네르하 역시 사전에 동아리에 대한 정보를 알페온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상급생들과의 교류를 통해 실질적으로 인맥을 쌓아가는 곳이기도 하며, 그중 실전 마법 연구회라고 한다면.
‘리브라에서도 유명한 또라이들의 수용소!’
리브라의 동아리는 보통, 계열 마법, 혹은 특화 마법, 그것도 아니면 개인의 취향이 맞는 자들이 모인 것 위주로 돌아간다.
하지만 거기서도 귀족이니 평민이니 하는 갈라치기가 존재하는데, 실전 마법 연구회는 개중에서도 구성원 절반 이상이 평민이며 그 이름값에 걸맞게 마법에 미친 놈들이 모인 집단이라고 한다.
네르하는 그 사실을 모른 체하며 레이첼에게 물었다.
“만약, 내가 동아리에 들어가면 무슨 이득이 있죠?”
“좋은 질문이야.”
레이첼은 의기양양해하며 이렇게 답했다.
“원래 리브라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동아리들이 다 그렇지만 우리 애들은 그중에서도 특히 좀 거친 편에 속하지.”
설득인지 축객령인지 모를 그녀의 설명이 이어졌다.
“하하 호호 하면서 평화롭게 마법을 연구하는 곳은 절대 아니고, 철저하게 실력을 위주로 한 계급제에다가 들어가면 온갖 신고식과 쌈박질을 겪게 될 거야! 아하하하!”
“…….”
옆에 있던 클로이아의 표정이 싸하게 굳어졌다.
‘저걸 지금 설득이라고.’
“괜찮군요.”
“…하는 꼬라지……. 네르하 도련님?!”
생각 일부가 입 밖으로 튀어나온 클로이아가 눈을 부릅뜨며 네르하를 노려보았다.
어째서인지 네르하는 상당히 구미가 당기는 기색이었던 것이다!
“잘 생각해 봐, 클로이아. 아마도 동아리의 구성원은 전부 상급생. 그것도 ‘파괴 마법’ 담당인 레이첼 교수님 휘하일 테니 리브라에서도 손꼽히는 엘리트들이겠지.”
“응, 응! 그렇지!”
“그런 놈들과 합법적으로 치고받을 수 있는 건 오히려 좋은 메리트이고…… 방금 교수님이 자기 입으로 실력에 따른 계급제라고 했잖아?”
오싹!
네르하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맺혔다.
“전부 개박살을 내버리고 내가 동아리를 잡아먹을 수 있다면 리브라 내에서 내 세력을 키울 수 있는 초석이 되겠지.”
“선배?”
클로이아가 대놓고 저런 말을 하는데 괜찮냐는 시선을 보냈지만 오히려 레이첼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클로이아는 짜게 식은 눈으로 레이첼을 노려보았다.
‘내가 저년의 성격을 잠시 잊고 있었구나.’
귀족가의 장녀로 태어났음에도 전장에서 구르는 별종.
계급 따윈 무시하는 철저한 실력 지상주의자인지라 휘하 생도들 사이에서 귀족 대비 평민의 비율이 가장 높은 마법사가 아니던가?
“제법 구미가 당기는군요.”
“그렇지?”
“하지만 저만 들어가는 건 좀 그런데 말이죠.”
“으응?”
레이첼은 네르하가 갑자기 사악한 미소를 짓기 시작하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르하가 레이첼의 눈앞에 손가락 세 개를 들이밀었다.
“세 명. 저 말고도 1학년생 세 명을 더 동아리에 넣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으으응?!”
* * *
레이첼과의 내기는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화력을 위주로 하는 마법사의 전략이 어떤지, 또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다고 본다.
게다가 내기에서 이겼으니 앞으로도 다양한 고수로부터 실전 경험을 쌓을 기회를 얻은 건 무엇보다 좋은 일이었다.
“뭐, 그렇게 됐다.”
네르하는 루시아, 바스톤, 알페온들의 눈앞에서 레이첼과의 전투 사실을 알렸다.
“아니, 잠깐. 형님?”
“응?”
그때, 알페온이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그렇게 된 게 아니잖아요! 지, 지금, 실전 마법 연구회라고 하셨습니까! 거기에 우릴 집어넣는다고요?”
어느새 피부가 창백해지고, 식은땀이 줄줄이 흘러내리고 있다.
“거, 거긴 귀족이라면 치를 떠는 녀석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리브라에선 절대로 평민의 비중이 높지 않다.
통계상으로 신입생이 백여 명이면 그중 평민의 숫자는 약 다섯 명 정도?
애초에 시험 자체가 라데우스와 관련이 없는 일반인들은 도전조차 하지 못하니 지금 들어와 있는 평민들도 어느 정도 마탑과 연관이 있는…… 즉, 평민 중에서는 성골이라 불릴 수 있는 자들이었다.
알페온은 절규했다.
“오히려 그런 녀석들이니 귀족들에 대한 반감이 더 심할 거라고요!”
알페온은 대륙에서도 나름 명망이 높은 리브레히트 공작가의 직계 혈손. 당연히 어떤 반응이 나올지는 굳이 추측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
그때, 왠지 모를 의욕을 불태우던 루시아가 이렇게 말했다.
“알페온 님, 오크를 잡기 위해선 오크 소굴로 들어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적을 잡기 위해선 적진으로 가야 하는 법이죠.”
“아니, 그들은 오크도 아니고 적도 아닙니다만.”
“이곳 상급생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고 싶었는데 좋은 기회로군요. 후후후!”
호승심이 가득한 루시아의 모습에 그나마 상식인의 모습을 유지하던 알페온과 바스톤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레이첼 교수님이 절차를 완료하면 동아리실에 들러서 선배들과 대면하는 시간을 갖게 될 거야. 그때까지 마음의 준비를 해 둬.”
“물론이죠.”
루시아가 호기롭게 외쳤다.
“전부 박살 내주겠습니다.”
“끄응! 루시아 양이 그렇게 원하신다면야.”
아직 루시아에 대한 연심을 버리지 못한 알페온은 울며 겨자 먹기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단련실에서 각자 할 일을 시작하려던 찰나.
“아, 루시아.”
“네?”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지금 말입니까?”
방과 후 모이는 단련실에서 이뤄지는 개인 훈련은 어지간해선 끝날 때까진 건들지 않는 불문율이 있었다.
그런데도 굳이 이런 때에 할 말이라면.
“네 여동생에 대한 이야기다.”
* * *
“그렇군요. 아녜스가…….”
이번 외부 미션에서 벌어진 케프렌과의 인연을 전해 들은 루시아가 말끝을 흐렸다.
그녀가 무덤덤한 모습으로 네르하를 직시했다.
“그렇다면 당신이 제 정체를 알아차렸다는 말과도 같군요.”
불길한 기운을 흩뿌리는 루시아에게 네르하는 시큰둥하게 반문했다.
“이제야?”
“네?”
“예전에 너와 내가 비밀 엄수를 약속할 때에도 어느 정도 추측은 하고 있었지. 확신을 한 건 수여식 이후고 말이야. 새삼스레 뭔.”
“…….”
대번에 허탈하게 변한 루시아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네 동생이 얼마 후면 널 만나러 온다는 거지.”
네르하의 말에 루시아는 살짝 고민에 잠겼다.
하지만 그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녜스가 날 만나러 올 방법이라면.”
‘검의 낙원’에서의 기억을 토대로 할 때, 아녜스가 쓸 만한 방법이라면 단 하나밖에 없었다.
“그건 아마도 교류전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