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중간시험 (2)>
‘내가 원래 이렇게 머리가 좋았나?’
중간시험을 앞두고 서고에 들락거리기 시작한 바스톤은 생각보다 술식이 머릿속으로 쏙쏙 들어오자 적지 않게 당황했다.
‘뇌가 좋아진다고 해서 익히긴 했는데 효과가 정말 생각 이상이다.’
네르하가 강제로 주입한 양의심공.
몸을 단련하면서 마법 술식을 익히고, 어떨 때는 자리에 주저앉아 몇 시간이고 이상한 명상을 해대니 가르침에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제 곧 퇴실 시간입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바스톤은 어느새 주변에 수북하게 쌓인 마법서들을 인지하곤 살짝 혀를 찼다.
모두 그 몇 시간 동안 주석에 첨삭까지 완벽하게 끝마친 마법서들이었다.
“굉장하군.”
아무리 무가에서 태어났어야 했다는 말을 듣는 바스톤이라지만 그 근본은 어디까지나 마법사.
훈련을 통해 이 정도로 집중력과 기억력을 향상시킨다는 게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이 정도 진도라면…… 이론에서도 나름 괜찮은 기대를 걸 수도 있겠어.’
아무리 주제와 내용이 자유라고 할지라도 학사는 1학년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굳이 가문 비전까지 끌어올 필요도 없다.
바하레스 교수의 말에 의하면 기본 수업에서 배워왔던 것을 조합해 창의성을 인정받는다면, 제법 괜찮은 점수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리브라의 시험이 이런 식인 건 어디까지나 5레벨 이전 생도의 개성을 개발시키기 위함이니까.
‘힘내십시오, 주군. 저도 힘내겠습니다.’
바스톤은 네르하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 * *
루시아와 바스톤이 중간시험에 몰두하고 있을 때.
네르하 역시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마나 연공법의 개조에 몰두하고 있었다.
굳이 서고나 도서관이 아니라 자신의 방 안에서인 건, 그만큼 마나 연공법의 가치가 그 어떤 레벨의 술식보다도 높기 때문이었다.
클로이아의 말에 의하면 역대 헤르메스 우승자들 중 약 40%가 마나 연공법을 원했을 정도라나?
특히 최근 백여 년간은 마나 연공법이 헤르메스의 논문으로 나온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 만큼 임팩트 자체는 충분하겠지.’
사실, 마나 연공법으로 헤르메스에 응시한다는 건 집안 뿌리를 뽑아다 복권을 긁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네르하는 그럼에도 마나 연공법을 제출할 생각이었다.
‘단순히 익혀도 어지간한 내공심법보다 충분한 효과를 얻을 수 있을 정도. 즉, 일류라 불리는 수준은 충분히 넘어야만 한다.’
그 정도의 질이 아니라면 헤르메스에서 우승을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넘긴다면 그냥 호구를 인증하는 거나 다름없다.
‘마법만 파고들어선 절대로 대성(大成)할 수 없는 연공법으로 만들어 주지.’
네르하가 개조하는 마나 연공법은 기본적으로 행공(行功)의 형식이 될 것이다.
처음, 네르하가 마나를 쌓을 때 육체 단련을 겸하기 위해 행했던 것과 같은 종류다.
‘마법사들은 의외성과 창의성, 참신함에 많은 가산점을 부여하지. 가부좌를 틀고 연공하는 기존의 연공법과는 다른 형식이라 효율만 보장해 준다면 충분히 가산점이 붙을 거다.’
아마 이 연공법으로 단련을 시작한 이는 초반엔 상당한 마나의 증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한계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왜?
‘연공법과 한 쌍을 이루는 무공 구결은 빼버릴 거거든.’
크크크큭!
연공법의 구결을 적어가던 네르하는 사악하게 웃었다.
대저 명문, 대파라는 이들은 보통, 무공과 내공심법이 호환되도록 한 쌍으로 만든다.
그 이유는 별거 없다.
그냥 그러는 쪽이 경지를 개척하는 데에 있어 효율이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화산파의 이십사수 매화검법에 태청신공이 없다면 그저 화려한 칼질에 불과하듯, 태청신공 역시 이십사수 매화검법이 없으면 그저 반쪽짜리 신공에 불과하다.
아마 라데우스의 마나 연공법 역시 그 연공법으로 최상의 효율을 만들 수 있는 술식 같은 것이 존재할 터.
‘처음엔 이상함을 느끼진 못하겠지만 경지가 올라갈수록 무공을 익히지 않고는 벽을 뚫을 수 없게…….’
그리고 그 사실을 직접 익히지 않는 이상 알아보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조작할 생각이었다.
원래 그렇게 만드는 것은 일문의 대종사급이 아닌 이상 어마어마하게 어려운 작업이지만 그 대종사급인 네르하에겐 충분히 가능한 역량이 있었다.
그렇게 한계에 도달해 이상함을 느낀다면 연공법을 익힌 자의 선택지는 두 개뿐이다.
창시자인 네르하를 찾아오든가, 아니면 잘못됨을 느끼고 그저 절망하든가.
만약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찾아오는 자가 있다면 네르하는 기꺼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줄 용의가 있었다.
‘개중 싹수가 보이는 녀석이 있다면 겸사겸사 포섭도 하고 말이야. 흐흐흐!’
어떻게 보면 사마외도들이나 할 법한 짓거리였지만 네르하에겐 나름 계산이 있었다.
‘아무리 권위가 있는 경연 대회라고는 해도 어차피 나이 제한이 있는 후기지수들의 대회. 그런 대회에 나오는 마나 연공법을 익힐 정도라면 절대 본인의 사정이 좋은 편은 아니겠지.’
장담하건대 어느 정도 수준이 있는 마법 가문이라면 네르하가 출품한 연공법에 대해 신기해할지언정 절대로 익히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변변한 연공법이 없거나 기반이 부실한 하급 귀족들이라면 가능성이 있다.
비록 대마법사들의 작품은 아닐지언정 권위 있는 대회의 우승작이라면 관심 정도는 가질 수 있으니까.
‘먼 훗날이 되겠지만 그래도 제법 기대가 되는군. 어떤 옥석이 걸릴지 말이야.’
네르하는 그런 기대를 하면서 마나 연공법을 완성해 나갔다.
* * *
그렇게 약 한 달의 시간이 무난하게 흘렀다.
중간 평가에 대한 논문 제출 기한이 도달하자 네르하는 망설임 없이 완성한 논문을 학사에 제출했다.
‘과연 어떤 반응이 나올지 기대되는군.’
나름 정성을 들인 녀석이니 꽤나 괜찮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후련하게 논문을 제출하고 나온 네르하에게 외부와의 연락을 담당하는 조교 하나가 다가왔다.
“네르하 라데우스 님, 외부에서 당신에게 온 전언이 있습니다만.”
“전언?”
“본가의 마법사이신 마하타 세스타스 님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연락한 이가 마하타라는 말에 네르하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 시기, 마하타가 연락을 해 왔다는 건 세이라가 드디어 그렌 타운의 일을 마무리하고 위쪽으로 상경했다는 뜻이었으니까.
“바로 가지.”
시험도 막 끝났겠다, 네르하는 모처럼 받은 외출권을 사용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 * *
학장 루트비히에게서 받은 외출권을 사용하자 바로 다음 날이 되자마자 본가에서 무려 비행선을 보내왔다.
그 비행선에서 내린 까무잡잡한 피부의 미소년이 네르하에게 달려와 인사를 올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네르하 도련님!”
“오, 키가 좀 컸군. 사미르.”
이전, 네르하가 처음 이 세계에 와서 만난 소년.
라데우스 가문의 수습 집사이자 이젠 네르하의 직속이 된 사미르였다.
거기에 사미르만이 아니라 호위로 다섯 정도의 전투 마법사가 붙어 있었는데, 외출권을 쓴 시점에서는 리브라의 생도가 아닌 가문의 5남으로서 대접해 주는 모양이었다.
“정식 집사가 되었다며? 축하한다.”
“허억! 감사합니다, 도련님!”
네르하의 축하에 사미르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리브라 입학 당시엔 수습 집사였던 사미르는 지난 반년 사이 정식 집사로 승격해 있었다.
“저택엔 별일 없지?”
비행선에 몸을 실은 네르하는 가벼운 주제로 사미르와 대화의 물꼬를 틀려고 했으나.
“어… 그, 그게…….”
“으응?”
의외로 사미르의 반응은 좀 심각했다.
“사실…….”
사미르는 뭔가 우물쭈물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지난 세월, 저택에서 있었던 변화를 네르하에게 밀고하듯 토해냈다.
“집사장 게드가 어머님의 손에 찍혀 나갔다고?”
“네. 사실, 게드 님…… 아니, 게드는 집사장의 본분을 망각하고 네르하 도련님을 배신했습니다.”
“바멜에게 우리 정보를 팔았으니까. 뭐, 새삼스러운 것도 없군.”
네르하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에 사미르는 크게 놀랐다.
“헉! 아, 알고 계셨습니까?!”
“알고 있었지. 당시엔 좀 더 증거가 명확해지면 손을 쓰려고 했는데 어머님께서 눈치채셨다면 뭐.”
게드는 절대 좋은 결말을 맞이하진 않았을 거다.
“그, 그 사건 이후로 저택의 분위기가 그다지 좋진 않습니다.”
저택의 주인인 네르하가 사라진 뒤, 고용인들을 이끌어야 했을 대가리는 딴마음이나 먹고 있다.
확실히 분위기가 좋을려야 좋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제법인데? 내 저택에 그다지 들르지도 않는 분이 집사장의 반역을 눈치채다니 말이야.’
네르하는 어머니 로젤리아의 빈틈없는 일 처리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다르게 생각하면 그녀가 아직 네르하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 딱히 기분이 나쁜 일은 아니었다.
네르하는 화제를 본론으로 돌렸다.
“저택에 몇 명이나 와 있지?”
“도련님을 찾아오신 손님은 두 분입니다.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의 소녀와 외팔이인 중년 사내죠.”
“세이라와 쿨리크가 온 모양이로군.”
“네. 분명 그런 이름이었습니다!”
“좋아. 좋아.”
현재, 네르하의 중간 목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리브라를 졸업할 때까지 가능한 전성기의 힘을 되찾는 것.
또 하나는 그런 자신을 받쳐 줄 조직의 구성이었다.
네르하가 다시 사미르에게 물었다.
“부지 계약은?”
“새 집사장이신 다론 님께서 지시하신 당일에 끝내 두었습니다!”
이전, 연락이 왔을 당시 네르하가 마하타를 통해 사미르에게 전달한 지시 사항이 있었다.
그건 바로 주도 베리타스에서 세이라가 만들 정보조직, ‘미네르바’의 중심이 될 본거지였다.
“마님께서 적극적으로 도와주셔서 쉽게 끝낼 수 있었습니다.”
“흠? 어머님이?”
하긴, 저택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은 로젤리아에게 보고가 가는 만큼 이것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어차피 미리 손을 내밀 생각이긴 했는데, 어머님한텐 죄송하게 되었군.’
로젤리아는 분명 그 정보조직이 네르하가 아닌 네이하를 위한 것이라 착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 조직은 오로지 내 손발이 되어 움직일 겁니다.’
로젤리아가 그 사실을 눈치챌 때면 네르하는 리브라를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패권에 도전하기 시작할 때일 것이다.
* * *
“주인님을 뵙습니다.”
오랜만에 저택에 돌아오자 세이라가 다소곳하게 인사를 올렸다.
네르하는 그런 세이라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일은 잘 끝냈나?”
“네. 그렌 타운의 일은 더 이상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암시장의 환경을 뜯어고치고 주인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개선해 두었으니까요.”
“시장은 많이 괴롭히진 않았고?”
“네, 에.”
왜 뜸을 들이고 있니?
딱히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세이라는 고개를 돌리며 장난질이 걸린 어린아이의 모습을 보였다.
뭐, 네르하 역시 반쯤은 장난으로 말한 것이니 켈릭스가 어떻게 되든 일 처리만 잘했다면 딱히 상관은 없었다.
“몇 명이나 데리고 왔지?”
“크림슨에서 실무 일을 맡았던 서른 명 정도만 데려왔습니다.”
사실, 크림슨 구성원 대부분이 빈민가 하층민들이라는 걸 고려하면 다 데려와도 처치 곤란할 뿐이었다.
네르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좋아. 그럼 앞으로 너희가 쓸 본거지로 이동해 볼까?”
그 말에 세이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마 깜짝 놀랄 거다.
사미르의 말에 따르면 어머니도 이번에 꽤 무리하신 모양이라고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