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중간시험 (3)>
마도 도시이자 라데우스의 주도(主都)인 베리타스 시는 대륙 전체를 통틀어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규모를 자랑한다.
이에 비할 만한 규모라고는 제국의 수도인 바하마르나 케프렌의 주도인 로엘 소드 정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규모로 봤을 때만 그렇고.
문명의 첨단을 달리는 베리타스 시는 라데우스의 주도답게 그 발전도가 타 도시보다 한 세기는 앞서 있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그 말인즉, 땅값 비싸기로는 대륙에서 제일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베리타스 시는 그런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곳답게 도시 전체가 총 30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1번부터 5번 구역까지는 라데우스 가문 소속만 출입할 수 있는 속칭 ‘로열 에어리어’로, 일종의 성지와도 같은 취급을 받는 곳이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부동산 거래가 가능한 6번 구역부터 10번 구역은 ‘프라임 에어리어’라 불리며 각 대륙의 고위 귀족이나 대상인들이 자리를 잡는 곳이었다.
“허, 허억……!”
그리고 네르하와 일행들이 도달한 곳은 그 프라임 에어리어에 속하는 7번 구역.
그곳에서도 준마탑 수준인 8층 타워와 인근 부지를 통째로 사들였다는 걸 알자 세이라는 기절할 것처럼 놀랐다.
“여기가 앞으로 너희가 자리를 잡을 장소다.”
담담하게 말하긴 했지만 그 규모와 웅장함에 네르하 역시 내심 놀라고 있었다.
차라리 단지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거대한 규모였다.
“이 정도면 못 해도 천여 명은 수용 가능할 것 같습니다만?”
“그 정도 규모는 되어야지.”
정보 조직으로 바깥에서 굴리는 이들까지 포함하면 최소 수천 단위의 인원이 될 것이다.
네르하가 세이라를 직시했다.
“원래 조직을 꾸린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건 안다. 네가 빈민가에서 그 정도 규모로 키우기까진 꽤나 시간이 걸렸겠지.”
“네.”
세이라는 살짝 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실제로 그녀가 맨손으로 시작해 크림슨을 그 정도까지 키우기엔 5년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
“하지만 난 네게 그만한 시간을 줄 수는 없어. 못해도 2년 안에 다른 곳과 경쟁이 가능할 정도로 규모를 키워야만 한다.”
“2, 2년.”
그녀의 어깨가 긴장으로 바짝 당겨졌다.
뱀파이어의 창백한 피부 역시 더더욱 하얗게 변했으니 그만큼 그녀가 받는 부담감이 어마어마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받아.”
“이건?”
“네 시간과 부담을 줄여 줄 마법.”
세이라에겐 9레벨 대이적 마법보다도 훨씬 놀라운 마법일 것이다.
세이라는 네르하에게서 서류 하나를 무심코 받아 들었다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허, 허어어억!”
그녀의 손에 들린 건 라데우스 직할 은행에서 발행한 네르하의 소유하에 있는 현금 및 채권 등을 정리한 자산 목록이었다.
“여, 영(0)이 대체 몇 개나……!”
아무리 그렌 타운의 뒷골목에서 돈 좀 만지던 그녀라도 라데우스의 본격적인 돈지랄에 비하면 태양 앞의 반딧불에 불과했다.
동공 지진을 일으키는 그녀의 모습이 썩 재밌어 보인다.
“적어도 자금 면에서 모자랄 일은 없을 거다.”
“주, 주인님……!”
세이라는 감격했다.
세상의 모든 일은 대부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면 그 돈이 부족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라.
이것이 그녀가 평소 가지고 있는 신념이었다.
그리고 그 신념에 의거하면 지금 눈앞에 있는 액수라면 신의 기적조차 재현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바, 반드시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정보망을 신설하면 가장 먼저 북방 쪽의 일을 수집하는 데서부터 시작해. 지금은 그쪽이 가장 급하니까.”
클로이아의 걱정을 해결해 줘야 하기에 그렇다.
“아, 주인님, 그 전에.”
세이라는 조용히 네르하에게 다가와 텔레파시를 날렸다.
―이 액수라면 주인님께서 원하시는 규모의 정보망을 신설하는 건 간단할 것입니다. 다만.
―다만?
세이라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윽고 살짝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국가 규모의 정보망을 구축하려면 초기 단계에서 마법사 인력의 수급이 필수적입니다. 물론 이곳, 베리타스라면 아주 쉽게 필요한 수만큼 고용할 수 있습니다만…….
네르하는 세이라가 무슨 염려를 하는지 알아차렸다.
―신용의 문제로군.
―네. 아무래도 이곳은 ‘가문’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곳이니까요.
세이라는 기특하게도 네르하의 처지와 입장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전 대륙에서 마법사 인력이 가장 많이 몰려 있는 이곳, 주도 베리타스에서 마법사를 구하는 건 무척이나 쉽다.
하지만 그렇게 구한 마법사가 타 형제들의 간자이거나 가문의 입김이 들어간 자일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가 없었다.
네르하는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세이라는 내가 가문과는 별개의 조직을 원한다는 걸 알고 있어. 그러니 이런 말을 한 것이겠지.’
미네르바가 가문에 특정당하는 건 상관없다. 어차피 비밀결사도 아니고 정식으로 인가를 내는 길드 형식의 조직이 될 것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조직을 구성하는 초기 단계에서 간자가 섞이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네르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세이라에게 말했다.
“이 부분은 내가 어떻게든 해 주지. 일단은 그것을 제외한 다른 일부터 시작하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엔 답이 나오지 않았지만 그렇게 까마득하게 답이 없을 만한 문제는 아니었다.
‘흐음, 어쩌면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연락망을 구축하는 마법사의 수준이 그렇게까지 높을 필요는 없다.
요는 가문의 다른 직계들과 얽히지 않은 게 확실한, 신변이 입증된 마법사여야 한다는 것.
그런데 지금 네르하의 머릿속엔 그 조건에 완벽히 부합하는 곳이 하나 존재했다.
‘실전 마법 연구회.’
* * *
중간시험이 끝나고 다시금 리브라엔 평화가 찾아왔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 생도들에게나 그렇고, 제출물을 검토하고 평가해야 하는 교수진들에겐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끄응! 베르만 교수, 당신 생각은 어떻소?”
그 말에 깐깐해 보이는 베르만이라는 교수가 답했다.
“하급 이론을 괜히 복잡하게 꼬아 놨을 뿐 그다지 독창성은 느껴지지 않는군요. 이 정도 점수가 좋겠습니다.”
“학장님의 판단과 다르지 않아야 할 텐데.”
리브라의 이론 시험은 주제 자유, 내용 자유, 분량 자유를 표방하고 있는 만큼 점수 매기기도 그만큼 상당히 까다롭다.
이론 제출이 끝나면 1차적으로 조교 및 조교수들이 이론을 검토해 계통을 나누고, 마법계에 일반적으로 분류된 42개의 계통에 따라 채점을 담당하는 해당 계열의 교수진들이 배정된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다.
교수진들이 1차적으로 채점을 끝내면 그 점수와 이론을 학장 루트비히와 부학장 네슬렉이 최종적으로 검토하여 이론에 대한 점수를 확정하는 식이었다.
그렇기에 리브라의 이론 시험은 생도만이 아니라 교수들에게도 그 안목을 시험하는 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만약 교수진에서 고평가를 했는데 학장 선에서 점수가 깎이면 그것만큼 난감한 일도 없었다.
“한 번 더 확인해 봅시다.”
바람 속성 계열을 담당하던 한 교수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말했다.
“작년 시험에서 채점 문제로 감봉을 먹었던 헬렌 교수 꼴이 될 수는 없으니까요.”
“그, 그러시죠.”
비슷한 계열의 다른 교수들 역시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작년, 수준 낮은 이론에 고평가를 하고 반대로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할 이론엔 낮은 점수를 때렸던 헬렌이란 교수가 있었다.
당연히 그 교수는 학장 루트비히의 눈에 걸려 엄청난 질책을 받았고, 교수직에서 쫓겨날 뻔하기도 했다.
다행히 주변의 만류로 반년의 감봉으로 끝나긴 했지만 그 사건은 다른 교수들의 해이해진 정신을 크게 깨우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리브라의 학사엔 불빛이 꺼지질 않는 나날이 수일간 이어졌고.
“흐흠, 작년에 난리를 좀 쳤더니 이번엔 제법 괜찮군.”
학장 루트비히 라데우스는 흡족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올라온 이론들을 바라보았다.
“전격 마법과 연금술을 결합한 실생활 적용 방안이라……. 조금 범위가 넓지만 이 정도면 뭐……. 끌끌끌!”
‘소니아 이즈넨’이라는 이름이 적힌 논문을 바라보던 루트비히가 흡족하게 통과 도장을 찍었다.
“명문 연금술사 가문 이즈넨. 딱히 두각을 보이는 모습이 없었는데 썩어도 이론 싸움에선 넘어설 자가 없군.”
고작 1학년의 이론이었지만 그 난이도와 깊이는 삼사 학년 상위권 생도들과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루트비히는 소니아의 논문에 98점을 주고 조용히 한구석에 밀어 넣었다.
“역시 이번 기수에는 인재가 많아. 그래도 이걸 넘어설 녀석이 과연 나올런지.”
90점대면 어지간해선 학년 수석을 차지할 수 있는 점수였다.
어지간한 반전이 없다면 말이다.
“흐음?”
다음 이론의 첫 장에 적힌 문구를 본 순간, 루트비히의 눈가가 살짝 가늘어졌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채점 불가.]
“채점 불가라고?”
생도들의 모든 이론은 거의 무조건적으로 1차적으로 교수들의 채점을 받게 되어 있다.
하지만 이렇게 몇 년 주기로 채점 불가 판정을 받고 자신에게 올라오는 이론이 존재하긴 했는데, 이런 경우는 오직 세 가지뿐이었다.
너무나 형편없어 점수를 매기지 못할 수준이거나 이곳, 리브라에서도 평가를 매기기 힘든 특수 계통일 경우. 마지막으로 너무 수준이 높고 복잡해 교수진 수준에서 평가를 내리기가 어렵다고 판단되는 경우.
셋 모두 평범한 경우는 아닌지라 루트비히는 제법 흥미로운 표정으로 논문의 저자가 누구인지를 확인했다.
“네르하 라데우스?”
눈앞에 아주 익숙한 이름이 나와 있자 루트비히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논문의 정식 명칭을 확인한 순간…….
“마, 마나 연공법이라고!”
루트비히의 경악한 목소리가 학장실을 넘어 바깥까지 터져 버리기 시작했다.
* * *
“네르하 라데우스, 호출이다. 지금 당장 학장실로 가도록.”
‘역시.’
리브라에 돌아오자마자 사감 에드발이 루트비히의 호출을 알렸다.
“혹시 너, 바깥에서 뭔가 사고 치고 온 거냐?”
“……?”
“학장님이…… 화가 머리끝까지 나셨더라. 보통 열 받으신 게 아니던데.”
“그렇습니까.”
네르하는 쓴웃음을 지었다. 루트비히가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었다.
‘뭐, 대충 예상한 반응이긴 하군.’
그 표정이 경악으로 뒤바뀌는 걸 지켜보는 것도 소소한 낙일 것이다.
호출을 받은 네르하는 그대로 학장실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학장실에 도달한 네르하가 닫혀 있는 문 너머를 향해 나지막하게 말했다.
“네르하 라데우스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들어오너라.”
대번에 안쪽에서 화를 눌러 담고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르셨습니까, 학장님?”
“그래.”
전에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온도 차.
네르하는 그걸 인지하면서도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로 절 찾으셨는지?”
“무슨 일? 지금, 무슨 일이라고 했느냐?”
쾅!
크게 책상을 내려친 루트비히의 입에서 통탄해하는 분노가 터져나왔다.
“라데우스의 후계 자격을 가진 네 녀석이 감히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부정을 저지른 것에 대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