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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88화 (88/237)

88화

<지고의 경지 (1)>

“책임이라.”

시저의 얼굴이 살짝 기우뚱거렸다.

“내가 왜?”

그 무책임한 말에 루트비히는 자신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이딴 놈을 30년지기라고!

“역시나.”

“아니, 뭐…… 솔직히 네놈이 걱정할 만한 일은 딱히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데?”

시저의 말은 루트비히의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이지?”

“네가 그놈을 괴물이라고 평가하듯, 나 역시도 그렇거든.”

“……!”

“솔직히 마법적인 부분에서 미숙함을 드러낼 뿐 전사라는 부분에선 놈은 이미 완성형에 도달해 있어.”

철저한 자기 확신, 그리고 그 확신에 신뢰를 더해주는 실력.

“마치 지고의 경지에 이른 무인이 전생이라는 걸 했다면 딱 그놈 같은 느낌이겠군. 뭐, 그런 일은 있을 리 만무하지만.”

네르하가 주변에 있었다면 대번에 식은땀을 흘렸을 가공할 직감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뭔데?”

“굳이 내 존재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뒤에 이어진 시저의 말에 루트비히는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내가 아니더라도 앞으로 몇 년이 지나면 놈은 괴물이 되어 라데우스 가문을 뒤흔들 거니까.”

“……!”

루트비히 역시 마음속에선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는 절대 내놓지 않았던 생각이었다.

“그런 면에서 오히려 네놈도 그 녀석을 밀어보는 건 어때? 말년이 아주 재밌어질걸?”

“나는 원칙적으로는 절대 중립이다. 나만 아니라 리브라에 속한 이들 또한 마찬가지지.”

“원칙은 원칙일 뿐이지.”

시저는 피식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 며칠 멀리서 제자 놈을 지켜보고 있자니 교수 중 몇 놈이 제자 놈을 밀고 있는 게 보이던데?”

“끄응!”

“불과 얼음이라……. 재밌는 조합이더구만.”

애초에 그럴 목적으로 이곳에 온 클로이아는 둘째 치더라도 지금껏 라데우스 본가의 권력 싸움에 관심이 없었던 레이첼이 움직인 것은 루트비히조차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확실히 원칙은 어디까지나 원칙일 뿐.

리브라의 교수들 중 상당수가 각자 본가의 파벌에 줄을 대고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시끄럽고. 명예 조교수 자리를 줄 거니까 사고 치지나 마라.”

“말 돌리는 거냐?”

“곧 검의 낙원과의 교류전도 있어서 신경 써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냐. 너한테 계속 신경 쓸 수는 없다.”

교류전이란 말에 시저는 살짝 콧김을 내뿜었다.

“흠, 교류전? ‘대항전’도 아닌데 뭘 그렇게 신경을 쓰냐?”

“상대가 검의 낙원이니까. 리브라의 학장이란 자리는 네놈처럼 속 편하게 있을 수는 없단다.”

그 말에 대번에 시저의 표정에 비웃음이 어렸다.

“크크큭, 어차피 승률도 별로 좋지 않을 텐데 뭘.”

“닥쳐라.”

“기억하기로는 아마 30% 정도였나? 아무리 진짜배기들은 숨긴다 해도 이 정도 승률은 좀 너무하지.”

“…….”

루트비히는 순간, 저놈을 죽일까 말까 진심으로 고민했다.

두 교육기관 사이에서 열리는 교류전에서 리브라는 항상 검의 낙원에게 단 한 번도 절반 이상의 승률을 올린 적이 없었다.

이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교류전에서 열리는 대결은 어디까지나 일대일.

동급의 실력이면 마법사는 검사에게 일대일 대결에서 이길 수 없다.

이 문구는 유구한 대륙의 역사에서 통념처럼 내려져 온 상식이었다.

게다가 아직 완성형에 이르지 않은 미숙한 수준일 경우엔 그 상식이 진리와도 같이 적용되곤 했다.

“마법 하나 캐스팅하는 데 1분이 넘게 걸리는데 그 정도면 수습 기사라도 대번에 상대의 목을 딸 수 있는 시간이지.”

물론 무영창 마법을 제대로 익히는 5레벨 이후에는 사정이 크게 달라진다.

하지만 교류전에 내보내는 이삼 학년의 생도가 5레벨에 이르렀다는 건 거의 학년의 에이스라는 소리였고, 그건 즉 반드시 숨겨야 하는 전력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너희와 검의 낙원과의 대결은 언제나 같은 결말…….”

순간, 시저는 자신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모습이 지나가자 말끝을 흐렸다.

“같은 결말……이 아닐 수도 있겠는데?”

“무슨 소리냐?”

5레벨에 이르지도 못했는데 저레벨 마법을 자유자재로 쓰며 한순간이나마 자신과 비등한 대결을 펼쳤던 한 소년.

“에이스는 아니지? 분명 그놈은 5레벨이 아니니까.”

“설마?”

그제야 루트비히도 시저가 누구를 말하는지 눈치챘다.

“네르하를 교류전에 내보내라는 소리냐?”

“맞아. 아마 매~우 재미있는 결과가 나올 것 같은데?”

루트비히의 인상이 구겨졌다.

“그 녀석은 직계다. 직계가 교류전에 출전하는 경우는 없었어.”

“이번에 생기는 것도 재밌겠지.”

씨익!

시저가 악동과도 같은 웃음을 흘렸다.

“이번 교류전에 검의 낙원에서도 케프렌의 직계가 올 예정이거든.”

“……! 너, 뭔가를 아는 거냐?”

설사 루트비히라도 흑마법사에 대한 일이 아니라면 그렌 타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한 내막을 알진 못한다.

하지만 케프렌에도 어느 정도 발을 걸치고 있는 시저는 어느 정도 앞으로 벌어질 일을 알고 있었다.

“하여튼 내 말 무시하지 말고 기억해 두는 게 좋을 거다. 네게 그 정도 권한은 있잖아?”

“흐음.”

물론 당연히 있다.

본가에서 뭐라고 한 소리 듣겠지만 루트비히는 라데우스의 최고 원로 중 하나.

어지간한 불문율이나 규칙 정도 바꾸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럼 간다. 나중에 보자고.”

시저가 사라지는 와중에도 루트비히의 머릿속은 팽팽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정말로 케프렌의 직계가 교류전에 포함되었다면?’

굳이 모험을 하지 않아도 이쪽에서 명분이 선다.

‘네르하, 네르하라…….’

* * *

며칠이 지나 리브라는 온전히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외부 미션에서 일어난 희생자에 대한 슬픔도.

중간시험에 상위권에 들겠다는 뜨거운 열기도 시간이 지나면서 완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던 와중, 중간시험에 대한 결과가 발표되었다.

수석 – 네르하 라데우스

2위 – 소니아 이즈넨

3위 – 아그라스 하르바인

4위 – 배커 라데우스

5위 – 제크론 라데우스

6위 – 루시아 스플릿하트

예상대로 중간시험의 1등은 네르하가 차지하게 되었다.

“상위권에 익숙한 이름이 많이 보이는군.”

소니아 이즈넨은 이전, 영약 재료를 수급할 당시 같은 조원으로 묶인 적이 있었고 아그라스 역시 수업이 시작되면 맨 앞줄에서 열정적으로 교수의 강의를 듣는 범생이의 이름이었다.

네르하는 네 번째에 배커의 이름이 적힌 것을 보고 살짝 혀를 찼다.

“허, 배커가 4위? 결과가 잘못된 거 아닌가?”

“나, 네 뒤에 있다, 새끼야.”

뒤에서 이를 가는 배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짝 찔끔한 네르하는 천연덕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아, 있었냐?”

“이 새끼가…….”

이를 갈던 배커가 씹어뱉듯이 말을 이었다.

“나도 명색이 라데우스다. 아무리 이론 시험이라도 당연히 최상위권이 아니면 면목이 안 서.”

“아니, 뭐 누가 뭐라고 했냐?”

“네가 뭐라고 했잖아! 네가!”

배커는 네르하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는 ‘기말시험에서 두고 보자!’라는 말을 남기곤 어딘가로 사라졌다.

단짝 친구인 제크론 역시 코웃음을 치더니 배커의 뒤를 따랐다.

그 모습을 살짝 떨떠름하게 지켜보던 네르하에게 옆에서 책망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뒷말은 좋지 않습니다, 네르하 도련님.”

목소리의 주인공은 루시아였다.

“난 순수하게 놀라움을 표현했을 뿐인데…….”

“그래도 험담은 맞잖아요.”

“그렇긴 하지.”

마치 선생님 같은 루시아의 모습에 네르하는 다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야, 축하한다, 바스톤. 11위면 그래도 좋은 결과 아니냐?”

그러자 루시아의 옆에 있던 바스톤이 은은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주군. 중상위권을 목표로 했었는데 생각보다 결과가 잘 나왔군요.”

입학 극초반 이론 테스트에서 바스톤은 고작해야 중하위권에 머물러 있었을 뿐이었다.

“주군께서 가르쳐 주신 정신 수양법 덕분입니다. 정말 많은 도움이 되더군요.”

“끄응! 저도 배우고 싶었는데 아쉽군요.”

옆에서 알페온이 아쉽다는 듯 툴툴거렸다.

알페온은 15위. 아직 체력이 기준점에 도달하지 못해 양의심공을 배우진 못했지만 그래도 충분히 상위권이라 할 수 있는 성적이었다.

바스톤의 입에서 정신 수양법이라는 말이 나오자 대번에 주변에서 성적표를 보던 이들 몇몇이 이쪽을 힐끔거렸다.

네르하는 씨익 웃으면서 그런 이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내 가르침을 받고 싶다면 얼마든지 단련실로 와라. 난 내 가르침을 베풀 의사가 충분하니까.”

“……!”

“단, 고생은 좀 많이 해야 할 거야. 그럴 각오를 다진 녀석만 오라고.”

대번에 많은 이들의 고개가 반대로 돌아갔다.

그들은 네르하와 그 일당이 단련실에서 얼마나 몸을 굴리는지 아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그런 주변의 모습에 네르하는 살짝 혀를 찼다.

“쯧, 근성 없는 녀석들 같으니.”

아무래도 원하는 인재들은 쉽게 손에 넣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도련님의 괴롭힘을 감당할 수 있는 인재가 흔하진 않죠.”

옆에서 작게 중얼거린 루시아의 한마디를 듣자 다른 두 사람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 * *

중간 평가에 대한 결과가 나왔어도 네르하의 단련은 멈추지 않았다.

다만 이전과는 다르게 육체 단련보다는 명상을 위주로 내면세계의 완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는데.

당연히 그 목적은 고유 계통의 각성, 5레벨에 이르기 위함이었다.

네르하는 지금, 리브라 바깥의 어느 봉우리.

인적이 드문 곳에서 정좌 중이었다.

‘내 마법적 지식은 충분히 5레벨에 이르러 있다.’

이건 클로이아는 물론 레이첼 루비아이에게서도 충분히 확인했다.

비록 네르하가 마법에 입문한 시간이 타인에 비하면 그리 길진 않는다고 해도 뛰어난 오성과 지속적인 체질 개선으로 인한 상단전의 개발.

무엇보다 ‘네르하’의 업을 이으면서 녀석이 가지고 있던 기억과 마법 지식을 빠르게 녹여 내어 체화한 덕이 컸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왜 내가 5레벨에 이르지 못했는가?’

이것에 대한 답은 최근 들어 윤곽을 잡을 수 있었다.

‘어느 것이 내게 있어 ‘최선’인지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거야.’

고유 계통.

마법사에게 있어 껍질을 벗어던지고 나비로 변하는 과정이라고는 하나 엄밀히 말하면 다른 가능성을 냉정히 버리고 하나의 길에 집중하는 것이기도 했다.

아직 어느 계통이 네르하 본인에게 확실하게 맞는지 모르는 이상 쉽사리 자신의 손에 익은 마법을 고유 계통으로 삼을 수는 없었다.

‘고유 계통을 개화하는 건 쉬워. 그 깨달음의 정도는 절대 어려운 게 아니야.’

다른 일반적은 마법사는 평생을 걸어야 가능한 깨달음이었지만 이미 절대적인 무공의 경지를 개척하고 반쯤 신의 반열에 발을 내밀었던 네르하에게 계통의 개화는 그다지 어려운 게 아니었다.

이미 무학적으로도 수많은 깨달음을 겪으며 여러 종류의 무학을 하나의 유파로 집대성하며 상위의 경지를 개척했던 경험이 있었으니까.

문제는 어떤 계통을 개화할 것인지에 대해 선택 장애가 걸린 것뿐이었다.

‘심볼 스펠(Symbol spell) 이라.’

절대 다수의 마법사들은 5레벨에 이르러 계통을 완성하면 자기 자신을 대표하는 ‘심볼 스펠’이란 대표 마법을 얻게 된다고 한다.

그 심볼 스펠은 단순히 단발형일 수도 있고, 아니면 유지형이나 결계류일 수도 있다.

대표적으로 네르하가 수여식에서 싸웠던 흑마법사 주단의 ‘검은 날개’처럼 말이다.

‘지나치게 눈높이가 높다 보니 생기는 부작용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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