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지고의 경지 (2)>
어느 계통을 골라야 최적, 최고의 효율을 뽑아낼 수 있는지 확신이 없었기에 생기는 문제다.
‘이건 고민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독이 된다.’
장고 끝에 악수라.
이 고민의 끝은 개화가 아닌 역행. 즉 주화입마의 가능성이 다분하다.
‘더 이상 판단을 미룰 수는 없어.’
이미 레이첼의 주선으로 네르하는 리브라 내의 많은 교수들과 대면했다.
그리고 그들의 계통 및 실력을 다양하게 겪어 보면서 어느 정도 방향성 역시 가닥을 잡은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네르하는 어느 고유 계통을 선택할지를 역순으로 선택하기로 결정했다.
‘내가 원하는 최종 완성형을 떠올리고, 그것을 역으로 풀어 내려온다.’
그럼 네르하가 원하는 최종 완성형이란 무엇인가?
‘원하는 경지,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는 오직 하나뿐.’
천마와 일대일이 가능한 인생 최후에 이르렀던 그 경지.
그것은 신화경(神化境)이라 불릴 수도 있고, 혹은 다른 무언가로 부를 수도 있다.
정확한 명칭은 무림사에 내려온 적이 없었으니 딱히 뭐라 부르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그 경지를 특정하고, 어떻게 완성시킬 것인지를 설계해 나가는 것.
‘역으로 해체해 나간다.’
이미 한번 발을 내디뎌 보았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만류귀종이라 했다. 모든 흐름은 하나로 통한다고는 하지만 그 말을 반대로 한다면 만류(萬流), 즉 무한에 가까운 선택지를 올바르게 풀어야만 하는 과업에 가까운 일을 해내야만 한다.
가부좌를 튼 네르하의 몸이 천천히 허공에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네르하의 주변으로 기묘한 꽃잎 형태의 마법진이 떠올랐다.
본래 이 꽃잎은 삼화취정을 상징하는 것이었으나 마법과 결합됨에 따라 네르하 본인조차 인지하지 못한 기이한 형태로 변하고 말았다.
‘내 본질은 무인이다. 내가 마법을 배우기로 한 이유는 어디까지나 천마를 꺾을 수 있는 그 경지를 다시 개척하는 것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일 뿐.’
과거, ‘신무조’는 일대일로 천마를 꺾지 못했다.
신무조를 포함한 십대고수 중 여덟 명과 긁어모은 무림맹의 정예 수백이 이루어낸 공동의 성과였다.
물론 당시 천마 역시 천마신교 호법원의 고수를 백여 명 이상 이끌고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다른 십대고수들이 천마의 진을 빼지 못했다면 신무조는 절대로 천마의 심장에 주먹을 박아 넣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문(門)을 다시 한번 뚫어야 한다.’
소위 말하는 상단전의 생사현관조차도 넘어서 인간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심상의 끝.
생의 마지막 순간에 닿았던, 생명체에게 허락된 진정한 신의 문턱.
그 문턱을 완벽하게 넘을 수 있게 정기신의 완성형을 구현화한다!
고오오오!
네르하의 의식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무의식의 세계에서 네르하는 자신이 궁극이라 생각한 형태를 끊임없이 궁구하며 설계도를 그려나갔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서늘하군.”
네르하는 피부를 꿰뚫는 밤바람에 천천히 눈을 떴다.
아직 초가을이라고는 하나 이곳은 어디까지나 고산지대의 설산 한가운데.
하지만 한서불침을 이룬 네르하의 피부가 서늘함을 느낀다는 건 명상을 시작하고 나서 고작 한두 시간이 지난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거참 괴물은 괴물이구나.”
“……!”
네르하는 귓가에 들려오는 혀를 차는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어느새 기다란 곰방대로 연초를 태우고 있는 시저 루드벡의 모습이 보였다.
“시저 할아범?”
“이젠 스승님이지. 빼도 박도 못하게 말이야.”
클클 웃은 시저는 곰방대를 문 채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굉장하더구나. 내, 평생 남의 연공을 보면서 그만큼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은 본 적이 없다.”
“훔쳐보신 겁니까?”
눈을 흘기며 분노를 내비치는 모습에 시저는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나한테 감사하단 말은 못 할망정 그런 눈으로 어딜 스승님을 꼬나봐?”
“감사하다니, 으음?!”
네르하는 그 순간, 주변에서 생생한 피 냄새가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피 냄새로 끝이 아니었다.
동물이라기엔 지나치게 동떨어진 모습을 한 무언가의 사체가 곳곳에 널려 있었다.
“몬스터?”
맹수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그 덩치와 흉포성이 차원을 달리하는 이세계의 괴물들.
그런 몬스터의 사체가 주변에 엄청나게 널려 있었던 것이었다.
“네놈의 연공이 일으킨 마나 폭풍에 주변에 잠들어 있던 놈들이 죄다 깨어나서 몰려오더구나.”
“끄응!”
물론 마나 폭풍을 뚫고 네르하를 습격할 깜냥이 있을 놈은 없었겠지만, 그렇다고 위협이 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뭐, 문제는 몬스터가 아니지. 네가 일으킨 마나 폭풍이 너무나 강렬해서 잘못했다간 리브라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게 크지.”
아직 본격적으로 실력을 드러낼 생각이 없어서 일부러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아무래도 이 정도 거리로는 모자란 모양이었다.
네르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시저에게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신세를 졌습니다, 스승님.”
“다시 만나는구나, 제자야.”
시저의 유쾌한 미소가 네르하에게 향했다.
* * *
리브라 내부에서 만나게 되면 스승으로 모시겠다는 약속.
시저는 그것을 지켰고, 무슨 재주를 부렸는지 가명으로 조교수 직위까지 가지고 정식으로 리브라에 채용되기까지 했다.
물론 시저가 정체를 드러내면 정교수도 문제가 아니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5레벨에 이른 듯하구나.”
“네. 작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진정한 마법의 입문이라 불리는 5레벨, 고유 계통.
네르하는 비로소 그 단계를 밟게 된 것이었다.
생각보다 공손한 네르하의 태도에 시저는 흡족하게 웃었다.
“허허, 많이 온순해졌구만.”
“이곳에 오시면 스승으로 모시기로 했으니까요.”
“기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구나. 가능하면 내 가르침으로 경지를 뚫었으면 좋았을 텐데. 뭐, 좋아. 지금부터라도 늦진 않았지.”
“아쉬움은 지금부터라도 채우시면 되겠지요. 전 가르침을 받들 준비가 되었습니다.”
“하하하하! 이놈, 말을 상당히 예쁘게 하는구나! 이전의 그 싸가지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걸?”
군사부일체.
무림의 세계에서 살아온 네르하에겐 철칙이나 다름없는 말이기도 했다.
이왕 사부로 모시게 된 거, 확실하고 깍듯하게 모시는 것이 네르하의 성격이었다.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만.”
“말해 봐라.”
“왜 늦지 않은 건지 이유를 알 수 있습니까? 전 스승의 학파를 접하지 않고 5레벨에 이르렀습니다만.”
네르하의 의문은 당연했다.
5레벨은 마법사에게 있어 가장 큰 통과의례.
당연히 대륙에 존재하는 절대다수의 학파들이 후학을 육성함에 있어 가진 첫 번째 과업은, 제자들을 어떻게 5레벨까지 끌어올리냐에 대한 것이었다.
마법의 역사가 역사이니만큼, 그들은 각각의 다양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비전으로 끌어올린 5레벨은 수준이 올라갈수록 마법 학파가 가진 고유의 색을 띠기 마련이었다.
그건 아마도 시저의 학파 역시 마찬가지.
이미 자신만의 계통을 이뤄 5레벨에 이른 네르하가 과연 다른 학파의 가르침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건 당연했다.
그 의문에 시저가 호탕하게 대답했다.
“물론 우리 학파 역시 빠르게 5레벨에 이르는 비전을 가지고 있지! 속도로 따지면 라데우스보다도 빠를 거야! 하하하하!”
“그런데 왜?”
시저의 표정에 순식간에 그늘이 졌다.
“문제는 그 비전을 소화하기 전에 다 도망가서 문제지…….”
“…….”
그러고 보니 시저의 학파는 일반적인 계파와는 다르게 무식할 정도의 육체 단련을 시킨다고 했었나?
“우리 학파는 어떤 고유 계통을 각성하든 딱히 상관이 없다. 술식의 ‘고유성’을 중요시하는 일반적인 학파와는 달리, 우리는 고유성이고 나발이고 마법의 정점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거든.”
시저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네르하를 훑어보았다.
“까놓고 말하면 네 녀석이 각성한 고유 계통이 뭔지는 몰라도 일반적인 원소 특화 계열은 아닐 거다.”
“맞습니다.”
네르하는 선선히 수긍했다.
자기 자신을 관조하면서 네르하는 클로이아나 레이첼처럼 마법사 하면 떠오르는 일반적인 포격형인 자신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오히려 아크의 분대장이었던 엘림이 더 이상적이었지.’
전격 계열을 발전시켜 근, 중거리 형태로 싸우는 엘림의 스타일이 오히려 네르하가 원하는 형태에 가까웠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보여 주지.”
시저는 네르하에게서 약간 거리를 벌렸다.
“우리 벨카서스 학파가 어떤 길을 추구하는지를 말이다.”
쿠구구구!
시저가 본격적으로 마력 폭풍을 일으키자 주변의 눈이 대번에 휩쓸리며 거대한 용권풍을 만들기 시작했다.
“마법이란 개념의 시초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느냐?”
혹자는 용이 인간에게 마법을 내려 주었다, 인간을 가엽게 여긴 신이 마법을 인간에게 전해 주었다는 설화가 있지만.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기원’에 불과할 뿐, 태초의 마법은 자연을 자신의 손 위에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렇기에 마법사들은 마법을 ‘발산’한다.
마나를 모으고, 마법진을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형태를 만들어서 세상에 발산한다.
“하지만 우리 벨카서스 학파는 마법사들이 일반적으로 추구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길을 가지.”
“……!”
콰과과과!
네르하는 순간, 시저의 육체에 어마어마한 마나가 회오리치는 것을 보았다.
‘말도 안 돼!’
인간의 육체가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아득히 초월한 것만 같다.
아무리 시저가 8레벨의 대마법사라고는 하지만 저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저건 전생의 나라고 해도 불가능하다!’
경악하는 네르하의 모습에 시저는 나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저 미소를 본 것만으로도 좀 무리한 보람이 있었다.
“우리는 ‘가둔다’. 세상의 법칙을 손 위에 구현하는 것이 아닌, 법칙을 내면에 가두어 소우주의 완성을 꿈꾸지.”
그 개념은 마법사보단 기사들이 추구하는 개념에 가까웠다.
후우우우!
거칠게 몰아쳤던 눈의 폭풍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후욱, 후욱!”
시저의 얼굴과 몸에는 어느새 흥건히 땀이 배어 있었다.
“조금 힘들군.”
아무리 그라고 해도 세상 전체를 잡아먹을 것 같았던 네르하조차 경악할 기운을 다루는 건 아주 잠깐이라도 힘든 일이었다.
“…….”
네르하는 심각한 표정으로 방금 시저가 보여 주었던 광경을 다시 한번 상기했다.
‘닮았다.’
시저의 학파, 벨카서스가 추구하는 궁극의 형태와.
네르하가 마지막 순간 닿았던 그 지고의 경지는 마치 극과 극이 닿은 것처럼 비슷한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방금 전 시저가 보여 주었던 그 힘은 마치.
‘단 한 순간이지만 천마신공(天魔神功)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 * *
물론 시저에게서 마기를 느낀 것은 절대 아니었다.
네르하가 겪었던 천마의 그 절대적이고 파괴적인 초식과는 단 1도 연관성이 없었다.
하지만 궁극으로 향하는 지향점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네르하는 그 두 가지가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름길이 보인 느낌이다.’
고유 계통을 개척했다고는 하지만 네르하가 원하는 수준까지 도달하려면 5레벨 가지고는 턱도 없다.
하지만 시저의 가르침을 받아 벨카서스 학파의 이론을 체화할 수 있다면?
‘정말로 천마와 동등…… 아니, 그 이상을 넘어서는 것도 불가능이 아닐지도 모른다.’
네르하는 주먹을 꾹 쥐며 환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