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손님이 아니라 손놈 (1)>
“내, 너에 대한 무례의 대가로 부탁을 들어주긴 했다만 정말로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구나.”
루트비히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네르하에게 말했다.
“정말로 승산이 있으리라 보느냐?”
“당연히 있습니다. 숙조부께서도 보셨지 않습니까? 루시아가 수여식에서 보인 모습을요.”
사실, 베하나스에게 말했던 ‘마법사로서의 장래’란 말은 반쯤은 도발이었지만 남은 절반은 진심이기도 했다.
“아쉽군. 그 아이가 케프렌이 아닌 라데우스에서 태어났다면…….”
고작 반년이다.
그 반년 만에 기초적인 마법 이론을 마스터하고 실전에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수준을 올린다는 게 일반적으로 가당키나 한 일인가?
“라데우스에서 태어났다면 저의 존재에 가려져 빛을 보지 못했겠지요.”
광오하다 못해 어이가 없는 네르하의 말에 루트비히의 표정에 드물게 얼이 빠진 모습이 드러났다.
“큼! 크흠! 어찌 됐든 어떤 싸움이든 검의 낙원이 상대라면 반드시 이겨야 한다. 그 아이가 다시 케프렌으로 돌아가면 내 입장도 곤란해지니까.”
“물론입니다.”
네르하는 유쾌하게 대답했다.
“저 역시 한번 문 물고기는 놓치지 않거든요.”
사실, 이번 대결이 일어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시비가 걸린 배커보다는 루시아에게 있었다.
배커야 일이 벌어진 상황에서 겸사겸사 끼워 넣은 것이고, 진짜 이유는 루시아를 둘러싼 케프렌 내부의 암투에서 그녀를 떨어뜨리기 위함이었다.
* * *
교류전이 확정되고, 검의 낙원의 사절단이 이곳에 찾아오기 며칠 전의 일이었다.
“요즘, 표정이 좋지 않군.”
“그렇습니까?”
네르하는 최근 며칠 동안 루시아의 표정이 거무죽죽하게 죽어 있는 것을 보고는 의아함을 느꼈다.
분명 훈련 자체는 성실하게 소화하고 있는데 뭔가 매가리가 빠져 있달까?
몸 상태가 나쁘거나 리브라 내에서 문제가 있을 수는 없으니 결국 원인은 하나뿐일 터다.
“가문에 관한 일이냐?”
“윽!”
“맞는가 보군.”
눈을 동그랗게 뜨는 루시아의 모습에 네르하는 피식 웃었다.
녀석이 리브라 내에서 무언가 연락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진작에 눈치챘다.
어차피 상부에서도 녀석의 정체를 알고 있는 만큼 네르하 역시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있었을 뿐.
“집안에 뭔 일이 있나?”
“그, 그건.”
“도움이 필요하다면 말해라. 손이 닿는 곳까진 도와주지.”
네르하가 이렇게 피력했음에도 루시아의 표정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그런 답답한 모습에 네르하는 살짝 팔짱을 꼈다.
“이곳에 온 이상 가문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하지 말아라. 네 할 일만 하면 되는 일이야.”
“그게…….”
루시아는 머뭇거렸다.
네르하가 가문의 일을 타인에게 절대로 알리지 않겠다고 맹세했다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아.”
한동안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고 말았다.
“어쩌면, 강제로 가문으로 끌려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뭐?”
“정말 어쩌면 말이지요.”
한번 말문이 트이자 루시아의 입에선 속사포같이 케프렌의 내부 사정이 흘러나왔다.
“현재, 저희 가문은 권력 다툼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입니다.”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케프렌의 내막은 라데우스보다도 훨씬 복잡했다.
“대공자를 지지하는 파와 그 외의 다른 세력들이 모두 연합해 첨예한 대립을 이어가고 있지요.”
라데우스와는 달리 케프렌은 후계 간에 서열이란 것이 존재했다.
후계 서열 1위는 남성일 경우 대공자, 여성의 경우 대공녀라고 불리며 현 대공자는 원래 가문의 막내뻘에 해당하는 이였다.
그런데 그는 지난 수년 사이 개인의 무력만이 아니라 세력까지 급격하게 불리며 서열 1위를 차지했고.
워낙 그 세력이 짧은 시간 사이에 성장한 탓에 현재, 가문 내에선 잡음이 끊이질 않고 있다고 했다.
“현재, 가문은 대공자파와 그 외 서열 2, 3, 4위 세력이 대립 중이죠.”
“그래서? 그게 네가 걱정해야 할 이유가 되나?”
루시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문제는 대공자에게 일대일로 대항할 수 있는 후계가 없다는 게 점이죠.”
케프렌은 검가(劍家)이자 무가(武家)다.
그 무엇보다 무력이 중요시되며, 아무리 정치력과 그 외의 잡기가 뛰어나도 무력이 모자라면 어떤 지위에도 오를 수 없다.
“그 떨거지들이 널 앞세워서 권력 다툼을 진행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생각이 아니라 이미 의사를 타진해 왔어요. 이번 교류전에서 절 본가로 데려가겠다고.”
네르하는 팔짱을 낀 채 상황을 정리했다.
“원래라면 거절해야 하지만 거절할 수 없도록 누군가가 개입했나?”
“눈치가 빠르시군요.”
그 개입한 이는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가문 내에서 권력이 높거나, 아니면 루시아와 아주 가까운 사이거나.
문제는 현재, 루시아 본인이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을뿐더러 설사 돌아가더라도 문제라는 점이다.
‘이 녀석이 그 대공자라는 놈을 꺾을 수 있었다면 굳이 이곳으로 오지 않았을 테니까.’
뭐, 해결 방안은 간단하다.
애초에 상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쪽에서 보내주지 않으면 되는 문제다.
“한 가지만 묻자.”
“네.”
“널 이곳으로 보낸 이와 지금 돌아오길 원하는 이는 동일 인물이냐?”
아마도 루시아 혼자 힘으로 이곳에 온 것은 아닐 것이다.
분명 케프렌에서도 높은 지위에 있는 이가 손을 써 준 것이 분명할 터.
이 부분만 해결되면 정치적으로도 그리 큰 문제는 없을 것이었다.
다행히 루시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그건 아닙니다.”
“그럼 쉽군.”
그때, 네르하의 뇌리에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루시아, 요즘 융합기에 대한 수련은 좀 어떻지?”
무공과 마법을 접목시켜 만든 네르하만의 고유 기술.
네르하는 그걸 융합기라 명명했다.
“아직까진 순조롭습니다.”
루시아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면서 자신의 뺨을 긁었다.
“사실, 마법적인 부분보단 무학적인 부분이 더욱 어려워서 문제죠.”
사실, 네르하의 마법적 지식은 제법 넓을지언정 절대 깊지는 않았다.
반대로 무학적인 부분은 그야말로 독보적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방대하고 깊으니 루시아가 네르하를 묘한 눈으로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네르하는 그 부분을 무시하면서 다시 물었다.
“그래? 그럼 검을 들지 않고 마법과 융합기만으로 싸운다면 검의 낙원에서 어느 수준까지 상대할 수 있지?”
잠시 고민하던 루시아는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황당하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 적어도 검의 낙원에선…… 질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요?”
“그래?”
“원래도 그쪽에 있을 때 실력을 많이 숨겼는데도 수석을 놓치지 않았으니까요.”
확실히 네르하가 인정한 재능다웠다.
그 말을 들은 네르하의 입가가 음흉하게 꿈틀거렸다.
“좋아. 그럼 내가 한번 판을 만들어 보지.”
* * *
그렇게 해서 이른 현재.
시라스 케프렌이라는 방계와 매치업이 이루어지자 루시아는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라스가 이곳에 왔나요?”
“유명한 놈이냐?”
“저와 같은 나이, 같은 기수입니다. 검의 낙원에 입관할 당시엔 차석이었죠. 제가 사라졌으니 지금은 수석이 되었겠군요.”
“응? 그놈, 분명 지금 3학년이라고 했는데? 그럼 지금, 네 나이가…….”
“닥치십시오.”
정색을 하며 쏘아붙이는 루시아의 모습에 네르하는 살짝 쫄아 어깨를 움츠렸다.
아니, 뭐 나이가 뭔 상관이냐. 재능만 충분하면 됐지.
“어쨌든, 시라스 정도라면 충분히 이길 수 있습니다. 녀석이 제가 기억하는 성장 수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면요.”
“흠, 그럼 넌 충분하겠고.”
네르하의 시선이 입구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목창을 들고 단련실 안으로 들어오는 배커가 보였다.
얼마 전부터 배커는 그 제스란 놈을 꺾기 위해 단련실에 합류한 상황이었다.
“배커.”
“말해라.”
“본격적으로 내 가르침을 사사받을 준비는 되었겠지?”
배커의 인상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또래이자 과거, 자신이 괴롭혔던 당사자에게 가르침을 받는 건 자존심에 기스가 나는 일이겠지.
하지만.
“네놈에게 지도를 받는 건 굴욕이다.”
감히 자신을 검집으로 두들겨 팬 빌어먹을 놈을 상기하며 배커가 이를 갈았다.
“하지만 케프렌 놈들한테 지는 건 치욕이야.”
옆에서 그 케프렌 놈(?)이 시선을 살짝 옆으로 돌렸다.
퉁!
배커가 창을 바닥으로 찍으며 네르하에게 허리를 숙였다.
‘호오?’
“부탁한다. 아마 그 제스라는 놈은 내가 마법으로 싸운다 해도 승산을 점칠 수가 없는 놈이야.”
물론 마창 바이던트를 사용한다면 승산은 충분하다.
하지만 친선전에서 그런 아티팩트는 보통 금지되기 마련.
그렇다는 건 순수한 실력대결인데, 마법사가 검사를 일대일로 누르려면 적어도 한 수 위의 실력은 되어야만 했다.
‘1학년인 배커와는 다르게 놈은 케프렌에서도 상급생인 실력자. 한 2에서 3년 뒤라면 몰라도 지금의 배커에게 버거운 상대는 맞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검사를 상대하는 법을 전혀 모를 때의 이야기였다.
네르하는 배커의 전신을 훑어보며 생각했다.
‘바스톤만큼은 아니더라도 배커도 나름 체격 조건은 꽤 괜찮단 말이지.’
영약 탐사 때만 해도 빌빌거리던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제법 쌩쌩하게 돌아다니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렇기에 탐이 난다.
네르하는 배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나만 믿어라, 배커.”
‘일단은 목마른 놈에게 살짝 냉수를 떠먹여 줘 볼까?’
놈이 그 제스라는 놈을 꺾으며 성취감을 얻었을 때.
고작 그것이 끝이 아니며 더욱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걸 알아차린다면.
과연 배커는 지금처럼 자존심을 내세울 수 있을까?
네르하는 속으로 사악하게 웃었다.
* * *
아네시스 케프렌.
세계 최고의 검가 케프렌 가문의 적녀이며, 이번 교류전에서 검의 낙원의 대표로 합류한 인재.
검의 낙원 안에선 칠공주(七公主)라는 이명으로 불리는 그녀는 지금, 그 위상에 걸맞지 않게 상당히 긴장한 상황이었다.
‘이곳에 루시엘라 언니가…….’
네르하에게 아녜스란 이름으로 불렸던 아네시스는 안절부절못하며 숙소 안을 돌아다녔다.
원래 검의 낙원 측에서는 화합의 의미라든지 하는 구실로 그녀를 보낸 것이었지만.
사실은 아네시스가 그녀를 아끼는 검의 낙원 총장 아센시오에게 떼를 써서 억지로 들어온 것이 진실이었다.
‘으으, 이번에 돌아가면 할아버님께 잘 대해 드려야겠다.’
그녀의 떼가 통한 건 그녀의 재능도 재능이지만 어디까지나 가문 내 권력 싸움에서 중도를 지키며 처신을 잘해 왔기 때문이었다.
‘아마 두 번 다시 이런 억지는 통하지 않겠지.’
그렇기에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루시엘라와 접촉해서 ‘정보’를 건네주어야만 했다.
웅성웅성!
어떻게 해야 루시엘라와 접촉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때.
아네시스는 숙소 입구 쪽에서 왁자지껄하게 들어오는 일련의 패거리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분이 꽤나 좋아 보이네?’
바깥에서 뭔 일이 있었나?
언제나 점잔 떨며 표정 관리하는 시라스는 둘째 치더라도 그 추종자인 제스나 바란 같은 놈들의 얼굴이 꽤나 밝았다.
“하하하하, 그 배커라는 놈 수준을 보면 라데우스의 수준도 알 만합니다. 이번 교류전도 무난하게 압승하겠군요.”
“그 네르하라는 떨거지도 교류전에 나왔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1승은 확정된 거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유명하지. 재능이 없어 도태된 라데우스의 그 애물단지.”
“저기, 지금, 무슨 얘길 하는 거야?”
‘네르하’라는 이름까지 들리자 더 이상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던 아네시스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아, 아네시스 님!”
“들어보시죠! 저희의 무용담을!”
아네시스는 검의 낙원에선 아이돌과도 같은 존재였다.
케프렌의 직계에 더해 그에 걸맞는 압도적인 실력.
게다가 성격 역시 온화하고 털털해서 계급을 가리지 않고 검의 낙원 내에 수많은 추종자를 보유하고 있었다.
입지만으로 따지면 시라스조차 아네시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런 아네시스에게 자랑할 거리가 생기자 당연히 그들은 그녀에게 빠르게 다가가 떠들기 시작했다.
“그게 말이죠!”
“라데우스 혈족 놈들하고 시비가 붙었는데…….”
“그놈들이 제스 경한테……!”
그들은 자신들의 무용담을 아네시스가 알아줄 것이라 굳게 믿으며 입을 나불대었지만.
“잠깐? 지금, 누구와 시비가 붙었다고?”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길어질수록 아네시스의 동공은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