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손님이 아니라 손놈 (2)>
네르하와 배커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자세를 잡았다.
그 상태에서 네르하가 배커에게 말했다.
“마법사를 상대로 기사가 취할 수 있는 첫 번째 전략이 뭔지 아나?”
“당연히 접근이지.”
배커의 말에 네르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오러나 마나를 유형화할 필요도 없어. 그냥 검에 마나를 담아 강화를 시키기만 해도 초급 마법사의 실드 정도는 우습게 박살 낼 수 있으니까.”
그렇기에 초급 단계에서 기사와 마법사는 사실상 일기토의 성립이 불가능했다.
“리브라의 생도 수준인 3에서 4레벨의 마법사의 경우, 아티팩트의 도움 없이 대인 살상 마법을 하나 영창하는 데는 약 1분의 시간이 걸린다.”
애초에 마법사란 직종은 일대일 대결에 특화된 직종이 아니었다.
리브라가 추구하는 ‘전투 마법사’ 역시 다대다 전투를 상정하고 육성하는 것이 기본이었으니까.
네르하는 일반적인 마법 지팡이를 든 채로 배커에게 겨누었다.
“하지만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이건 어디까지나 실전이 아닌 ‘대련’이니까.”
팟!
마치 기사들의 돌격처럼 배커가 빠르게 네르하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런 배커를 향해 네르하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전투에서 승부를 좌우하는 진리는 간단해. 나는 공격에 맞지 않고 상대에겐 공격을 맞히는 것.”
“그리스(Grease).”
바닥의 마찰을 없애는 2레벨 마법이 배커의 눈앞에 펼쳐졌다.
미끌!
“큭!”
“홀드 퍼슨.”
몸이 크게 휘청이는 배커를 향해 네르하가 그대로 두 번째 마법을 날렸다.
콰당!
질기고 단단한 마나의 고리가 그대로 배커의 몸을 묶자 배커는 그대로 무력화되며 네르하의 눈앞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자, 2레벨 마법 두 개만으로 널 쉽게 무력화했다.”
“빌어먹을!”
네르하는 엎어진 배커의 눈앞에 쪼그려 앉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실전에선 이렇게 쉽게 되진 않지. 몸의 균형감각이 뛰어난 상대는 이런 함정 따윈 가볍게 떨치고 다가올 테니까.”
“그럼 뭐 어쩌라는 거냐!”
화를 내는 배커를 향해 네르하는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봐 주었다.
“방금 공방으로 대체 뭘 배운 거냐, 배커.”
네르하가 물었다.
“내가 지금 마법을 몇 개 썼지?”
“두 개.”
“그렇지. 하지만 내가 이걸 무영창으로 썼다고 보나?”
배커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아니지. 메모리 스택으로 주문을 미리 저장해 둔 것 아니냐?”
메모리 스택이란 시전자가 원하는 때에 바로 마법을 쓰기 위해 주문을 미리 영창하는 것으로, 검술로 따지면 삼재검법에 해당하는 아주 기초적인 마법사의 스킬이라 할 수 있었다.
네르하는 말을 이었다.
“메모리 스택은 시전자의 역량에 따라 저장할 수 있는 주문의 수준과 개수가 천차만별이지. 또한 미리 영창해 두었다 해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주문이 흩어지는 휘발성이 강하다는 단점이 있어.”
“그런 기초적인 지식은 나도 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주문을 미리 영창해 둘 수 있다는 점이야. 배커, 너 정도라면 기본적인 지팡이만으로도 3레벨 마법 두 개 정도는 사전에 충분히 메모라이즈 해둘 수 있겠지.”
검사와 마법사 사이에서 선공권은 기사에게 있다고 착각하기 쉬우나 그건 틀린 말이다.
우발적으로 마주친 상태에서 전투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 이런 대련에서 절대적인 선공권은 무조건적으로 마법사에게 있었다.
하지만 배커의 표정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누가 그걸 모르냐? 설사 4레벨 마법을 미리 영창해 두었다 해도 그게 빗나가거나 상대가 버티는 순간 순식간에 당해 버릴 거다.”
배커 역시 라데우스의 혈족으로서 대 기사전에 대한 연구를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그런 배커의 말에 네르하가 심드렁하게 답했다.
“당연히 그러면 박살이 나지.”
“뭐?”
“대놓고 한 방을 노리는데 그거에 멍청하게 맞아 줄 놈이 어디 있다고?”
네르하는 클로이아의 힘을 빌려 리브라에서 벌어졌던 역대 교류전의 전투 영상들을 모조리 섭렵했다.
“잘 들어라, 배커. 기사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선 무조건 쫀쫀하고 치사해야만 승산이 있다.”
“뭐, 뭐? 쪼, 쫀쫀?”
“불리한 상성을 극복하려면 그만큼 전략을 잘 짜야만 하지. 절대로 단시간에 결판을 내려고 해서는 안 돼.”
체력과 지구력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만큼 마법사들은 기사들과의 대결에서 속전속결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패착. 패배를 앞당기는 짓이다.
“실제로 고위 마법사들의 전투로 갈수록 저레벨의 마법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철저하게 장기전으로 몰고 가지. 그 정도 수준이면 일격에 상대를 먼지로 만들 마법을 빠르게 캐스팅할 수도 있는데도.”
배커는 살짝 침음을 흘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얼마든지 기사의 공격을 회피할 수 있다. 우리 같은 저레벨의 마법사와는 달라.”
네르하가 그 말을 잘랐다.
“기사들의 공격을 회피할 수 있다면 왜 그들은 일격 필살이 아닌 장기전을 벌이지?”
수준이 올라갈수록 마법사는 기사의 상성을 뒤집을 수 있다.
“정면 대결로 초급 마법사는 죽었다 깨어나도 초급 기사를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중위 마법사는 어느 정도 중위 기사에게 선전할 수 있고, 고위 마법사는 고위 기사를 얼마든지 요리할 수 있지.”
“……!”
“왜 그럴까? 고위 마법사는 고위 마법을 사용하기 때문에?”
“아니, 고위 마법사는 저위 마법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얻은 배커가 답변을 내놓았다.
“맞아. 정확히는 변수의 창출과 전투 환경의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기에 위로 갈수록 마법사가 기사를 압도할 수 있는 거다.”
지금, 네르하의 말은 단순히 탁상공론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고위 용병으로 전장을 구르던 레이첼에게도 확인이 끝났고, 실제로 중원에서 호되게 당해 본 경험까지 더해져 나온 결론이었다.
‘귀명우사 놈이 딱 그런 유형이었지.’
무림십대고수, 귀명우사(鬼命羽士).
십대고수 중 유일하게 술법을 사용하는 자로, 녀석 역시 마교의 고수와 싸울 때는 단기 결전보다는 철저하게 장기전으로 몰아가는 유형이었다.
그런 식으로 귀명우사는 같은 십대고수였던 종남검선을 처죽였던 마교의 2장로를 기어코 잡아 버리는 전공을 세웠다.
“내가 지금부터 너에게 가르칠 건 간단해. 변수의 창출과 전투의 주도권을 가져올 전략. 그리고 그 전략을 실행할 수 있게 하는 몇 가지 수법들이지.”
이제 막 주문의 가짓수를 늘려가는 다른 신입생들에겐 이걸 가르쳐 봤자 헛거다.
알려줘도 역량이 부족해서 쓸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라데우스의 혈족으로서 일반적인 리브라의 생도들과는 수준이 다른 배커라면 충분히 유효한 결과물을 낼 수 있을 것이다.
“좋아, 잘 부탁한다!”
배커가 의욕을 불태웠다.
그런 배커를 향해 네르하가 상큼하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럼 일단 도망치는 법부터 배워 볼까?”
“……뭐라고?”
* * *
네르와 배커의 훈련은 계속되었다.
검의 낙원의 기사들이 지금 리브라에 와 있다고는 하나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대련회는 교류전에서 가장 마지막에 배정된 행사였다.
리브라 내에서 화목을 다진다는 이유로 적어도 5일 정도는 리브라의 마법사들과 친목을 다질 예정이었다.
물론 겉으로만 그렇다는 거고, 실제론 서로 칼을 갈며 마지막 행사인 대련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레이첼 교수님?”
“안녕?”
한창 교류전의 준비에 여념이 없던 와중, 레이첼이 몇 명의 상급생들을 이끌고 네르하에게 찾아왔다.
‘저들은 분명 이번 교류전에 참가하기로 한 이들인데?’
그리고 레이첼이 책임자인 ‘실전 마법 연구회’ 동아리의 일원들이기도 했다.
“무슨 일이신지?”
“부탁할 게 있어서.”
레이첼이 뒤에 있는 자신의 제자들을 향해 한심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부탁이라면?”
“혹시 이 녀석들을 좀 훈련시켜 줄 수 있겠어?”
레이첼의 부탁은 상당히 의외였다.
뒤에서 다 죽어가는 표정을 하는 선배들의 모습을 보면 대충 어떤 이유로 찾아왔는지는 이해가 가긴 하는데.
“어째서 저죠?”
“내가 네 수준을 알고 있으니까.”
레이첼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리브라의 생도 그 누구도 7레벨의 마법사와 싸워서 5분 이상을 버틸 수 있는 자는 없어. 널 빼고는.”
레이첼의 충격 발언에 대번에 뒤에 있던 선배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소문이 정말이었나?”
“교수님이 저 녀석을 지지한다는 소문 말이야?”
“그게 아니라면 굳이 1학년을 동아리로 끌어들일 이유가 없지.”
실전 마법 연구회의 지도 교수인 레이첼은 그 무엇보다 실력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는다.
그게 아니라면 평민들을 자신의 휘하로 들일 이유가 없었다.
그런 그녀가 라데우스의 직계인 네르하를 1학년일 때부터 자신의 휘하에 들였다는 건 여러모로 대외에 생각할 거리를 주는 행위일 수밖에 없었다.
“흠.”
네르하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뒤에 있는 선배들을 훑었다.
‘확실히 신입생들과 비교할 수는 없군.’
저들 중 학년을 대표하는 ‘에이스급’은 없다고 해도 나름 레이첼이 휘하에 거둔 정예들이다.
나름 마법사로서의 역량은 준수한 수준일 터.
그런 네르하의 눈빛을 알아챈 레이첼이 다시금 말문을 열었다.
“굳이 이번 교류회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야. 고작 며칠 정도의 훈련으로 기사를 이길 거라 기대할 수는 없지.”
“그 말씀은?”
“교류전이 끝나도 이 녀석들을 계속 네 휘하에 넣고 부려. 물론 통제 여부는 당연히 네 역량에 달렸지.”
“호오?”
네르하는 레이첼의 속셈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리브라 내에서부터 세력을 확장해 가라는 소리군.’
사실상 부탁의 탈을 쓴 후원이나 다름없었다.
다른 형제들도 리브라에 재직 중일 땐 이런 식으로 동기 및 선, 후배들을 포섭하며 세력을 불려갔을 것이다.
네르하 역시 졸업 후 후계 경쟁을 생각한다면 일찌감치 자신의 세력을 늘려가는 것이 좋고 말이다.
“이건 일종의 시험이기도 해. 네 지도를 받은 이 녀석들이 교류전에서 어느 정도의 활약을 벌이냐에 따라 너의 평가 역시 크게 뒤바뀔 테니까.”
“흥미로운 말씀이군요.”
비록 대련회가 얼마 남지 않았지만 기본이 되어 있는 녀석들이라면 며칠 정도의 지도로도 충분히 효과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어째서지?”
레이첼의 표정이 살짝 뒤바뀌었다.
하지만 네르하는 단호했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모르되, 따를 마음도 없는 이들을 데리고 성과를 내기엔 아무리 저라도 무리라서 말이죠.”
그러고는 저 멀리서 열심히 훈련 중인 배커를 가리켰다.
“지금은 배커 녀석을 가르치는 것도 빠듯하기도 하고요.”
처음, 실전 마법 연구회에 발을 들였을 때 저들이 보이던 적의가 아직까지도 기억난다.
게다가 저들 중에는 무엇보다.
“거기에 아놀드 선배까지 포함되어 있군요.”
움찔!
이전, 네르하에게 얻어맞고 침몰한 아놀드가 무리에 섞여 있었다.
덩치 자체가 거의 바스톤에 필적하는 거한이었으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때, 뒤에 있던 아놀드가 레이첼을 제치고 네르하의 앞으로 나섰다.
“……?”
“부탁이다.”
털썩!
“우릴 단련시켜다오.”
어째서인지 자존심을 완전히 접은 아놀드가 네르하의 눈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반드시 이기고 싶다. 검의 낙원의 그 빌어먹을 놈들에게 말이다.”
“이기고 싶다?”
“그렇게 해 줄 수 있다면 우린 널 주군으로 모시고 충성을 다하겠다.”
충성 서약까지 거론할 정도면 정말로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는 뜻이다.
‘이렇게 먼저 숙이고 들어올 줄은 몰랐는데.’
뭔가, 저 눈빛에선 뭔가 개인적인 원한이 깃들어 있었다.
아놀드만이 아니었다.
레이첼이 데려온 이들 모두가 네르하에게 단련을 받는다는 굴욕감보다는 특정한 누군가를 향해 분노를 불태우는 모습이 두드러져 보였다.
네르하는 그런 그들의 모습을 전부 살피고서야 대략적인 내막을 알아차렸다.
“설마, 그 짧은 시간 사이에 그놈들이 와서 난리를 쳐댄 겁니까?”
그게 아니라면 교류전에 처음 참여할 저들이 저렇게 활활 타오를 리가 없었다.
“그렇다.”
아놀드가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확인 사살을 가했다.
‘대체 그 새끼들은…….’
개념이 있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그러고 다니는 건지 모르겠다.